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대 국회가 갓 개원한 지난 6월 2일, 국회 의원회관은 새로 이사하고 짐을 정리하는 손길들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국회의원 김현권'이라는 명패가 붙은 1023호에 들어서자, 손목에 노란 세월호 팔찌를 찬 김 의원이 우리 일행을 맞는다. 크지 않은 목소리와 느릿느릿한 말투. 소파의 가운데 자리를 한사코 양보하려는 태도는 퍽이나 소탈해 보였다. 

25년간 현장 농업의 한길을 걸어온 경력에, 더불어민주당 중앙위원회 비례후보 투표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신화의 주인공에 대한 선입견이 너무 컸던 것일까.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본 2분 짜리 연설 영상에 등장한 열정적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TV에서 흔히 보는 꾸미거나 과장된 태도가 전혀 없어 도무지 '정치인' 같지가 않았다. 

요즘 정치 뉴스에서는 새로 당선된 20대 국회의원들 중에도 유난히 김 의원의 기사가 눈에 많이 띈다. 신문, 방송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해 의원실은 정신이 없다. 김현곤 수석보좌관은 "의원실에서 일부러 나서서 인터뷰를 유치한 적이 없다"고 귀띔했다. 어떻게든 언론의 눈에 띄려고 애를 쓰는 다른 정치인과는 달리, 가만히 있어도 기자들이 찾아오는 상황이다.  

김 의원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라 할 만하다. 지난 1년간 전국을 돌며 더민주 전국농어민위원회 조직을 만든 그는 올해 초 경선을 통해 농어민 비례대표로 선출되었으나, 당 지도부에 의해 당선권에서 밀려난 C그룹에 배치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다음 날 다시 열린 중앙위원회 순위투표에서 그는 2분의 짧은 연설을 통해 진심을 토로했고, 투표 결과 압도적인 1위라는 역전의 드라마를 이끌어냈다. 

그가 겪은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언론의 관심을 끄는 요인인 것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김 의원을 직접 만나보니, 그의 진정한 매력은 평생 한 길을 걸어온 그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는 우직함과 꾸밈이 없는 인간 됨됨이인 것 같다....<기자말>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 김형근

관련사진보기


김현권 의원은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서울대 천문학과 82학번으로 입학해 학생시절 민주화운동을 했다. 그 이야기를 물어보니 소위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날렸던 이근안을 '잡으러 다녔던' 사연을 들려준다.

"인천의 한 공장에 취업해서 일하는데 어느 날 '반제동맹당' 사건으로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어요. 인천 대공분실에서 수사를 받았죠. 이근안이 직접 고문에 참여했어요. (그는 이때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훗날 고관절이 괴사되어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 2년 6개월 실형을 받았는데 거의 다 채우고 1988년에 출소했지요."

감옥에서 많은 도움을 받은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 보답하고자 출소 후 잠시 민가협 간사를 했다. 그 무렵 같이 했던 일이 바로 이근안 '체포 활동'이었다. 1988년과 1989년 쯤 한겨레신문사에서 이근안을 추적하는 일을 했는데, 그의 얼굴을 실제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제보가 들어오면 얼굴을 아는 사람이 기자와 현지에 동행해서 확인을 했다. 그 당시에 썼던 암호는 '참새 떴다.'

"한겨레에서 '참새 떴다'는 전화가 오면 무조건 나섰어요. 한번은 진짜로 이근안을 잡는 줄 알았던 적도 있었죠. 민통선 안에서 이근안을 발견했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가보니까 외모가 진짜 닮았더라고요. 하지만 직접 대면을 해보니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 당시 이근안이 공식적으로는 수배된 상황이었지만 경찰이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어요. 이근안이 체포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였죠."

