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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0km. 책 제목이 매우 단도직입적이다. 지은이가 걸었던 PCT(Pacific Crest Trail)의 총거리를 의미한다. 4,300km라... 한반도의 가장 긴 거리가 1100km 정도라고 하니 한반도의 끝에서 끝까지 네 번을 왔다간 거리다.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좀 더 현실감있는 계산법으로는 서울, 부산간 거리가 400km가 채 되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리면 되겠다. 서울, 부산간을 11번 걸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야생의 산길, 들길을 말이다.

175일간의 PCT 종주기록이 담긴 <4,300km>
 175일간의 PCT 종주기록이 담긴 <4,300km>
ⓒ 푸른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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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T는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미대륙 서부지역을 종단하는 대표적인 장거리 트레일의 하나이다. 전세계 하이커들에게는 평생의 버킷 리스트이며, 2016년에도 수백명의 하이커들이 PCT 종주를 목표로 길 위에서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 중 한국인 하이커는 약 1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PCT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와일드> 덕분이다. 영화와 소설 <와일드>의 배경이었던 PCT는 모험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였고, 같은 해 무려 4명의 한국인이 한꺼번에 PCT를 종주하기에 이른다.

이 대목에서 '무려'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미 연방정부와 자원봉사자들이 합심하여 PCTA(Pacific Crest Trail Association)를 조직한 것이 1993년이었고, 그후 2015년까지 23년 동안 적어도 국내에 거주하는 한국인 PCT 종주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구 끝까지 걷는 자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 이래 완전한 직립원인으로 진화한 이후 두발로 걷기가 생존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동작이었을 것이다. 먹이를 찾거나 무리를 지키고 영역을 정찰하기 위해 '걷기'를 했을 것이며, 사냥감을 만나거나 천적을 만났을 때는 보다 빨리 걷기, 즉 '뛰기'를 했을 것이다.

동아프리카 사바나 지대를 벗어난 인류의 조상이 지구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갔을 때 그들은 오로지 걷기만으로 혹독한 추위를 뚫고 북유럽 대륙 끝으로, 보다 풍요로운 열대 과일이 있었을 동남아시아 남단까지 닿았다.

마침내 용맹스러운 일부 무리는 빙하기 말 얼어붙은 베링해협의 '육교'를 걸어서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였고, 마침내 인류는 전 지구를 장악하게 된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1만2000년 전의 일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겠다.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한양에 닿기 위해 짚신 여러 켤레를 장만하여 봇짐을 메고 걷기에 나섰을 테니까.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고 생산성이 극도로 향상된 오늘날에는 걷지 않아도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으며, 걸어서 영역을 정찰하거나 확장할 일도 없어졌다. 스스로를 거리낌없이 하이커 트래시(Hiker Trash)라고 부르며 함부로 자란 수염과 때에 찌든 복장으로 야생의 들길을 걷는 자들. 이들은 먹이감을 찾거나 한양에 일이 있어 걷는 것이 아니다. 그저 '걷기' 행위 자체가 동기이자 결과이다. 전혀 다른 신인류, 걷는 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175일간의 기록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4300km로 이어진 PCT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4300km로 이어진 PCT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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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국인 PCT 하이커 세명이 자리를 함께하였다. 사진 속 텐트에는 지은이가 175일 동안 야영했던 곳을 모두 적어두었다.
 2015년 한국인 PCT 하이커 세명이 자리를 함께하였다. 사진 속 텐트에는 지은이가 175일 동안 야영했던 곳을 모두 적어두었다.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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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멕시코 국경의 캄포(Campo)를 출발하여 캘리포니아 남부와 북부, 오레곤, 마지막으로 워싱턴주를 거쳐 마침내 캐나다 국경에 이르기까지 175일간의 기록이다. PCT 종주는 계절적인 요인으로 대부분 4월에 출발하여 10월에 끝마친다. 그 이전과 그 이후는 겨울철이라 많은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지은이 역시 4월 16일 출발하여 175일만인 10월 7일 캐나다 국경 모뉴먼트 78(Monument 78)에 닿는다. 6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쓰듯이 일정을 기록하였다. 기억은 왜곡되고 본인마저도 기망할 수 있으나 기록은 속이지 않는다. 그런 기록들을 오롯이 모아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첫날의 두려움과 설렘이 175일째가 되는 마지막 날에는 다소 덤덤한 소회로 끝맺는다.

"이 지점을 지났다고 해서 무엇인가 엄청난 것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서히 조금씩 변화될 것을 안다. 여행은 그런 거다. 끝나는 순간부터 진짜 시작되는 것이 여행이다." (380쪽)

이 책을 본격적인 PCT 가이드북으로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오히려 에세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날짜별로 이동 구간 지역정보와 거리를 표기하고 있어서 도표화된 가이드북 못지 않게 PCT 종주에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아마도 다 읽어내려갈 즈음 독자들은 PCT에 훨씬 가깝게 다가가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간략하지만 책 끝에는 PCT 관련 팁과 용어들도 정리해 두었다. 책의 앞부분에는 PCT 종주 중에 찍은 생동감 넘치는 수십 장의 화보집이 있으며, 책 중간중간에는 지은이가 직접 그려 넣은 삽화들을 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지은이가 직접 그려 책에 넣은 삽화
 지은이가 직접 그려 책에 넣은 삽화
ⓒ 양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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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가 걷는 길에 대한 완결판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인생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은이에게 왜 걷느냐고 묻는 것은 부질없다. 그 역시도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금도 걷고 있는 중일테니까. 책의 첫장을 지은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경험들은 특별하다. 나는 이 길에서 스스로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나의 모든 경험들은 내 미래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될 거라고 믿는다." (33쪽)

여전히 길 위에서 답을 찾고 있는 그는 지금 다시 미국 대륙분수령을 따라 5000km를 걷는 CDT(Continental Divide Trail)의 어느 길 위에서 서 있다.

지은이 양희종
 지은이 양희종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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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양희종씀 | 푸른향기 | 2016.04 | 16,500원)



태그:#4300KM, #PCT, #양희종, #ZEROGRAM, #푸른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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