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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만 해도 내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시키는 대로만 살았던 시간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회사 일이란 게 거대한 프로젝트 하나를 쪼개어 수많은 직원들에게 파트 별로 나눠 업무를 할당하는 식이다 보니 전체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건 임원급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밖에 실무진들은 눈 앞에 주어진 업무 외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시간도 없었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15년 넘게 회사원으로 살아가면서 품고 있었던,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답을 회사를 벗어나고 나서야 깨닫게 됐다는 점이다.

서울을 떠나오던 날, 많은 비가 내려 모처럼 서울하늘에 미세먼지가 사라졌다. 저 수많은 집과 사람들 틈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서울을 떠나오던 날, 많은 비가 내려 모처럼 서울하늘에 미세먼지가 사라졌다. 저 수많은 집과 사람들 틈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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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주를 실행한 후 잠시 일을 쉬는 과정에서 생활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변화가 발생했다. 일단 가장 큰 변화는 아무 일도 없는데 이유도 없이 불안하고 초조해서 휴대전화 메시지와 카카오톡, 이메일 등을 확인하는 버릇이 사라졌다는 것!

대개 그렇겠지만 내가 다니던 회사의 상사들은 부하 직원에게 연락했을 때 바로 응답이 없으면 화를 내는 타입이 많았다. 쉴 때는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바꾸고 최대한 신경을 끄고 살려고 했던 나는 '퇴근 후엔 연락이 되지 않는 이기적인 놈'으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B2B 고객 관리 업무를 맡게 된 후에는 새벽녘에도 전화를 해대는 거래처 직원들까지 추가됐다. 결국 나는 이유 모를 불안감으로 인한 '휴대전화 새로고침 증후군'에 걸리고 말았다.

제주로 온 뒤 나는 특별히 연락을 받아도 되지 않는 시간엔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바꾸고, 카카오톡은 아예 무음으로 바꿔버리는 자유를 쟁취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은 나와 내 가족의 쉬는 시간이 누군가의 예의 없는 행동으로 방해 받지 않아도 되는, 작지만 소중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시내로 나가던 길, 화장실이 급해 잠시 함덕 해변에 차를 세웠다. 화장실 앞에 생각지도 못한 옥빛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아, 내가 제주에 있구나.
 시내로 나가던 길, 화장실이 급해 잠시 함덕 해변에 차를 세웠다. 화장실 앞에 생각지도 못한 옥빛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아, 내가 제주에 있구나.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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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변화. 매일 아침, 하늘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 내게는 하늘을 살펴야 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 하늘은 중국발 미세먼지로 가득 뒤덮여 있었고, 내 출퇴근 시간의 90%는 햇빛을 볼 일이 없는 지하철에서 보냈다. 늘 메고 다니던 가방에는 비상용 우산이 들어있었기에 비가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 하늘 보기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서울의 아파트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본다. 오늘도 여지없이 뿌옇구나.
 서울의 아파트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본다. 오늘도 여지없이 뿌옇구나.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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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럴 수가 없다. 제주의 날씨라는 것이 일기예보에만 의존하기에는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같은 지역이라도 구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렇기에 하늘을 보고 그 날 할 일을 정하는 버릇이 생겼다.

가량 사흘 내내 비가 내리다가 갑자기 강렬한 햇볕이 내리 쬐는 오늘(6월 30일) 같은 날엔 밀린 이불 빨래와 집안 대청소를 실행한다든지, 해가 좀 지는 저녁에는 다 같이 해변으로 산책이라도 가야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반대로 갑자기 폭우라도 퍼붓는 경우엔 차를 운전해 나가야 하나, 버스를 타야 하나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기후가 생활에 영향을 주는 이런 현상이 누군가는 불편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자연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는 충만감을 준다. 긍정적인 영향이다.

제주의 하늘을 본다. 저 구름 위를 걷기 위해 큰 맘 먹고 한라산을 오를 것인가 고민에 빠진다
 제주의 하늘을 본다. 저 구름 위를 걷기 위해 큰 맘 먹고 한라산을 오를 것인가 고민에 빠진다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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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변화는 면도에 대한 개념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제주로 이주하기 전에는 그랬다. 귀농이나 귀촌을 한 사람들이 너도 나도 수염을 기르는 것을 보고 "귀찮아서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관록이 있어 보이려고 하는 건가" 궁금해 하곤 했다.

