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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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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뛰는 소리다. 한 명이다. 그 자는 자신이 있는 곳을 우회를 한 다음 앞뒤에서 포위할 모양이다.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렸고 발소리가 하나라면 적은 모두 둘이라는 결론이다. 이미 자신이 노출된 이상 불리한 자세로 숨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우회하는 자가 나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대로라면 불과 반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옆으로 지나칠 것이다. 기회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무영객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호흡을 멈췄다. 하나, 둘, 셋. 상대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 왔다. 하압! 무영객이 기합을 넣으며 숨을 토했다. 그와 동시에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협봉도를 머리 위까지 쳐들면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상대는 지척에서 갑작스런 소리가 들리자 방향을 가늠하지 못하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검을 횡격(橫擊)했다.

은빛 섬광이 반짝했다. 나름대로 대응은 빨랐지만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반사작용일 뿐이었다. 무영객은 자신의 발밑을 스쳐지나가는 검의 파동을 느끼며 상대의 머리 위에서 일직선으로 베었다. 제대로 벴군. 손목에 전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무영객은 상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자의 목은 반쯤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숲으로 뛰어들던 사내는 비명을 지를 여가도 없이 헉, 하고 짧은 숨을 토하며 쓰러졌다. 그는 목덜미에 후끈하는 불길이 닿자마자 왜 갑자기 길이 바뀌었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이윽고 그 곳이 황천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말이다.

무영객은 이미 승부가 끝난 상대를 확인하는 따위의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남아 있는 적이다. 남아 있는 자가 고수라면 자신의 위치가 노출된 지금이 가장 위험할 때다. 무영객은 재빨리 다섯 걸음을 옮겨 위치를 벗어났다. 이어 진적살적세를 취하고는 협봉도를 손목 위로 한바퀴 빙글 돌렸다.

상대가 움직이는 기미는 없었다. 무영객은 조심스레 보법을 횡으로 펼치며 나아갔다. 지금의 위치는 관목이 많아 운신의 폭이 제한되었다. 상대는 아직도 꼼짝하지 않고 있다. 무영객도 가만히 있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새도 나무도 잎도 모두 숨죽였다. 가벼운 바람이 살랑 숲을 한차례 흔들었다. 

"나와라! 제대로 붙자."

처음의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넓은 곳에서 무예로 승부를 보자는 것이다. 나오란다고 나갈 무영객이 아니지만 상대의 태도에서 더 이상 은신으로 기습하는 게 무용할 것 같았다. 아무리 살수이지만 정면대결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하는 법. 그것이 일을 제대로 그리고 빨리 해결하는 길일 때도 있다.

실패는 곧 죽음. 정면대결에서 패하든 기습이 실패해 위태롭든 죽음 앞에선 공평하다. 결과가 공평하다면야 피할 이유는 없다. 죽음을 피하며 산들 죽음보다 못한 삶이 이어지기 밖에 더하랴.

무영객이 천천히 관목 숲을 나갔다. 상대는 마차 하나가 다닐만한 길 한 가운데 서 있다. 그의 허리에는 양쪽으로 도병(刀柄 : 도의 손잡이)이 세 치 가량 나와 있다. 쌍도(雙刀)를 쓰는 자인 모양이다.

섬서괴도 척숭은 덤불에서 나오는 자를 바라보았다. 체격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단단하면서도 날렵해 보였다. 보법이 안정돼 있고 호흡도 태연하다. 무엇보다 표정이 없다. 마치 감정이 없는 인간 같았다. 방금 살수를 펼친 자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다.

왼손에 쥔 가느다란 검도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듯 검극이 땅을 향해 있다. 조금 전 이 자에게 당한 은화사 요원도 만만찮은 검사(劍士)다. 은화사 소속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의 무위가 강호에서 결코 낮은 배분이 아니다. 그런 요원을 순식간에 잠재우고도 호흡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다니. 척숭은 내심 긴장했다.

척숭이 양손을 허리에 가져가 쌍도를 뽑았다. 스캉!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숲을 가로질렀다. 소리에 놀란 산새 한 마리가 푸다다닥 공중으로 날아갔다. 척숭의 특기이자 버릇이다. 발도를 하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건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주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스스로에게 전의(戰意)를 촉발시키는 요식행위다.  

척숭은 쌍도를 번갈아 휘둘렀다. 쏴악, 쏵, 파공음이 진동했다. 겉으론 상대를 향한 위협이지만 실제론 몸 풀기다. 이어 척숭이 오른쪽 도로 상단막기를 하고 왼쪽 도는 중단세를 취했다. 적의 공격을 왼쪽 도로 쳐냄과 동시에 오른 쪽 도로 공격하는 쌍도의 기본자세다.