'고문기술자' 이근안 잡으려 다녔던 젊은 시절

학교를 졸업하고 1991년에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의 과수원을 물려받아 사과 농사를 지었다. 민가협에서 만난 아내와 92년에 결혼을 했다. 서울로 진학하면 농촌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감옥에서 출소한 후 한때는 다시 공장으로 갈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때 문득 '고향으로 가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당시가 한창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얘기가 나올 때였어요. 이제 농업은 사양 산업이니 어쩔 수 없이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죠. 농업을 천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화가 좀 나기도 했어요. 당장 나한테 어떤 과제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고향에서 열심히 농사를 짓다보면 언젠가는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 생각했지요."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선비'라고 말했다. 책 속에만 있는 진리가 아니라, 사람 속에도 있고 자연 속에도 있는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 사회의 식자층에 속하되,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 존경하는 인물은 퇴계 이황이다. 퇴계는 관직을 맡아 일할 때만 서울에 있었지, 평소에는 늘 고향에 내려와 살았다. 매우 검소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늘 깍듯하게 대한, 인간을 존중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아내와 함께 운영한 과수원의 규모는 처음에는 2천 평, 나중에는 3천 평까지 늘었어요. 고향에 가자마자 사과값이 폭락해서 판매가 큰 난제였죠. 어떻게든 팔아야 하니까, 소포장을 해서 전국방방곡곡 안 다닌 데가 없어요. 친구가 회사 내에서 주문을 받아주면, 1톤 트럭에 사과를 싣고 회사 주차장으로 가서 각자의 승용차에 한 상자씩 나눠 실은 적도 있죠. 아파트도 많이 갔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아파트가 제일 힘들었어요."

그렇게 전국을 다니다가 겨울에 충북 음성쯤에서 눈길에 미끄러져 차가 도랑에 처박힌 적도 있다. 한번은 주문량이 많아서 동네에서 낡은 2.5톤 트럭을 빌렸는데 거창 부근에서 차가 서버리는 바람에 큰 고생을 했다. 아직도 그 근처를 지나면 그 일이 아프게 떠오른다고 한다. 어느 날 아파트 단지에서 사과를 팔다 쉬고 있는데 '택배'라고 써 붙인 차가 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저거다.' 그는 무릎을 쳤다. 1994녀느 1995년 쯤에 우리나라에 택배가 처음 도입된 무렵이었다.

"처음 내려갔을 때는 농민회 사무국장 일도 맡아서 했어요. 그런데 농민운동이 생각보다 내 지역의 문제에 관심이 없더군요. 지역에는 굉장히 많은 현안들이 있잖아요. 쓰레기 소각장 등 동네 문제로 사람들이 계속 상담을 해오는데, 농민회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늘 대국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농민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회비는 계속 내고 있었는데, 2004년에 그가 열린우리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하자 농민회는 그를 제명했다. 당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민주노동당을 공식 지지하면서 다른 정당 참여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한때 애정을 갖고 활동하던 농민회에서 나오게 됐다. 하지만 농업 생산과 유통의 혁신을 위한 그의 도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졸업 후 농사지으러 고향으로... 그에겐 '당연한 일'

2000년에 문을 연 인터넷 쇼핑몰 '농촌과 도시'. 당시는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깔리기 시작한 아주 초기였다. 그전에도 PC통신 농민동호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그는 인터넷이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사람을 모아 준비에 들어갔다. 전국의 농민동호회 회원 100여 명이 '농촌과 도시'에 생산자로 가입했다. 소비자 회원들도 많이 들어왔다.

"나 혼자 생산할 수 있는 상품의 종류와 양은 한계가 있는데, 생산자 100명이 각각 100명의 고객만 모아 오면 1만 명의 고객을 공유하게 되니까 성공하겠다 싶었죠. 공대 출신 선배한테 부탁해서 쇼핑몰 사이트를 만들고, 노트북을 사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사람을 만났어요. 운영도 잘 됐어요. 첫해 매출이 몇 억 원씩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운영자로서 '수익'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홈페이지 개발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비용, 사이트 유지비 등 비용이 계속 발생했다. 심지어 생산자들에게 사진을 찍어서 사이트에 올리라고 디지털 카메라까지 사주었다. 판매량은 늘었지만 적자가 쌓여갔다. '온라인 쇼핑몰'이라는 새로운 시장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한 것도 한 몫 했다. 그런 방면으로는 워낙 초기에 시작한 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농촌과 도시'는 2006년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지금도 농산물 온라인 쇼핑몰 업계에서 '농촌과 도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그 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고, 지금도 전설처럼 남아있는 사례다. "그때는 우리 쇼핑몰이 지금의 네이버 쯤 되는 것이었다"며 김 의원은 웃음을 지었다. '농촌과 도시'는 경영적으로 실패했지만, 현재 온라인 쇼핑몰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다수는 '농촌과 도시'를 함께했던 이들이다.

