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JH. 열여덟.
189센티미터쯤 되는 거구.
얼굴엔 봄꽃이 붉게 피었다.
고민이 뭐냐고 물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연애요."
아름답다.
"연애하고 있어?"
"아니요."
더 아름답다.
"연애하고 싶어 미치겠어요."
도서관 창문 너머 목련이 움튼다.
움터라. 피어라.
피다가 지더라도 온몸의 감각을 깨워라.
꽃 진 자리 휑한 눈으로 바라보는 날이 오더라도.

"JH야. 어젯밤에 너 생각하면서 적은 글이야" 하면서 읽어주었더니 얼굴에 또 봄꽃이 피었다. "와~ 좋아요" 하면서 박수를 쳐준다. 나는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적는다. 피곤하거나 게을러서 못 적는 날도 있다. 하지만 함께 적는 '글벗' 덕분에 꾸준히 적고 있다.

"기록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일과 같다"라고 말했던 버지니아 울프. 글쓰기가 귀찮아질 때마다 이 말을 곱씹어 본다. 기록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글은 내 삶에 스며들어 '기록'이 됐다. 삶을 기록하지 않으면 허공 속에 뿔뿔이 흩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샨티학교에서 10대들을 만나면 세월의 강을 건너온 늙은이처럼 '난 저 나이에 무슨 생각을 했지'라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어릴 때부터 적어온 일기장을 찾아본다. 내가 적은 글이지만 제3자가 돼 훔쳐보는 것 같다. 낱낱이 기록한 글이 '나의 역사'가 된 것이다. 글에서 만난 10대 시절의 나와 지금의 10대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절절한 사랑의 감정은 비슷하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게임이다. 게임에 관심이 없는 나는 학생들과 게임 이야기를 하면 '왕따'가 된다.

책 냄새 맡으며 도서관에서 수업하기

샨티학교 <글쓰기를 부탁해> 수업 풍경. 도서관에서 자신이 찾아온 책을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 샨티학교 흰종검글 도서관 샨티학교 <글쓰기를 부탁해> 수업 풍경. 도서관에서 자신이 찾아온 책을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 조세인

관련사진보기


"책이 없다면 신도 침묵을 지키고, 정의는 잠자며, 자연과학은 정지되고, 철학도 문학도 말이 없을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책이라는 구원의 손을 주지 않았더라면, 지상의 모든 영광은 망각 속에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 리처드 베리

"오늘'글쓰기'는 안합니다."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진다. "졸린 사람 있죠? 걱정 말아요. 그대. 절대 잘 수 없는 수업입니다. 왜냐면 도서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책을 찾아야 하거든요."

'도서관 수업'은 책따세(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 연수의 도움을 받았다. 도서관에서 책 냄새를 맡으며 책과 친해지기 위한 수업이다. 학생들에게 책의 제목과 저자, 목차를 꼼꼼히 살펴서 여섯 권의 책을 찾아오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적으라고 했더니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적으라고 하니 꾸역꾸역 적는다. 나를 웃게 만들었던 질문. "그런데 선생님 '저자'가 뭐예요?"

1.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책
2. 제목이 가장 긴 책
3. 저자의 숫자가 가장 많은 책
4.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
5.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책
6. 나에게 주고 싶은 책

'책 제목이 곧 내 마음'이라면 십대들이 찾아온 책이 곧 그들의 마음이 아닐까.
▲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주고 싶은 책 '책 제목이 곧 내 마음'이라면 십대들이 찾아온 책이 곧 그들의 마음이 아닐까.
ⓒ 조세인

관련사진보기


학생들이 찾아온 책소개를 들으며 각자의 사연을 들을 수 있는 수업시간이었다.
▲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책 학생들이 찾아온 책소개를 들으며 각자의 사연을 들을 수 있는 수업시간이었다.
ⓒ 조세인

관련사진보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거나 나에게 주고 싶은 책은 <러브레터/ 나는 나답게 산다/ 미움 받을 용기/ 플라스틱 섹스/ 뭘 해도 괜찮아/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 연애소설/ 너무도 쓸쓸한 당신>등이 있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은 <수학으로 생각한다/ 최고 공부짱들이 밝힌 나만의 공부비법/ 비슷한 것은 가짜다/ 유혹하는 글쓰기/ 바다를 닮은 대통령/ 애니어그램의 지혜/ 아버지/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등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자신이 찾은 책을 돌아가면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섯 권의 책으로 저마다 다른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책 제목이 곧 내 마음이니까.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책에서 <유혹하는 글쓰기>를 가져온 친구가 그랬다. "글쓰기도 싫은데 글쓰기가 유혹까지 한다니 더 싫어요." 조금 서운했지만 솔직해서 좋았다.

역시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은 책을 소개할 때, 한 친구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책 두 권을 가지고 왔다. 이야기를 하면서 부모님에 대한 감정이 올라와 눈시울이 붉어진다. 더 얘기하고 싶어 했지만 마음을 다 내놓을 만큼 편안해보이지 않았다.

우린 어떤 관계를 맺을까. 나는 학생들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울컥하는 학생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관계의 결핍으로 오는 상처를 잘 보듬어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만나야 한다. 딱딱한 책상 앞에서만 만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체육시간에 함께 뛰기 시작했다. 나의 굳은 근육이 풀릴 때쯤이면 이들의 마음도 풀려 있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겠지. 우리들의 글쓰기도 끝이 없으리라.


태그:#글쓰기, #대안학교, #샨티학교, #책, #도서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쓸 때는 은둔자가 되고 싶으나, 그저 사람을 좋아하는 여인. 곧 마흔, 불타는 유혹의 글쓰기를 기다린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