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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해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순회강연을 마치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북녘의 수양딸을 찾아 북한을 여행했습니다. 또 2015년 10월 초에도 북한을 한 번 더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통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하려 합니다. - 기자 말

파란 병의 강서약수.
 파란 병의 강서약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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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천연기념물 '강서약수'

어젯밤(2015년 6월 30일) '경흥관 대동강맥주집'에서 과음한 것 같다. '경흥관'은 안주도 거의 없이 서서 맥주만 마시는, 그야말로 맥주 시음장 같은 곳이다. 대동강맥주 공장에서 매일 신선한 맥주를 공급한단다. 그래서인지 호텔에서 마시는 대동강 병맥주보다 훨씬 맛있는 느낌이다. 내 주량은 500cc 정도인데 북녘 동포들이 흑맥주를 포함해 종류별로 권하는 바람에 한 잔씩은 다 마신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리도 좀 뻐근하고 속도 시리다. 냉장고를 열고 '강서약수'를 들이켰다. 트림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욕이 돈다.

'강서약수'는 천연탄산수인데, 북한의 천연기념물이기도 하다. <사신도> 벽화로 유명한 고구려시대 고분인 강서대묘가 있는 평안남도 강서군 약수리에서 나오는 약수를 병에 담아 상품화한 것이다. 병에 붙어있는 설명서를 보면 '강서약수'는 거의 만병통치약 수준이다. 위장병, 간기능 강화 등등. 그래서인지 강서약수터에는 요양소가 있다. '강서약수'를 기본치료제로 소화기계통의 질병을 앓는 환자들을 치료한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지진의 영향으로 지각에 변동이 생겨 샘터가 막혔으나 그 이후 더 큰 수원을 찾아 생산량이 몇 배 더 늘어났다고 한다.

나는 북한을 여행할 때마다 '강서약수'를 하루에 적어도 두세 병은 마신다. 북한에서 잠자리에 들 때도 머리맡에 강서약수를 놓아둔다(남편은 대동강맥주를 꼭 챙겨놓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북한을 여행하면서 소화불량으로 고생한 적이 거의 없다. 2013년 9월 북한 여행 때, 사슴고기인 줄 알고 속아서 단고기(개고기)를 먹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북한 속을 달래보려고 대동강맥주를 연거푸 마셨다. 하지만, 정작 상한 비위를 달래준 건 '강서약수'였다. '강서약수'에 대한 나의 예찬은 끝이 없을 듯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됨에 손색이 없다.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는 장애인학교 방문을 위해 호텔을 나섰다.

평양에도 장애인학교가 있다

장애인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장애인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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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대구에 있는 장애인예술단 '범하애광소리예술단'의 이사다. '범하'는 돌아가신 내 외할아버지의 호다. 청각장애인으로 이뤄진 예술단인데, 단원들이 음악에 맞춰 무용을 한다. 나는 이 예술단을 이끌고 일본·미국 등지로 해외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입국금지가 된 현재로써는 이 예술단을 위해 아무런 봉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나는 북한의 장애인학교 방문을 요청했다. 훗날 '범하애광소리예술단'과 이 학교 학생들의 교류를 염두에 두고서.

내가 장애인학교를 방문하고 싶어 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남한 언론을 통해 '장애인들은 평양에서 살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북한의 야만적인 처사에 분노한 적이 있다. 그러나 평양의 거리를 다니면서 휠체어를 탄 사람이나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을 목격하면서 남한 언론의 보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평양에도 장애인들이 살고 있다면 필히 장애인학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해보고 싶었다.

장애 어린이 학교의 하루 일과표.
 장애 어린이 학교의 하루 일과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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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평양동문2탁아소'. 신체장애는 물론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특수교육을 제공하는, 유치원과 같은 단계의 교육기관이다. 건물이 오래돼 새 건물을 짓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교재와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다. 벽에 붙어있는 일과표를 보니 아이들은 기숙을 하는 모양이다. 선생님께 물으니 아이들이 주중에는 학교에서 보내고, 주말엔 집에 가 부모들과 함께 지낸다고 한다.

