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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거북선 모형
 서울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거북선 모형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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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7년 역사를 700자 내외로 요약하라는 요구를 받았다면? 아래는 그런 주문을 받았다는 가정하에 한번 써본 '임진왜란 700자 약사'이다. 

임진왜란 7년사를 700자로 요약하라면?

임진왜란은 풍신수길(豐臣秀吉)이 1592년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우리나라, 일본, 명 사이의 국제 전쟁으로, 1598년까지 계속되었다. 풍신수길은 조선 정부에 "가도입명(假道入明)", 즉 "중국을 치려 하니 길을 비켜 달라"고 요구했다.

조선이 불응하자 풍신수길은 대군을 보내어 1592년 4월 14일 부산진부터 파괴했다. 그 이후 일본군은 전쟁을 일으킨 지 불과 19일째인 5월 2일, 조선의 서울 한양을 점령했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창의한 의병들, 뛰어난 전략과 전투력을 바탕으로 바다를 장악한 조선 수군, 그리고 중국 지원군에 가로막힌 일본은 명나라와 강화 교섭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임진왜란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을 임진왜란이라 한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고,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강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597년 2월 이래 다시 군대를 조선에 상륙시킨 풍신수길은 7월 들어 본격적으로 북진 공격을 감행했다.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쟁은 풍신수길이 병사하면서 끝났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명도 국력이 쇠약해진 끝에 새로 일어난 청나라 세력을 막지 못하고 마침내 멸망했다. 전쟁 당사자인 일본만 수많은 전리품과 고급 인력 탈취를 기반으로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임진왜란 당시 쳐들어 온 일본군과 가장 먼저 전투가 벌어진 곳은 부산진이었다. 사진은, 중과부적으로 이날 전몰한 정발 첨사 등 선열들을 기려 조성된 부산의 정공단.
 임진왜란 당시 쳐들어 온 일본군과 가장 먼저 전투가 벌어진 곳은 부산진이었다. 사진은, 중과부적으로 이날 전몰한 정발 첨사 등 선열들을 기려 조성된 부산의 정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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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 100여 년 동안 일본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일본을 최종적으로 통일한 세력가는 풍신수길이었다. 풍신수길은 '국내 정권의 안정을 위하여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정복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조선과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6차 교육과정 국정 <중학교 국사 교과서>의 표현)'

풍신수길은 규슈 지역을 공격 중이던 1587년, 대마도 도주 소씨에게 조선을 일본에 복속시키는 교섭에 나서라고 명령했다. 풍신수길은 조선을 복속시킨 후, 조선을 길잡이로 삼아 중국을 침략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마도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조선과 무역을 해온 경험으로 미뤄볼 때, 조선이 일본에 복속하겠다고 할 리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풍신수길의 문책이 무서웠던 대마도주, 허위 술책을 강구

대마도 도주는 풍신수길의 복속 요구를 통신사 파견 요청으로 임의 변경, 조선 조정과 교섭에 나섰다. 일본 사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던 조선 정부는 이에 응했다. 조선은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종사관 허성으로 구성된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대마도 도주는 풍신수길에게 일본에 복속하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바다를 건너왔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풍신수길은 거만한 자세로 통신사 일행을 상대했다.

통신사 일행은 귀국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상반된 보고를 했다. 황윤길과 허성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만, 김성일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정반대의 의견을 제출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 세력은 역시 동인인 김성일의 의견을 채택했다.

부산 자성대 비탈에 건립되어 있는 조선통신사역사관
 부산 자성대 비탈에 건립되어 있는 조선통신사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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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조선 정부가 전쟁에 전혀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남쪽 지방의 성을 수리하는 등 약간의 대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가지 못했다. 개국 이래 200년 동안 평화롭게만 살아온 백성들은 노역 동원과 세금 납부에 완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공사는 중단되었고, 일본이 나라 전체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대규모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한 조선은 거의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당했다.

1592년 4월 13일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종지의(宗義智)를 선봉으로 한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부산진에서 정발이, 동래에서 송상현이, 다대포에서 윤흥신이 장렬하게 맞섰으나 워낙 중과부적인 탓에 끝내 모두들 순절했다. 송상현은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는 일본군의 요구에 '戰死易(전사이) 假道難(가도난)', 즉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뜻 깊은 명언을 남겼다.  

일본군과 조선 중앙군이 처음으로 접전을 벌인 경북 상주 북천 강변 산자락에 조성되어 있는 '북천 전적지'
 일본군과 조선 중앙군이 처음으로 접전을 벌인 경북 상주 북천 강변 산자락에 조성되어 있는 '북천 전적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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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조선군 관군은 싸우면 패했고, 그렇지 않으면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조선군 관군 중앙군과 일본군의 첫 전투가 상주에서 벌어졌지만 이일이 패전했다. 조선의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던 신립도 대패 이후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피란을 결정했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4월 30일 한성을 탈출했다.  