사과 농사를 짓다가 2005년부터는 소를 키웠는데 그 사이에 특이하게도 학원을 운영한 경력이 있다. 소로 전업을 한 이유는 농약을 안 쳐도 되니까 그랬단다. 그는 농사를 지으러 고향에 간 것인데, 사람들은 자꾸만 와서 아이들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하도 반복해서 부탁하니까 외면만 할 수도 없었다.

"사실은 애들 분유값 때문에 시작한 것도 있고요. 학원은 농사와 달리 매달 바로 수입이 생기잖아요. 사과를 아무리 열심히 팔아도 빚을 안지는 정도지 그걸로 애들을 키우고 살아갈 수가 없었어요. 처음에는 지금 이 방만한 공간에서 시작했던 학원이 2년 후에는 그 건물 전체를 다 썼어요. 의성에서 제일 큰 학원이었죠. 학원은 2005년에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끝냈어요."

김 의원처럼 열심히 농사짓는 사람도 생활비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다른 농민들은 오죽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얘기를 했더니 바로 공감의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나라 농촌이 복합영농을 해요. 한 가지만 해서 먹고 살 수 없으니까 일 년 내내 여러 작물을 지으며 쉴 틈 없이 일하죠. 그래서 농촌의 모습이 아름답지가 않아요. 온갖 창고며 건조실이 들어차서 농촌 주택은 빈 공간 없이 과밀상태예요. 주택 구조가 복잡한 것은 그분들의 삶에 휴식시간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요. 저는 농촌에서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다 걷어내고 마을에 빈 공간과 휴식처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도시민들도 찾아와서 휴식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도농이 교류하고 사람이 찾아와야 결국 농촌도 살아갈 수 있어요."

농업 생산과 유통 혁신 위해 멈추지 않은 도전 

2006년에는 의성마늘 명품화사업단 단장을 맡아 일했고, 2009년부터 2015년까지는 의성군 한우협회장을 지냈다. 소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의성군 농업기술센터 예산을 받아 농가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농가 소득 향상을 고민하다 2009년부터 한우 혈통개량 사업도 추진했다. 의성군 한우 3만 2천두에 대해 혈통등록 전수 조사를 실시하고, 유전능력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그 결과 2009년에 고급육 출현율이 경북에서 중하위 수준이던 의성군이 2014년에 2위, 2015년에는 경북 내 고급육 출현율 1위로 올라섰다. 고급육 생산이 늘어나면 바로 농가소득 향상으로 연결된다. '의성 마늘소' 브랜드는 2014~15년 연속 소비자시민모임에서 전국 10대 우수브랜드로 선정되었다. 경상북도에서는 의성군의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도 사업으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지난 2일 국회의원회관 김현권 의원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 모습
 지난 2일 국회의원회관 김현권 의원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 모습
ⓒ 김형근

관련사진보기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가 당내 경선에 뛰어드는 것을 보고 의성 지역 선거운동을 자원봉사로 도왔어요. 그러다 이듬해 열린우리당 창당에도 참여하게 됐고요. 2004년에 총선을 치르는데 지역에서 정말 엉뚱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출마를 결심했지요. 언젠가 일할 기회가 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꼭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어요. 내가 정치에 너무 일찍 관여했던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 때도 있었고요."

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한번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나니까 그것이 사람들의 편견이 됐다. 그가 무엇을 해보려 해도 사람들은 그의 출마 경력을 떠올렸고, 그것이 활동을 제약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른 출마 경력이 없었다면 그 사이 좀 더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

2006년과 2010년에는 부인 임미애 씨가 지방선거에 출마해 군의원으로 활동했다. 김 의원 본인은 2012년에 다시 의성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대대로 새누리당 텃밭이라는 지역감정의 벽은 그처럼 높고도 험난했다.