장애인 어린이 학교 음악 수업 풍경.
 장애인 어린이 학교 음악 수업 풍경.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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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어린이 학교 수업 모습.
 장애 어린이 학교 수업 모습.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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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이 학교는 조기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모들은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무시하거나 숨기고 일반학교에 진학시켰다가 결국엔 뒤늦게 특수학교로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단다. 이런 상황에서는 치료가 더 어려워진다고. 그러나 일찍이 유아 때부터 특수교육을 받으면 정상학교로 진학하게 될 확률이 제법 높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아이는 속히 특수학교로 보낼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권한다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운동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운동을 하면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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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옷을 만지는 장애 어린이.
 내 옷을 만지는 장애 어린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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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가 있는 학생들이 내 옷을 부여잡고서 함께 놀자고 한다. 나는 그 아이들과 춤도 추고 대화도 나누며 듬뿍 사랑을 나눴다. 그중 한 남자 어린이가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려니 멋진 포즈도 잡아준다. 나는 이 아이에게 내년에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귓속말을 해주곤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언젠가 남과 북의 문화교류가 있길 바라며

장애인 예술단과 함께.
 장애인 예술단과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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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남편과 나는 이 학교 근처에 있는 장애인 예술단을 방문했다. 장애인 예술단은 청각장애인들과 시각장애인들로 구성돼 있다. 얼마 전 유럽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단원들은 다가오는 캐나다 초청 공연을 앞두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온 동포라고 소개하니 환영하는 마음을 공연으로 전하겠다고 한다.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눈빛으로, 손끝으로, 온몸과 마음을 합해 춤을 춘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은 영혼의 울림에 장단을 맞춰 몸을 움직인다. 이뿐인가. 영혼의 눈으로 삼라만상을 마음에 품어 안은 시각장애학생들은 목소리로, 손가락으로 세상을 하모니에 담는다. 아! 이미 신의 경지에 다다른 단원들은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만드는 감동을 선사한다. 하찮은 방문객에게 공연을 베풀어준 단원들에게 깊숙이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언젠가 좋은 시절이 오면 장애 어린이들과 함께 이 예술단을 남한에 초청해 남한의 동포들에게도 내가 느낀, 설명하기 힘든 감격의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 뿐만 아니라 남편과 내가 이사로 있는 대구의 '범하애광소리예술단'도 북한 공연을 열어 서로의 사랑을 온몸으로 교감할 수 있게 되길 소망한다.

전쟁포로인 줄 알았는데... '남파간첩'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오후엔 특별한 일정이 잡혀있다. 소위 '북송 장기수'라 불리는 분의 집을 방문하는 일정. 원래 이 일정은 계획에 없었다. 이틀 전 안내원 김혜영 선생과 커피숍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 북송 장기수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종군 기자로 전선을 취재하다 체포됐다는 북송 장기수 이인모 선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당시 남편이 김혜영 선생에게 물었다.

"그분들께서는 모두 잘 계시나요? 연세가 이제는 꽤 되셨을 텐데…."
"네, 모두들 잘 계십니다.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고…. 이 호텔 바로 옆에들 사십니다. 일부는 새로 세운 아파트로 가신 분들도 계시구요."
"호텔 옆이라니요?"
"바로 호텔 뒤입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원하시면 일정을 잡아 보겠습니다."

김혜영 선생에 따르면 북송 장기수는 모두 예순여섯 사람인데 현재 스물다섯 분이 생존해있다고 한다. 90대가 일곱 분, 80대가 열일곱 분, 그리고 70대가 한 분이다. 우리가 지금 가려는 아파트에 열세 분이 살고 있으며 열두 분은 평천구역 안산이라는 동네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분들의 전쟁 경험담이 궁금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포로가 됐으며 제네바 협약에 의해 자국으로 돌아가야 할 분들이 왜 정전 후 북으로 돌아갈 수 없었는지, 왜 전쟁포로가 징역을 살아야 했는지 등등. 아파트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우리가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북송 장기수 한 분이 우리를 반겨주신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해 또 다른 북송 장기수분이 사는 집에 들어갔다.

북송 장기수 최선복 선생님댁에서 대접해 준 찹쌀떡.
 북송 장기수 최선복 선생님댁에서 대접해 준 찹쌀떡.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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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인도한 분의 성함은 김동기, 1932년생. 무척 활달하고 말씀이 시원시원하다. 그리고 우리가 방문한 가정의 주인 성함은 최선복, 1928년생. 성정이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며 전형적인 학자 스타일이다. 옆에 부인이 함께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를 마치 오랜 세월 떨어져 지냈던 자식들인 양 감격스럽게 맞아주신다.

테이블 위에는 맥주를 비롯한 다과가 차려져 있다. 한가운데 놓여있는 찹쌀떡 빛깔이 무척 고와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사진부터 찍었다. 나는 최선복 선생님께 먼저 물었다.

"언제, 어디서 포로가 되셨어요?"
"아~, 나는 전쟁포로가 아녜요. 1960년대 초 임무로 왔다가 그만…."

