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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반, 계절이 반으로 접히는 유월입니다. 세월은 무척 빠르게 지나갑니다. 유월의 햇살이 따갑습니다.

여름이 벌써 시작되었나?

따가운 햇볕에 작물이 무럭무럭 자랍니다. 새싹이건, 옮겨 심은 것이건 처음 자랄 땐 더딥니다. 떡잎에서 본잎이 나오고, 이파리가 커지면 작물을 하루가 다르게 자랍니다. 옮겨 심은 모는 한 보름 지나면 땅맛을 보고 키를 끼웁니다.

우리 고추밭 고추도 제법 실해졌습니다. 모를 옮겨 심은 지 근 한 달이 다 되어갑니다. 곁순이 자라 꽃도 피고, 작은 열매도 달리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고추밭에서 고추곁순을 따줍니다. 대개 작물은 곁순을 따줘야 대가 실해지고, 열매도 굵어집니다.

곁순 따주는 일도 만만찮습니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수도 없이 반복합니다. 풀도 잡아 뽑습니다.

거의 일이 끝나 가는데, 길 건너 앞밭에서 어떤 할머니가 나를 부릅니다.

"아저씨, 시원한 냉수 좀 먹을 수 있을까요?"
"네에?"
"목이 타서 그래요. 우리 주인이 새참을 가져온 댔는데 함흥차사네요!"
"......"

할머니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며 고구마 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할머니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며 고구마 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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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판 모르는 할머니들입니다. 세 할머니들께서는 뙤약볕에서 고구마순을 꽂고 계십니다. 내 대꾸가 없자 다시 말을 걸어옵니다.

"아니에요. 관두세요. 그 쪽도 일하신데…."

나는 허리를 펴고 대답했습니다.

"쉬실 때 오세요. 물 드릴게요."
"......"

이번엔 할머니들 쪽에서 대꾸가 없으십니다.

고추곁순을 다 땄습니다. 여린 고추순이 두 광주리나 됩니다. 데쳐서 나물로 무쳐먹으면 밑반찬으로 그만일 것 같습니다. 고춧잎나물은 씹히는 맛도 부드럽고, 고춧잎은 비타민이 많아 몸에도 좋습니다. 

밭에 나와 손을 씻는데, 물 달라는 할머니들께서는 하던 일만 계속하십니다. 내게 한 말은 까마득히 잊어버리신 듯이….

말 꺼내고선 미안해서들 그러시나?

'얼마나 목이 타면 낯선 사람한테 물을 달라하실까?'

난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오늘따라 냉장고에 생수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를 어쩐 담, 미적지근한 물을 드릴 수는 없고….'

냉장고에 호박즙이 눈에 보입니다. 우리가 작년 농사지은 호박과 도라지, 생강을 넣어 건강원에서 달인 것입니다. 나는 한 봉지를 뜯어 마십니다. 일하고 먹는 것이라 정말 시원하고 맛이 좋습니다.

할머니들께서 마시면 갈증이 해소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맛도 달달해서 할머니들 입맛에도 맞을 것 같구요.

'세 사람이니까 여섯 봉지면 되겠지.'

할머니들께서 내가 드린 음료를 잡수셨다.
 할머니들께서 내가 드린 음료를 잡수셨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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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박즙을 들고 할머니들께 갔습니다. 품을 산 분들 같습니다. 처음 내게 말을 건 할머니가 제일 젊고, 두 분은 나이가 더 들어 보입니다. 그 중 한 분은 허리가 꾸부정하십니다.

"차가운 물이 없어 이걸 가져왔어요."
"아니! 뭔 약봉지라다냐!"
"약이 아니고요, 호박즙이에요."

"우린 물이면 되는데, 이런 귀한 것까지! 고마워요!"
"얼마나 목이 타실까 해서 이거라도 가져왔어요."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수가!"

할머니들께서 호박즙을 단숨에 들이키십니다. 달개 잡수십니다.

"이거 마시니까 뱃속까지 시원하네!"
"야, 이제 살 것 같어!"
"여기 주인은 언제나 오려나?"

이마에 땀을 훔치시며 생판 모른 사람한테 신세를 지게 되었다며, 되게 미안해들 하십니다. 별거 아니지만, 나는 잘 대접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많은 땅에 오늘 다 꽂을 거예요?"
"하는 데까지 해봐야죠!"

정성들여 심은 고구마밭입니다.
 정성들여 심은 고구마밭입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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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할머니들께선 다시 손을 움직이십니다. 어찌나 손놀림이 빠른지요. 세 분께서 엉덩이를 나란하며 부지런히 일을 하십니다. 적지 않은 땅에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고구마순을 꽂으십니다.

유월의 햇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시는 할머니들.
 유월의 햇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시는 할머니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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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런히 일을 하시는 할머니들의 모습.
 부진런히 일을 하시는 할머니들의 모습.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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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추곁순을 한 시간 남짓 따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 드신 할머니들의 흘린 땀을 보며 배부른 내 생각이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쉬엄쉬엄 하시라는 내 말에, 할머니들께서는 답하십니다.

"잘 마셨어요!"


태그:#고구마심기, #유월의 햇볕, #작은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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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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