내가 직접 그 입장이 돼 보니 알겠다.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수염 쪽으로 시선이 가지 않는다. 수염이 자라 있는지 말았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그동안 면도를 한 이유는 내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구나!"

내가 월급을 받고 해온 일은 이런 거였어...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을 떠나온 후 나에게 생긴 변화는 역설적으로 그동안 내가 월급을 받으며 해온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줬다.

그동안 나는 월급을 받는 대가로 그들의 비위를 거슬르지 않는 외모 상태를 유지하며, 언제든 연락을 해오면 바로 바로 응답해 그들에게 행여 작은 스트레스라도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덤으로 하루의 10~20%에 가까운 시간을 나 같은 '을'들의 울분과 슬픔으로 가득 찬 지옥철이라는 곳에 갇혀 지냈다.

'지금 나는 그렇지 않은데 너무 비약이 심한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정말 축복받은 직장에 다니고 있을 법하다. 행여 다른 직장에서 더 나은 보수와 직급으로 유혹해도 절대 그 곳을 벗어나지 마시길 권한다. 세상에는 이상한 조직, 이상한 회사가 너무도 많다.

집 앞 오름을 오르다가 내 생애 가장 큰 달팽이와 마주쳤다.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지만 금세 우리 눈 앞에서 사라졌다.
 집 앞 오름을 오르다가 내 생애 가장 큰 달팽이와 마주쳤다.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지만 금세 우리 눈 앞에서 사라졌다.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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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내 갈 길은 내가 정한다

오늘 재미있는 뉴스를 접했다. 노동자의 쉬는 권리를 위해 정부와 경제 5단체가 직접 나서 '일·가정 양립 직장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4대 공동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연차 사유를 묻지 말라든지, 업무 외 시간에는 카카오톡을 보내면 안 된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시도는 가상하나, 현실성은 전혀 없는 일로 보인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무슨 일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을'을 찾아대고, 자신이 '갑'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죄 없는 '을'에게 풀어대려 하는 '꼰대'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들의 눈에는 '을'이 휴가를 낸다는 건 본분을 다하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행동으로 보이며, 퇴근했다고 연락이 되지 않는 '을'은 책임감이 없어 관리자로 승진시켜서는 안 되는 무능력자인 게다.

소위 '꼰대'라고 불리는 이 세대들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조직보다는 개인의 권리와 행복을 우선시하는 세대가 그 자리를 차지해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이뤄지기 전까지 우리는 이런 불합리함을 견디고 살아가야 한다.

열심히 노력하고 경쟁하여 남들보다 나은 경제적·사회적 성취를 얻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꼰대' 문화의 불합리함조차 성공을 위해 이겨내야 할 고난과 역경으로 받아들이는 긍정적 자세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우린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다만 굳이 남들과 경쟁하고 싶지 않은, 경제적·사회적 성취보다는 개인과 가족의 행복을 우선시 하는 우리와 동류인 분들이라든지, 심지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분들조차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책임감 없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매도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주행을 택했다.

물론 이곳에서 다시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면 또 다른 꼰대 문화의 영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직장생활 외에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서울과 비교하면, 이곳에서의 직장생활은 가장 마지막에 선택해도 되는 최후의 선택지였다. 내 선택은 이곳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와 같은 고민을 갖고 있는 분들을 많이 접한다. 반대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치열한 경쟁에서의 도피자'라고 폄하하는 분들도 그만큼 많이 만나봤다. 둘 다 자신들의 관점에서는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만 내 삶이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경쟁이든, 도피든 혹은 합리화든 뭐든 간에 말이다.

서울을 떠나 제주공항에 내리던 밤, 그 때의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서울을 떠나 제주공항에 내리던 밤, 그 때의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이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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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장맛비가 계속되던 어느날 밤, 서울에서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친한 형님이 카톡을 보내왔다(카톡을 무음으로 해놨기에 늦게 회신 드린 점 사과 드린다).

"우리 회사 상사가 퇴근하다가 저녁 같이 먹자고 해서 끌려왔다. 이 양반이 집에서 하도 자기를 꼰대라고 비아냥거려서 식구들하고는 저녁 같이 안 먹는다고, 밥 먹을 사람이 없다고 나를 끌고 다닌다. 자기는 나이 먹어서 순리대로 사는 사람인데 무슨 꼰대냐고 버럭버럭 화까지 내네…."

꼰대는 자기가 꼰대인지 몰라서 꼰대인 거다.


태그:#제주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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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 : 제주, 교통, 전기차, 복지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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