선조는 개성을 지나 평양성에 들었다가, 일본군이 다시 평양 가까이 밀려오자 압록강 턱밑의 의주로 갔다. 의주에 당도한 선조는 요동 지역으로 넘어가 안전을 도모하려고 시도했지만 명의 망명 거절과 신하들의 만류로 포기했다.

선조는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에 망명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명의 거부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망명은 실행되지 않았다. 사진은 압록철교가 보이는 압록강의 풍경.
 선조는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에 망명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명의 거부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망명은 실행되지 않았다. 사진은 압록철교가 보이는 압록강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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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광해군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흩어진 병사들을 모았다. 의병 창의도 촉구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종묘사직을 받들게 하고 분조(分朝, 조정을 둘로 나눔)했다. 이 무렵, 선조의 다른 두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와 강원도로 피란을 갔다가 가등청정(加藤淸正)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 두 왕자는 회령에 머물던 중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 등에게 붙잡혀 가등청정에게 넘겨졌다. 조선 조정은 두 왕자를 구해내기 위해 명군에게 일본과의 교섭을 부탁하기도 했다.

전쟁 판도 바꾼 수군, 관군, 의병의 활약

전쟁 판도를 뒤집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5월부터 전투를 개시한 이순신은 모든 해전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거북선과 판옥선(板屋船), 대규모 화포로 무장한 조선 수군은 일본 전함에 비해 우위에 있었는데다,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까지 더해져 한산도 대첩 등 빛나는 전과를 쌓았다. 일본군은 서해를 이용하여 군수품과 보충 병력을 한양 방면으로 수송하려던 계획을 접어야 했다. 또 곡창 지대를 점령함으로써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려던 계획도 흐트러졌다.

수군의 연이은 승첩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다. 전쟁 초기 궤멸되었던 관군이 다시 일어선 것도 전쟁의 흐름을 뒤집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전열을 정비한 관군은 권율의 행주산성, 김시민의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한산도의 이순신 사당
 한산도의 이순신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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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과 승병도 일어났다. 7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경상도에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권응수, 전라도에서 김천일, 고경명, 충청도에서 조헌, 함경도에서 정문부, 황해도에서 이정암, 평안도에서 조호익, 양덕록, 경기도에서 심대, 홍계남 등이 자발적으로 군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 스님 등은 승병을 이끌고 왜란 극복에 앞장섰다. 의병들의 뛰어난 활동은 일본군들로 하여금 전쟁을 포기하고, 그 대신 강화 교섭을 시도하게 만드는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조정은 의주에 머물면서 명나라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다. 8월 24일 정곤수는 명의 병부상서 석성을 만나 지원군을 보내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200년간 명나라에 충성을 다한 조선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7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표현)'이라는 논리의 파병이었다.  

사실 그 이전까지 명은 조선을 믿지 않고 있었다. 전쟁이 터진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수도를 포기하고 압록강 바로 아래까지 임금과 조정이 피란을 거듭한 것부터 이상하게 여겼다. 일본군과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초기 조선 조정을 의심했던 명나라

최초의 파병 명군은 요동에 있던 조승훈 부대였다. 그러나 일본군을 가볍게 보고 제대로 준비도 없이 평양성을 공격했던 조승훈 군은 크게 패전했다. 이어 명은 송응창과 이여송이 이끄는 대규모 부대 파견을 결정했다. 1593년 1월 6일, 이여송이 3만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했다. 명나라 대군은 조선군과 협력하여 1월 8일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군은 평양과 개성을 버리고 한성으로 퇴각했다. 자신감에 찬 이여송은 소규모 부대만 이끌고 한성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많은 병력을 한성에 집결시킨 일본군은 명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복병을 깔아두고 있었다. 벽제관에서 일본군 복병을 만나 간신히 목숨만 건진 이여송은 군량 부족을 이유로 개성으로 후퇴했고, 그 뒤로는 전진을 꺼렸다.  

일본군은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보급 곤란, 의병의 공격, 수군 참패, 명군과의 전투 등 모든 것들이 어려웠다. 그래서 부산 좌우 바닷가 일대의 점령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병력만 남기고 군대를 일본으로 철수시킨 채, 명과 강화 교섭을 벌이기 시작했다. 명도 일본군의 요동 진입을 막는 데 성공했으므로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성곽이 비스듬한 것이 특징인 왜성의 모습. 사진은 정유재란 말기 가등청정이 거의 전사 직전까지 몰렸던 울산왜성.
 성곽이 비스듬한 것이 특징인 왜성의 모습. 사진은 정유재란 말기 가등청정이 거의 전사 직전까지 몰렸던 울산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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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서는 심유경, 일본에서는 소서행장이 각각 강화 교섭 대표로 나섰다. 명은 일본군의 무조건 철수를 요구했고, 풍신수길은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내놓고, 조선의 남쪽 땅을 일본에 양도하라고 했다. 합의가 될 일이 아니었다. 조선은 명이 전쟁 대신 강화 노선을 걷는 것이 불만이었을 뿐만 아니라, 강화 교섭에서 배제된 데에 분노하고 있었다. 