옆에 계시던 김동기 선생님도 자신은 전쟁포로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분들은 한국전쟁 때 포로가 된 분들이 아닌, 소위 '남파간첩'들이었다. 이분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얼마나 당황했는지 한동안 말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내가 놀란 또 다른 이유는 이분들의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어려서 내 머릿속에 각인된 '남파간첩'이란 얼굴에는 털이 나고, 어둠이 깔리면 중절모를 푹 눌러쓰고 외투의 깃을 올려 얼굴을 절반쯤 가린 채 산에서 내려오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형을 연장한다고?

사진 오른쪽부터 북송 장기수 최선복 선생님, 김동기 선생님, 그리고 최선복 선생님의 부인.
 사진 오른쪽부터 북송 장기수 최선복 선생님, 김동기 선생님, 그리고 최선복 선생님의 부인.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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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전쟁포로가 아닌, 간첩죄를 지은 이분들이 징역을 산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응분의 형기를 마치고도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다시 수감됐다는 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인간이 가진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폭력을 가하고 형기를 연장하는 건 엄청난 인권유린이며 야만이기 때문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북송 장기수 최선복 선생님.
 악기를 연주하는 북송 장기수 최선복 선생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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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를 불러주는 북송장기수 최선복 선생님 부부 .
 민요를 불러주는 북송장기수 최선복 선생님 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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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폭파범 김현희씨가 떠올랐다. 비행기를 폭파해 100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테러리스트는 사면해주고, 죄의 대가를 다 치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는 이유로 형기를 연장하는 등 온갖 박해를 가하다니.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어찌 인간의 생각과 믿음을 죄로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한국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동강맥주가 맛있다" "북녘에 흐르는 강물이 깨끗했다" 등의 사실을 말했다가 무려 두 달 동안이나 '종북몰이'를 당하고도 모자라 출국정지, 그리고 검찰·경찰의 수사를 받고 입국금지와 함께 강제출국을 당한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최선복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손수 제작했다는 악기를 연주해주셨다. 구슬픈 피리 소리에 그 분의 인생 여정이 담겨있다.

북송 장기수 최선복 선생님의 부인과 함께.
 북송 장기수 최선복 선생님의 부인과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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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후 결혼한 최선복 선생님의 부인은 '만수대 예술단'의 배우였단다. 북한 가수들의 독특한 창법으로 최선복 선생님과 함께 우리 민요들을 불러주셨다. 두 분의 방 벽에는 이분들이 걸어온 삶의 자취를 뒤돌아볼 수 있는 온갖 상장들과 훈장 증서들이 걸려있다.

우리를 안내한 김동기 선생님의 고향은 마그네사이트로 유명한 함경남도 단천. 이 분은 남한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폴 사뮤엘슨 등 미국 경제학자들의 저서를 원서로 읽었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경제학에 관한 수 많은 책들을 섭렵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동기 선생님은 자본주의 경제를 훤히 꿰뚫고 있다. recession(불경기), aggregate demand(총 수요), output(생산량) 등의 경제학 용어들을 영어로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 북한의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기도 했다.

김동기 선생님은 새누리당의 한 중진의원(전직)과 함께 수감생활을 해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지만. 출소 후 북송되기 전 남한의 텔레비전에 패널로 출연한 적도 있다고 한다. 나보다도 남한 사회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가슴 딛고 다시 만날 우리들"... 발걸음에 눈물이 맺힌다

우리를 배웅해주는 북송 장기수 김동기 선생님.
 우리를 배웅해주는 북송 장기수 김동기 선생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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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친자식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 이분들로부터 정말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다는 작별인사를 하고 최선복 선생님댁을 나왔다. 김동기 선생님께선 아파트 입구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이분들의 아파트를 뒤로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영화 같은 상상을 해본다. 이분들은 어떻게 남한으로 침투했을까. 비무장지대를 넘어? 임진강을 건너? 바다로? 아니면 제3국을 통해? '남파간첩'이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할아버지들이 한쪽에서는 신고해야 할 '남파간첩'이며, 또 다른 한편에서는 본받아야 할 '공화국의 영웅'이다. 이제 분단은 끝나야 한다. 언젠가 들은 적 있는 노래 <직녀에게>를 떠올리며 호텔로 향한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 //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 은하수 건너 오작교 없어도 / 노둣돌이 없어도 / 가슴 딛고 다시 만날 우리들"

터벅터벅 발걸음에 눈물이 맺힌다.


태그:#북한, #평양, #신은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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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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