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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림의 신작 소설 <넥타이를 세번 맨 오쿠바>는 정치적 박탈이 만연한 무기력한 삶에서 신앙과 공동체를 되묻는다.
▲ <넥타이를 세번 맨 오쿠바> 유채림의 신작 소설 <넥타이를 세번 맨 오쿠바>는 정치적 박탈이 만연한 무기력한 삶에서 신앙과 공동체를 되묻는다.
ⓒ 유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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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현대사와 소소한 일상, 영화 <포레스트 검프> 떠올리게 만들어

유채림의 신작 소설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 안에 다양한 즐거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거칠게 두 가지 즐거움으로 나눠보자면, 하나는 대중문화로서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다.

주인공 오쿠바의 일생을 다룬 이 작업은 가독성이 뛰어난 간결한 문체와 해학으로 가득 차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소설에 몰입하게 만든다. 성공한 대중문화의 기법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도 인상적이다.

일제로부터 나라가 해방된 날 오쿠바가 순우리말 소설인 <순애보>를 탐닉하는 장면이나 백범 김구의 장례식장에서 사진 찍기에 몰입하는 모습 등은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에 개개인의 소소한 일상생활을 대입시키는 방식이다. 이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현대사 박물관을 찾은 것처럼, 해방 이후 삶을 사진을 찍듯 고스란히 옮겨놓은 장면은 1990년대 유행한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을 떠올리게 되는데, 없이 살아도 정이 있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던 어린 소년의 순수함이 진한 향수를 자극한다.

주인공 오쿠바와 그가 만난 여인 영치, 은호와의 가슴 떨리는 사랑 이야기는 김유정의 <동백꽃>의 해학적인 문장이나, 황순원의 <소나기>와 같은 순정물을 보는 것 같을 정도다.

맑스주의자였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경우도 서사극에서 소격효과(거리두기)를 사용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관객이 작품과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브레이트를 언급하지 않다 하더라도, 많은 현대예술은 작품에 다가가기 위해 적지 않은 훈련을 필요로 하며, 작품에 대한 자연스러운 몰입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사실이다.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는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 장치가 적극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대중소설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 대한 이 같은 태도는 실천적 활동가이며, 소설가인 저자 '유채림'이라는 캐릭터를 떠올릴 때 다소 의외로 느껴진다.

실천적 활동가가 받아들인 대중성, 두리반의 철거 투쟁이 계기 아닐까

대중성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 계기에는 두리반의 철거 투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리반 철거 투쟁에 연대한 홍대의 인디밴드들은 특유의 대중적인 정서로 철거 투쟁장을 문화적 해방구로 만들었다.

이 결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철거 투쟁에 참여할 수 있었고, 두리반은 지켜졌다. 이 같은 경험은 유채림에게 대중성을 다시 해석하는 계기를 준 것 같다. 예술가의 사회적 참여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와 감수성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의 대중성은 작가의 사회 참여가 식자층에게 고립되지 않게 하는 실천의 도구로 봐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대중성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이 전체 구성에서 작품성과 훌륭하게 조화된다는 점에 있다. 1972년, 살인죄로 무기수 판결을 받은 정원섭 목사의 실화를 모티브로 하는 이 작업은 주제가 강렬하다.

주인공 오쿠바는 어린 소녀를 강간 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는데, 지독한 고문 속에서 거짓 자백을 했고 그로 인해 무기수 판결을 받은 후 15년 만에 모범수로 석방된다.

석방 후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법적투쟁을 하게 되었고, 노무현 정부 때 들어선 과거사위원회의 도움으로 2011년 마침내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구속된 지 40여년 만에 벗게 된 누명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이 사건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주인공 오쿠바의 억울함이 표현되는 것은 전체 분량에서도 굉장히 짧은 편이다. 결론 부분에서 표현되는 그의 억울한 감정은 굉장히 건조하게 처리된다.

이 소설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억울한 한을 풀어내는 소송의 승리 과정이 아니다. 감옥에서 처절한 삶을 살아가며 기어이 부당한 공권력에 승리하는 위대한 인간성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다. 그 과정은 대단히 담담하게, 관조적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건 나한테 <욥기>적 고백을 하라는 것과 같네요. 일곱 명의 아들이 죽고, 세 명의 딸이 죽었어요. 아내는 떠났고, 욥은 기왓장을 깨뜨려 목을 긁고 등을 긁어요. 그런 욥에게 신은 전보다 더욱 엄청난 축복으로 욥을 위로했다고 하지만, 10남매를 잃은 통한을 메워줄 축복은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오늘의 무죄 판결, 이건 신의 은총이 아니에요. 지나간 40년이 뭐가 되겠어요?"(2011년 10월, 최종 무죄 판결을 받은 후 기독교 신문기자의 질문에 대한 오쿠바의 답변)