1596년 9월, 명은 풍신수길을 일본 왕으로 책봉하기 위해 사절을 오사카에 파견했다. 조선에서도 황신 이하의 사절을 딸려보냈다. 명은 풍신수길이 왕으로 책봉되면 군대를 철수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책봉 외 다른 선물이 없는 데에 분노, '조선이 명과 일본의 협상을 방해했다' 등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면서 정유재란을 결정했다. 풍신수길은 조선 사절과는 만나지도 않았다.

요구 사항 제대로 안 이뤄지자 정유재란 일으키는 풍신수길

1597년 2월부터 일본군은 다시 조선에 상륙하기 시작, 7월부터 북쪽을 향해 다시 공격을 재개했다. 정유재란 발발 직전 선조는 이순신을 의심하여 투옥시키고 그 대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지만, 원균이 이끄는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거의 전멸당했다. 그 결과 정유재란 초기에는 일본군이 바다를 장악했다.

정유재란 초기, 조선 수군 장졸들과 전함들이 대부분이 전몰된 칠천량 바다
 정유재란 초기, 조선 수군 장졸들과 전함들이 대부분이 전몰된 칠천량 바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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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군은 줄기차게 북진했던 지난 임진년(1592) 때와는 달리 충청도 직산에서 접전을 벌인 이후 그냥 남쪽 해안으로 물러났다.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바닷가에 왜성을 쌓고 장기 주둔 태세를 취했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줄기차게 조선을 괴롭힘으로써 좋은 교섭 결과를 얻으려는 풍신수길의 전략 변화 때문이었다.

정유재란의 또 다른 특징은, 일본군들이 대규모로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에 조선 의병들이 제대로 활약을 펼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정유재란 때의 왜군은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서 일본으로 보내는 잔혹 행위를 일삼는 특징도 선보였다. 풍신수길이 그 수를 세어 공로를 인정하겠다고 한 탓이었다. 지금도 교토에는 당시 조선들의 코와 귀를 묻은 이총(耳塚, 귀무덤)이 남아 있다.

전쟁 재발 후 명군도 다시 조선으로 들어왔다. 명군 대장 양호는 일본군 중 강화에 가장 반대하는 강경파 가등청정의 군대를 주로 공격했다. 1597년 12월 말에 시작된 울산성 전투에서 가등청정은 거의 전사 위기까지 몰리기도 했다. 울산성 전투 후 일본 육군은 크게 세가 꺾였다.

수군 대장으로 복귀한 이순신도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여 해상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러던 중 1598년 8월 18일 풍신수길이 병사하면서 전쟁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덕천가강(德川家康) 등은 철군 결정을 내렸다.

풍신수길 병사 후 권력을 잡은 덕천가강은 일본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사진은 일본 기후시 기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덕천가강 인물도의 일부이다.
 풍신수길 병사 후 권력을 잡은 덕천가강은 일본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사진은 일본 기후시 기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덕천가강 인물도의 일부이다.
ⓒ 기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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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들은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 명군과 교섭을 벌였다. 명군도 희생을 안아야 하는 전투를 기피하려 했다. 일본군은 명군 장수들에게 뇌물까지 주었다. 조선은 일본군의 무사 철수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명군이 일본군에게 안전 철수를 약속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순신은 전함을 몰고 노량으로 달려가 일본군을 대파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전투에서 이순신은 전사의 비운을 맞았다. 순천왜성에 머물러 있던 소서행장이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전쟁은 완전히 끝났다.

조선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초토가 되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으로 변했고, 인구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일본군은 수많은 조선인을 살해했고, 경복궁, 불국사 등 무수한 문화재들을 파괴했다. 일본은 포로로 잡아간 조선인들을 포르투갈 등지에 노예로 팔고, 지식인과 기술자들을 활용하여 나라의 수준을 높였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을 치르는 동안 줄곧 세력을 키운 청나라 세력의 도전을 막지 못해 결국 멸망했다.

덧붙이는 글 | 전국 임진왜란 유적지 답사기를 지금까지 79회 썼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답사할 수는 없어서 이곳저곳 임의로 취재를 하다 보니 "임진왜란 7년 전체의 역사를 시간 순으로 보여주는 기사부터 쓰고, 이어서 사건별로 이야기를 해주어야 독자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요청을 더러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80회 기사로 이 글을 씁니다.



태그:#임진왜란, #이순신, #정유재란, #소서행장, #가등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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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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