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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야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으로 향했다. 마을버스는 강북 주택가를 샅샅이 훑으며 구불구불 돌아 한참 만에 구의역에 닿았다. 덕분에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하철을 타고 싶지는 않았다. 구의역까지는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그 사이에 놓인 수백 개의 스크린도어를 액자 삼아 찍히는 풍경들을 보고나면, 영정 사진처럼 자리 잡은 9-4번 승강장 앞에 섰을 때 말문이 막힐 것만 같았다.

1번 출구와 4번 출구 사이에 있다는 추모 장소는 펼침막을 들고 모여선 사람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위해 모여 있었고 기자들은 노트북이나 카메라를 들고 자리에 앉아 시민단체 회원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결국 추모 장소는 완전히 가려져 있어서 기자회견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피해자가 소속되어 있었다는 민주노총 여성연맹 소속 사회자의 진행으로 4.16연대 안전사회위원회 산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연대' 등을 비롯한 시민 단체 소속 인사들이 발언을 이어갔다. 그들이 할 말은 대체로 그들의 단체 이름에 다 담겨 있었다. 특히 이들 주장의 핵심적 방법론은 '연대'인 것 같아 보였는데, 그래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모였고 모일 때마다 함께 우는 것 같았다.

김 군에게 보내는 포스트잇 문구 사이로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이 보인다
 김 군에게 보내는 포스트잇 문구 사이로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이 보인다
ⓒ 이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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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발언을 마치고 피해자 김군의 어머니가 나올 차례였다. 사회자는 김군 어머니의 얼굴을 모자이크하고 목소리도 음성 변조해줄 것을 기자들에게 두 번 세 번 강조해서 부탁했다. 또 스마트폰으로 개인 촬영하는 일도 없게 해달라고 말했다. 기사로 어머니의 사진을 볼 둘째 아들 때문이라고 했다. 집에서 보는 어머니의 얼굴과 형이 고통스럽게 죽어간 플랫폼 아래 선 어머니의 얼굴은 다를 것이다.

시회자의 간곡한 부탁을 듣고 있는데 카메라를 든 채 다른 기자들 사이를 헤집던 기자가 피식 웃었다. 나는 웃음의 의미도 모르면서 이유 없이 불안해졌다. 이어 한 기자가 김군의 어머니를 휴대전화로 촬영하다가 기자회견 주최 측의 제지를 받았다. 아무 저항도 없이 지우는 것을 보면 그저 버릇처럼 휴대전화를 들었던 것이겠지만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은 그 진의를 알 리가 없으니 불안한 법이다. 김군의 어머니는 기자들 앞으로 주춤주춤 등장했다.

그녀는 A4용지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읽었다. 말을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목소리가 작아서 사회자가 다가와 마이크를 만졌지만 마이크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고작 며칠 전 아들이 끔찍한 사고를 당한 구의역 승강장 바로 아래에 서 있었다. 그녀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아직도 아이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중에도 지하철이 덜컹거리며 들어와 목소리를 밟고 지나갔다. 지하철 굉음에 밟히는 소리는 더 있었다.

짐을 실은 핸드카가 시각장애인 점자 블록 위를 지나며 덜컹거리는 소리, 기자들이 녹음 상태를 확인하느라 녹음기에서 풀어낸 잡음, 역무원들이 프레스 라인 설치를 위해 내려놓은 기둥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쇳소리 따위가 각자의 자리에서 울려 퍼졌지만 지하철이 한 번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흔적도 없이 짓밟혔다. 지하철은 수많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일하며 오가는 공간이지만 지하철의 굉음에 짓밟혀, 각자 내는 소음에 부대껴 오히려 '일하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김군이 근무한 곳은 이런 곳이다. 월 150만원 안팎을 받는 하청 노동자들이 쉴 새 없이 일을 해야 비로소 제대로 굴러갈 수 있지만 고통에 찬 신음 소리는 지하철의 굉음에 밟혀 들리지 않았다. '서울메트로' 직원들이 낙하산으로 입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스크린도어 수리업체는 인력 보충이나 임금 현실화 같은 문제에 신경 쓰는 대신 어린 계약직 직원들을 소모품처럼 썼다.

그리고 버렸다. 김군의 어머니는 기가 막힌 듯 A4 용지에 적혀있지 않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뭘 하는 것인지..." 아들을 차가운 안치실에서 꺼내 편하게 보내야 하는데 '규정 위반이 자초한 죽음'이라는 꼬리표가 아들을 꽉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꼬리표를 붙인 채 아들을 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아들의 최후를 묘사하며 격앙되기 시작했고 기어코 울었다. '뒤통수'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피범벅이 된 아들의 모습을 본 충격을 가감 없이 전했다.

어느덧 지하철 덜컹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죽는 한이 있어도 쉴 새 없이 돌아야 하는 지하철이 운행을 멈췄을 리는 없었다. 김군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역사에 울렸고 다른 소리들을 모두 잡아먹었다. 숫제 울음뿐일 때도 많았지만 뭘 말하고자 하는지 똑똑히 들렸다. 울어야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네 번째 피해자'는 어디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울음소리가 커지면서 무심히 역사를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일행인 듯 남인 듯 애매한 간격을 두고 그 앞을 함께 지나던 두 노인도 기자회견장을 바라봤다. 앞장 선 노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왜 죽었대?" 물었다. 뒤에 선 노인도 사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그거 뭐 여기서 좀 해주겠지"라고 말하며 빠르게 지나갔다. 김군의 어머니는 이 사회가 '뭘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까. 