물론 손속을 주고받게 되면 그렇게 단순하게 대응하진 않는다. 상대 수준에 따라 자신의 특기인 섬형십팔도법(閃形十八刀法)을 전개할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공격할 태세를 갖추지 않고 여전히 검극을 땅으로 향하고 있다. 그자의 눈을 보았다. 척숭은 알고 있다. 모든 공격은 눈에서부터 먼저 시작된다는 걸. 그건 제 아무리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공격하는 자의 본성이다.

저 자의 눈은 아직 공격할 의도가 없다. 그러면서도 전진해 온다. 준비 없이 칼을 받겠다는 건가. 다섯 걸음만 앞으로 나오면 자신의 도가 미치는 거리다.

한 걸음…, 저 자의 눈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는다.
두 걸음…, 여전히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다.
세 걸음…, 아직도 눈동자는 무심하다. 
네 걸음…, 이제는 의도가 드러나야 한다. 
다섯 걸음…. 미쳤군. 이 자는.

차압! 기합을 넣으며 척숭은 앞손의 도로 상단을 방어함과 동시에 뒷손의 도로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쌩, 손목과 함께 뒤집힌 칼날이 비명을 질렀다. 도법(刀法)이고 자시고 할 거 없이 이렇게 어리석은 자는 단칼로 승부를 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러나 상대는 옆으로 비끼며 자신의 일격을 간단히 피하는 것 아닌가. 그 와중에도 상대는 한 걸음 전진했다. 척숭은 물러서지 않았다. 상대의 눈과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걸 포착했다. 척숭은 본능적으로 쌍도를 교차해 하단을 방어했다.

적의 가느다란 검이 자신의 묵직한 도에 튕기는 소리가 났다. 아니 나야만 했다. 그런데 소리가 없었다. 검과 도가 부딪치는 충격은 더욱 없다. 적의 시선은 분명 하단 공격을 가리키고 있었다. 헛짚었나? 아차, 척숭은 몸을 던져 앞으로 굴렀다.

위기 시에 적의 공격을 가장 빨리 피할 뿐만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임기응변술이다. 한 바퀴 데그르르 구른 척숭은 관성의 힘으로 재빨리 일어서 상대의 이차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공격은 없었다.

상대는 자신과 스치듯 서로를 지나간 이후에도 천천히 돌아섰다. 상대가 뒤를 노리는 반격이 없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만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으음, 기회를 놓쳤군. 앞으로 구르지 않고 제자리에서 바로 회전하면서 공격했어야 했어.

그런데 저 자는 마치 내가 전방 낙법을 취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하는군. 척숭은 상대를 다시 마주보며 섰다. 그의 눈은 언제 공격했냐는 듯 여전히 무연하다.

갑자기 척숭의 왼쪽 가슴과 오른쪽 허벅지가 뜨끔하더니 엷은 통증이 지르르 전신을 훑었다. 오, 내가 당했어. 가슴 속에서 돌덩이가 쿵하고 떨어졌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았다. 눈앞에 적을 놔두고 상처를 살피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을 할 그가 아니다.

순간 척숭의 뇌리에 번개가 번쩍했다. 아, 이 자는……. 열흘 전 금릉 은가의 지하실이 떠올랐다. 그래, 이 자야. 짧은 순간에 자신에게 두 번의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는 그밖에 없었다. 그때는 자신이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태양이 중천에 있는 밝은 대낮에도 눈뜨고 당하다니…….

음…….

척숭은 자기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무영객은 상대가 자신의 눈길에 속아 검길을 놓쳤다는 걸 알았다. 저자는 아직 눈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로군.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 무영객은 손목에 힘을 빼고 협봉도를 두 바퀴 돌렸다. 손잡이가 손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다. 느낌이 좋군. 저자는 나의 눈을 보고 있어. 나의 눈길에 따라오는 자라면 길게 끌 건 없다.

무영객은 이차 공격을 준비했다. 적의 눈을 보았다. 불길이 일고 있다. 저런 식으로 활활 이는 불길은 금방 소진되고 말지. 그렇다면 먼저 공격할 건 없다. 무영객은 살적세에서 견마세로 자세를 바꾸었다. 협봉도를 왼쪽 허리에서 오른쪽 어깨로 비스듬히 세웠다. 적은 쌍도이기 때문에 들어오는 방향을 미리 예단할 수가 없다.

