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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戰神)'
'무시 받던 한국이 단번에 전 세계 1등을 제패하게 한 존재'
'국수(國手)'
'바둑의 전설, 황제'

그것이 제가 알던 조훈현 9단이었습니다.

황제의 입당은 충격이었습니다

바둑기사 조훈현 9단이 지난 1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입당원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오는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모에 참여할 예정인 조훈현 9단은 "어제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의 대국에서)져서 충격적이다"고 운을 떼며 "바둑계를 위해서, 스포츠, 문화를 위해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입당하게 됐다"고 말했다.
▲ 조훈현, 새누리당 입당 바둑기사 조훈현 9단이 지난 1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입당원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오는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모에 참여할 예정인 조훈현 9단은 "어제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의 대국에서)져서 충격적이다"고 운을 떼며 "바둑계를 위해서, 스포츠, 문화를 위해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입당하게 됐다"고 말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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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간 있었던 바둑 세계 랭커를 정리한 영상이었습니다. 일본인으로 가득한 세계 순위에서 9단은 갑작스레 등장하고, 녜 웨이핑 9단을 꺾고 마침내 세계 정상이 됩니다. 그 이후 당신의 제자 이창호 9단이 등장하고, 그럼에도 9단은 그 이후 십수 년간 세계 순위 5등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킵니다.

제 기력을 감히 빗댈 수는 없겠으나, 사실 저는 이창호 9단보다는 조훈현 9단을 더 좋아했었습니다. 기풍이 비슷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석을 거부하고 끝까지 이어지는 수 싸움을 즐기던 저는 아무래도 이창호 9단보다는 조훈현 9단에게 더 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긴 시간 세계 1위를 제패했던 이창호 9단마저 순위가 내려가고 이세돌 9단이 등장해서 이제 9단의 시대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도, 한국의 바둑계 제패의 첫 돌을 놓은 조훈현 9단은 여전히 제게 하나의 우상이었습니다.

이번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 결과는 저 역시 충격적이었습니다. 허나 더 충격적인 것은 세기의 대국 중에 있었던 조훈현 9단 선생님의 새누리당 입당 선언이었습니다. '패배에 충격... 바둑계 위해 일하고 싶다'라는 말씀과 함께 정치계에 입문하셨죠.

그리고 비례대표 14번의 순번을 받은 지금까지도, 그 외에 어떠한 비전이나 이루고자 하는 모습을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입당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저는 그 어떠한 이야기를 추가로 들은 바 없습니다.

'정치계 입문'이라는 수를 둔 이유를 묻고 싶습니다

드라마 <미생>에서 카메오 출연한 조훈현의 가르침을 받는 장그래의 장면.
 드라마 <미생>에서 카메오 출연한 조훈현의 가르침을 받는 장그래의 장면.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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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이라도, 국민의당이라도 상관없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전설로 남아있는 바둑황제가 정치계에 입문한 진짜 이유가 듣고 싶을 뿐입니다.

선생님은 저서에서 바투(19x19가 아닌 11x11, 13x13 판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적 요소와 전략이 더 가미된 바둑게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악수인지 알지만, 신념을 위해"라고 하셨습니다. 바둑에서 묘수를 두는 것보다 피해야 한다는 악수를 두어야 할 때가 있다며,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악수를 더 둘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셨죠.

정치계 입문은 9단께 악수였습니까? 아니면 9급 10명이 아무리 봐도 모르는 수를 1급 1명이 단번에 본다는 말처럼, 제가 기력이 부족해 보지 못하는 묘수를 보고 선택하신 것입니까?

묘수였다면 다행입니다. 허나 바깥에서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이득이 보인다는 반외팔목(盤外八目)이란 고사와 반대로, 바깥에서 바라보기에는 전혀 묘수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도, 조용한 바둑계의 분위기도, 제게는 그들이 묘수로 판단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라는 것을 일평생 실천하며 살아온 선생님께는 그것이 새로운 수이며 새로운 도전이고, 발전을 위해 문을 여는 길일 수 있겠습니다. 생각의 깊이를 늘 강조하신 9단의 이번 입당 결정 역시 긴 장고 끝에 나온 것이겠지요.

제가 그것을 헤아리기에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생각의 깊이가 얕아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부디 바라는 것은, 지금의 수가 악수임을 알면서도 가셨다면 악수인 줄 알면서도 선택한 그 신념을 직접 결과로 보길 원할 뿐입니다. 반대로 묘수였다면 그것이 왜 묘수인지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치판에서 바둑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9단과 바둑계에 상처가 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큽니다. 그간 바라본 정치판은 '고고'할 수 없고 '장고'할 수 없는 세상이었으니까요. 날고 기는 사람이 들어와도 결국 권력들 앞에 고개를 숙이거나 패퇴하는 뒷모습을 남기는 세상이었으니까요.

그 수가 묘수이길 바랍니다

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고 말하는 조훈현 9단의 저서
 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고 말하는 조훈현 9단의 저서
ⓒ <고수의 생각법>,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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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는 것이 9단이 늘 강조한 진리였습니다. 이번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4국 역시 장장 20여 분의 생각 끝에 나온 이세돌 9단의 묘수가 승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수는 여전히 생각이 짧아 고수의 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9단은 저서에서 '복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적이라 할지라도 지난 수를 되새기고 함께 공부하며 그 수를 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부디 적뿐만이 아니라 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하수에게도, 그 신념을, 묘수를 보여주시기를 원합니다.

9단이 받은 14번이라는 순번은 당선 안정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순히 금배지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바둑계를 위한 헌신이었음을, 국회의원으로서 보여주시는 행보를 통해 그 신념을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둑판에서 이해되지 않았던 수가 나중에는 판을 흔들고 승패를 결정짓는 묘수였음이 드러나듯이, 지금 이해되지 않는 정치계 입문이라는 수가 시간이 지나 국회의원의 자리를 그만두실 때 저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고 탄복하는 묘수가 되길 바랍니다.

바둑에서는 제게 마무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9단의 삶 끄트머리의 수 역시 예의가 갖춰진, 악수가 아닌 묘수이길 희망합니다. 묘수보다는 혹여나 악수를 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후에 세상이 9단을 기억할 때 권력 앞에 허리를 굽히는 모습이 아니라, 바둑계를 평정한 전신이자 국수로 남기를 바랄 뿐입니다. 


태그:#조훈현 9단, #최효훈, #새누리당, #조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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