김군의 어머니는 사건 이후 안부 전화를 걸어온 아들의 동료에게 "아줌마는 너 그만두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들이 세 번째 피해자라는 사실을 안다. 앞서 지난 2013년 성수역에서 노동자 심아무개씨가, 2015년 강남역에서 노동자 조아무개씨가 사고를 당했다. 야간 시간대에 2인 1조로 작업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안전 규칙이 지켜지지 않은 탓이었다. 아니 지킬 수 없게 만든 탓이었다. 1인당 작업량은 턱없이 많은데 회사에서는 인력 충원은 하지 않으면서 비숙련 계약직 노동자들을 쉴 틈 없이 현장에 투입했다.

결국 종잇조각에 불과한 '안전 규칙'은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강제하는 노예 문서에 지나지 않았다. 성수역 10-4번 승강장에서 사망한 심아무개씨는 책임을 모두 뒤집어썼고, 강남역 10-2번 승강장에서 사망한 노동자 조씨는 법정공방 중이다. 김군의 어머니에게 서울메트로 설비 차장이 찾아와 "아드님에게 과실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순간 그녀는 네 번째 피해자가 발생할 거라는 사실을 싫어도 알게 됐을 것이다. 아들의 동료가 '네 번째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군이 끝내 일을 그만두지 못했듯 김군의 동료들도 쉽게 일을 그만두지는 못할 것이다. 그건 그들의 부모가 그들에게 '책임감 있게 일하라', '꾹 참아라.'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다. 하청 직원들에게 위험한 일을 떠맡기거나 최저가입찰제를 통해 위험 상황을 강제하는 것이 비단 스크린도어업체만의 일이 아닌 탓에, 이 일을 그만둬도 더 위험하고 보수가 적은 일에 내몰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네 번째 피해자'는 어디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김군 동료들이 안전하려면 은성 PSD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노동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

결국 김군과 그 동료들에게 한국 사회는 스크린도어 바깥쪽에서 바라본 플랫폼과 같다. 플랫폼 위의 승객들이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김군을 비롯한 젊은 '부품'들 덕택이지만 정작 그들은 결코 스크린도어 너머에서 나올 수가 없다. 그들은 승강장 사이를 누비며 플랫폼을 향해 열린 문을 찾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는 그런 의미이고, 이 사회가 김군 어머니에게 해주어야 할 것은 김군의 동료들을 노동조건 개선이라는 스크린도어의 보호 아래 넣는 것이다. 그 긴 말을 오열로 대신하고 기자회견을 끝낸 김 군의 어머니는 4번 출구로 업혀 나갔다.

머무르면 죽어갈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구의역 1번 출구와 4번 출구 사이에 마련된 추모 공간. 생일 전 날 사고를 당한 김 군에게 건네는 케이크가 놓여있다.
 구의역 1번 출구와 4번 출구 사이에 마련된 추모 공간. 생일 전 날 사고를 당한 김 군에게 건네는 케이크가 놓여있다.
ⓒ 이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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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회견이 끝나자 펼침막 뒤에 있던 추모 장소가 드러났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헌화하거나 시민들이 포스트잇을 붙이는 장면을 기자들이 찍었다. 거기에는 서울 메트로가 추모 장소를 변경했다며 비난하는 글도 적혀 있었다. 포스트잇에 짧은 글을 적고 망설이다가 9-4번 승강장으로 향했다.

승강장은 한산했다. 구의역이 오전에 특별히 더 한산한 것 같기도 했지만 9-4번 승강장은 더 했다. 기자 몇몇이 9-4번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붙은 포스트잇과 그 앞에 놓인 국화를 촬영 중이었다. 그보다 앞에는 지하철 보안관 서너 명이 서 있었는데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들은 그 선을 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9-4번 승강장을 지켜봤다.

9-4번 승강장 스크린도어를 찾은 시민들의 흔적
 9-4번 승강장 스크린도어를 찾은 시민들의 흔적
ⓒ 이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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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를 위해 일부러 찾은 시민 몇몇만 9-4번 승강장 앞에 섰다. 그 문으로 내리는 사람도 몇 없어서 스크린도어만 멀뚱히 서서 지하철이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상주처럼 가슴을 접었다 펴고 있었다. 소설가 서해성이 쓴 추모시가 곡소리처럼 적혀 있었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사망한 노동자들의 이름이 위패처럼 붙어 있었다.

스크린도어 밖에서 서성이는 동안 지하철 '행선 안내 게시기'에서 점멸하는 열차 표시를 수없이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열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한 한 청년과, 지금의 질 나쁜 일자리에 머무르면 죽어갈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 땅의 모든 노동자를 생각했다.

소설가 서해성의 추모시가 적힌 포스트잇
 소설가 서해성의 추모시가 적힌 포스트잇
ⓒ 이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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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구의역, #스크린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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