국가와 제도가 지켜야 하는 인간의 존엄이란 바로 평범한 사람의 삶

다양한 몰입 장치로 묘사된 본론 내용 대부분은 오쿠바가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다. 특별히 잘난 것도, 특별히 모난 것도 없는 삶의 풍파 속에서 성공과 시련을 겪은 평범한 인간의 삶. 우리가 '존엄'하다고 말하는 인간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국가와 제도가 지켜야 하는 인간의 존엄이란 바로 이런 평범한 사람의 삶들이다. 하지만 공권력은 이런 인간의 삶을 짓밟고 인간 오쿠바를 진화가 덜 된 짐승으로 만들어 법정에 세운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증인으로 올림으로써, 그가 마땅히 지켜야 할 가족의 존엄마저 함께 짓이긴다.

30대 후반에 감옥에 가서 그 후 40년 동안 누명을 쓴 채 살아간 오쿠바는 결국 70대가 훌쩍 넘어 과거의 죄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 무죄 판결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후 그의 삶은 무엇을 향해야 하는 걸까? 이 같이 압도적으로 허무하고 무기력한 상황은 201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고생 많았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는 살게 해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그에겐 그랬으나 내게는 그가 최후의 절망이었다. 그의 사건은 전진 전진 뿐이던 내 인생의 최종 기착지가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희망 없음이 나를 압도했다. 나는 이 나라 법정을 완전히 믿지 않게 되었다."(1987년, 모범수로 출소한 오쿠바를 만난 이덕열 변호사의 감상)

이 소설은 결국 무기력에 대한 이야기다. 거대한 사회의 폭력에 목표를 잃은 사람들은 그럼에도 왜 싸워야 하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이 질문은 세월호 이후 멈춰버린 시간을 사는 2016년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화두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무엇이든 해야 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기력함 속에서 많은 이들은 '기억하겠다'는 말을 되뇌며 자기 위안을 삼았다. 그리고 일단 슬픔을 봉인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절망한 많은 이들은 오랜 시간 방황했다. 유채림은 보다 정면으로 이 문제를 응시하고, 기어이 성찰을 해낸다.

무기력에 대한 유채림의 성찰은 이덕열 변호사에서 보인다. 이 소설이 화자를 이덕열에게 설정한 이유다. 이덕열에게 오쿠바의 삶은 전진만 해오던 부장판사 출신의 엘리트 변호사에게 최종 기착지와 같은 것이었다. 이후 이덕열은 삶의 의미를 잃고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오쿠바와 이덕열, 무기력은 닮았지만 끝은 달랐다

오쿠바에게도 이덕열과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그가 감옥에 간 사건과 별개로, 감옥에 가기 전 그의 아들 정재만이 죽은 순간에 발생하였다. 가장으로서 나름 행복한 삶을 살아온 오쿠바는 아들이 병으로 죽은 이후 삶의 의미를 잃고 독하게 방황한다. 폐인처럼 살아가는 오쿠바에게 아내 강은호는 신뢰를 걷었다.

그래서 출소 후 오쿠바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같은 오쿠바의 노년의 삶은 노년의 이덕열의 삶과 대조된다. 이덕열은 오쿠바의 사건 이후 무기력에 빠져, 그 이후 삶이 멈춰버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무기력 속에서도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무엇보다 그는 가족과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덕열은 평생을 함께 해온 아내의 품에서 농을 던지며 숨을 거둔다. 또한 이덕열의 아내는 그의 죽음 후에 생긴 과거사위원회를 오쿠바에게 적극 추천하며 오쿠바가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덕열의 한을 그의 죽음 이후에 푼 것이다. 하지만 독한 무기력에서 자신과 주변을 포기한 오쿠바는, 쓸쓸한 노년을 피하지 못한다.

나는 이 대목이 작가가 오쿠바에게 책임을 묻는 대목으로 느껴졌다. 비록 그에게 더 해야 할 일이 있긴 했지만, 그는 결국 그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을 잃었다.

이 소설은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억압하고 유린하는 거대한 사회의 폭력에 맞서는 숭고한 인간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답이 없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의 고독한 영웅정신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며, 부조리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 소설은 언제 어디서라도 삶의 고난은 계속되는 것이며, 그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인간이게 만드는 것은 나와 가족 혹은 이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박한 삶 그 자체라는 것을 강조한다. 세월호가 지나간 이후 2년이 지난 시점에, 나를 지키는 '둘레'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는 소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작가회의의 문학계간지 '작가들' 여름호(통권 57호)에 실린 글입니다.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

유채림 지음, 새움(2016)


태그:#유채림, #두리반, #오쿠바, #넥타이를 세번 맨 오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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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문화를 통한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습니다. 글로써 많은 교류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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