어느 쪽이든 첫 수(手)는 받아쳐내야 한다. 쌍도와의 대결에서 첫 공격을 피하는 건 자살행위다. 쌍도를 휘두르는 자의 열에 아홉은 첫 수가 허초이고, 둘째 수에 실초가 실려 있다. 간혹 첫째와 둘째 모두 허초로 지르는 자가 있긴 하나, 허초를 연속으로 전개하는 동안 상대가 그 틈을 노려 공격하면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할 수가 있다.

검초의 법식이라는 것도 마작처럼 상대의 패와 수를 읽는 자가 이긴다. 자신은 상대의 수를 읽고, 상대는 자신의 수를 읽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평정심을 유지하고 위장에 능해야 한다.

생명을 걸고 벌이는 승부에서 평정심을 간직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이래서 검의 길과 마음의 길은 둘이 아니라 했고, 검사와 선사는 궁극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쌍도를 휘두르는 자의 눈길에 감정이 담겨 있다. 저자는 나의 검을 보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비친 나를 보고 있군. 허상에 사로잡혔어. 미끼를 던지면 덥석 물겠군. 무영객은 오른발을 쿵하고 내딛었다. 상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속지 않았다. 그러나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빛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자 이제, 저 자는 나에게 들어올 것이다. 그때가 기회다. 그물을 펼치고 기다릴 때다.

무영객은 보법을 옆으로 전개하며 쌍도의 주의를 천천히 돌았다. 무영객이 우로 돌다가 좌로 방향을 틀려는 찰나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도가 자신의 목을 치고 들어왔다.

찌르는 것도 베는 것도 아닌, 찌르면서 베고 베면서 찌르는 연사(燕蛇)도법이다. 제비처럼 날아가고 뱀처럼 찌르는 동작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손목의 힘이 받쳐 주어야 함은 물론이고 선비가 붓을 운필하듯 도를 다뤄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도법(刀法)이다.

무영객은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공격을 받았다. 칼등으로 상대의 도를 살짝 쳐내 미끄러뜨린 후 눈은 상대의 목을 보며 검은 복부를 찔러들어 갔다. 상대에게 두 번째 공격의 여유를 주지 않으면서 자신이 공세를 주도하기 위해서다. 그 와중에 눈으로 속임수를 썼다.

창, 하는 소리가 났다. 쌍도가 그의 중단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첫 수를 교환하면서 나의 눈에 속임수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적어도 그걸 파악할 만큼의 수준은 되어있는 자다. 그럼 승부는 이제부터다. 저자는 이제부터 나의 눈에 더욱 신경 쓸 것이다.

상대는 눈길에 의해 검길이 따라가는 한 가지 패만 있지만, 나에겐 눈길과 검길이 따로 노는 두 가지 패가 있다. 저 자의 심중이 복잡해질 것이다. 생각이 많아지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동작이 느려진다. 그러다보면 틈을 보이게 마련. 무영객은 쌍도와 눈을 마주보면서 검극을 빙글빙글 돌렸다.

쌍도가 자신의 눈을 파악하려는 게 보였다. 무영객이 좌단전과 우상단을 연속으로 찌르며 공격해 들어갔다. 쌍도는 두 개의 도로 좌단전과 우상단을 동시에 방어했다. 창, 창, 이번에도 도와 검이 부딪쳤다.

적의 눈길을 파악하고 공격을 막아낸 척숭은 이제 자신이 공격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쌍도를 가슴 앞으로 모으려는데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커억, 하고 뱉어냈으나 나오는 건 없다. 척숭은 가슴이 답답했다. 기도(氣道)에 솜뭉치가 꽉 막혀 있는 것 같았다.

허억, 허억, 그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카악, 마침내 솜뭉치가 튀어나오며 기도가 뚫렸다. 빠져나온 게 솜뭉치가 아닌 시뻘건 선혈 덩어리였지만 뱉어내고 나니 시원했다.

그제야 척숭은 자신이 당했다는 걸 알았다. 이번 공격에서 적의 눈길은 허초였던가 실초였던가. 허초였어, 그 자의 검은 앞서 두 번의 공격과 마찬가지로 허초를 전개한 거야. 아냐, 실초였어. 두 번의 공격을 속임수로 처리하고 이번에는 눈과 검을 일치시킨 거야.

난 분명히 보았어. 앞서는 눈과 검이 달랐지만 이번에는 일치한 걸 분명히 보았어……, 근데 왜 내가 당했지……. 왜……, 왜……. 척숭은 자신이 심연으로 빠져 들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요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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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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