그는 국회의원 당선이 확정된 지난 4월부터 2주에 한번 지역 농민들과의 간담회를 꾸준히 갖고 있다. 또 다른 2주에 한번은 농업 전문가들을 만나 의견을 듣는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처럼, 실제 현장의 목소리와 요구사항을 정책에 담아내겠다는 뜻이다.

국내 유일의 농민 정치조직, 전국농어민위원회를 키워 달라

20대 국회에서 그가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농업 예산을 직접 지불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정부는 때마다 이런 저런 농업 정책을 내놓고 막대한 예산을 쓰지만, 실제로 그것이 농민에게 돌아온 적은 별로 없다. 그는 자신의 임기 안에 국가 농업 예산의 50%를 직접 지불로 전환해, 농민 1인당 연간 300만 원 정도의 혜택을 받도록 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농업 예산 직접 지급은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1호 법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GMO 문제입니다. 이건 사실 좀 정치적인 계산도 포함된 것인데요. 농업문제를 풀어나가는 힘은 이미 농업 내에 있지 않습니다. 농민 얘기만 아무리 해봐야 소수의견으로 치부하는 것이 사회 분위기죠. 농업 문제는 도시 소비자와의 소통을 통해서 풀어야 해요."

맞는 얘기다. 도시 소비자가 가장 많이 움직였던 것이 바로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 문제 아니었던가. 먹을거리의 안전성 문제야말로 농민과 도시 소비자가 만나고 협력할 수 있는 이슈다.

"농업 이야기를 하되 농업의 이해만을 내세우지 않고, 도시 소비자와 잘 소통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도시 소비자들에게는 단지 음식이지만, 사실 농업의 가치는 그 이상으로 훨씬 커요. 돈은 농촌이 덜 벌지 몰라도, 지금은 도시 사람들이 훨씬 각박하고 불행하죠. 

농업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도시민들의 삶이 질적으로 지금보다 더 향상되고, 우리 국민 전체가 행복하게 사는데 농업·농촌이 어떻게 더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도시인들에게 아주 설득력 있게 공감이 되어야 농업이 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농업계가 목소리를 내려면 조직의 힘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김 의원은 국내 유일의 농민 정치 조직인 더불어민주당 농어민위원회를 전국위원회로 키워나갈 생각이다.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졌지만, 일시적인 조직이 아니라 앞으로 농업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정책에 반영하는 상시 조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말이다.

농어민위원회를 전국위원회로 키우는 것은 김현권 의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 농업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농어민위원회에 모인 농민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지면 다음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내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국가의 농업 정책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농민 세력의 조직화를 통해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있도록, 농어민위원회에 많은 분들이 힘을 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당부했다.

"제2의 강기갑", "농민운동가 출신 국회의원", 세상은 벌써부터 이런저런 편견어린 수식어를 달아가며 그의 이미지를 정형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말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는 농민운동가가 아니라, 내 농사 잘 짓고 주변 이웃의 삶이 나아지길 바란 평범한 농민이었을 뿐이다. 세상의 편견에 휘둘리지 않고 국회에서 뜻한 바를 의연하게 펼쳐나가는 것은 이제부터 그의 몫일 것이다.

* 전국농어민위원회 정책회원 가입 방법

인터넷 주소창에 다음의 주소를 치고 들어가, 서면 가입서를 제출한 뒤 연회비 2만원을 입금하면 가입이 완료된다. (※반드시 본인 명의로 입금)

http://goo.gl/forms/Uvx3ZjWOnY5dXtk03


태그:#김현권, #전국농어민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다수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노예로 만드는 산업화된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꿈꿉니다. 민중의소리, 월간 말 기자, 농정신문 객원기자, 국제슬로푸드한국위원회 국제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계간지 선구자(김상진기념사업회 발행) 편집장, 식량닷컴 객원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