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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이라도 조금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해 옆 사람과 기꺼이 손을 잡을 줄 아는 사람. 그렇게 한 팀이 되어 1등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 영광도 있다고 믿는 사람. 최고의 팀은 1등이 모여 만든 팀이 아니라 1등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팀입니다."

1등'만' 되고 싶은 사람들의 팀이 모여서일까. 옆 사람의 손을 잡기는커녕 기꺼이 내치는 팀장과 팀원이 득시글거리는 회사라면, 어서 "탈출해!"라고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가족을 책임지고,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가장이라면 어찌해야 하나. '명예퇴직'의 시퍼런 서슬 앞에서 팀의, 직장 동료의 손을 꼭 부여잡고 싶지 않았겠는가.

두산 <사람이 미래다> 광고
 두산 <사람이 미래다> 광고
ⓒ 두산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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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미래다"라며 부드럽지만 강직하게 '청년'들을 다독이는 두산의 기업 이미지 광고. 구구절절이 옳은 말에다 잔잔한 음악, 풋풋한 젊은 연기자들을 결합한 이 광고로 두산 그룹은 오랜 기간 잔잔한 호응을 끌어냈다.

그러나 이는 두산 그룹 내부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일종의 '판타지'였던 것 같다. 박용만 회장이 카피를 직접 쓰고 광고에 6년을 공들였다지만, 그 이미지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두산그룹의 한 계열사에서 최근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보면 딱 그러하다. 명예퇴직을 거부했던 한 사무직 직원에게 회사 측이 가한 심리적·물리적 압박과 폭력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사람이 미래다'라던 두산에 '이번엔 벽이다', '부도가 미래다'란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사람이 노예다', '명퇴가 미래다'라는 패러디를 끌어냈던 작년 말 '희망퇴직' 이슈도 부활하는 중이다.

'사람이 미래다'? 아니, '사람이 노예다'

"처음엔 당신에게 어떤 말로 용기를 줘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마디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당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고, 지금 그대로 멋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이 역시 '사람이 미래다' 광고 문구 중 하나다. 온종일 업무 시간 내내 벽만 바라봐야 했던 사무직 직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의 동료들은 또 얼마나 참담했을까. "어떻게 용기를 줘야 할지 고민하다, 한 마디도 찾을 수 없지" 않았을까.

두산그룹 계열사이자 유압·방산업체인 두산모트롤에서 벌어진 '면벽(面壁)' 대기 발령 소식이 알려진 지난 21일. 재벌그룹 계열사의 이러한 반인권적인 근무 방침에 비난과 반발이 잇따르고 있다.

두산그룹 계열사인 두산모트롤이 명예퇴직을 거부했던 한 사무직 직원에 대해 지난해 말에 사물함만 바라보도록 하는 자리를 배치해 반인권적이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두산그룹 계열사인 두산모트롤이 명예퇴직을 거부했던 한 사무직 직원에 대해 지난해 말에 사물함만 바라보도록 하는 자리를 배치해 반인권적이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금속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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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모트롤의 반인권적 행태를 좀 더 들여다보면 이러한 반응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면벽' 근무의 세부 사항이 더 끔찍하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 충격적인 이 사진 "명퇴 거부자를 원숭이처럼").

이아무개(47)씨는 지난해 말 회사가 명예퇴직을 통보한 사무직 20여 명 중 한 명이었다. 사무직 전체 10%가 명예퇴직을 당한 와중에 이씨는 이를 거부해왔고, 회사 측은 면벽 근무 상태로 대기발령을 내린 것이다.

10분 이상 자리를 비우면 상급자에게 보고해야 했다. 쉬는 시간 이외 흡연, 졸거나 취침, 사적인 개인 전화, 개인 서적, 어학 공부 등등 '금지' 항목이 줄줄이 달렸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와 같은 일종의 고문이었던 셈이다.

이씨가 소명자료 작성을 위해 개인 노트북을 가져오자 '보안규정 위반'을 이유로 1개월 감봉의 징계까지 내렸다고 한다. "회사를 나가라"는 의도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후 이씨가 경남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대기발령 구제신청'을 하자, 사측은 이씨에게 '재교육'을 시작했다고 한다.

보복성 대기발령과 형식적 재교육을 실시한 지 3개월 만에 이씨가 배정받은 업무는 자재관리. 사무직과는 거리가 멀어 낮은 업무성과를 낼 수밖에 없고, 이를 바탕으로 징계와 해고로 이어지는 일종의 '쉬운 해고'의 그림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경남지방노동위원회는 지난 2월 25일 이씨가 낸 '부당대기발령 구제신청'과 관련, '부당대기발령이 아니다'라는 심문회의 결과를 내놓았다. 

면벽 근무에 회고록, 경고장까지... '강제 명퇴'의 공포

두산은 이미 한 차례 퇴직 이슈로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 지난해 12월 두산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가 신입사원을 희망퇴직 대상에 올려 거센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이른바 '20대 명퇴' 논란이다.

지난해 12월, 두산인프라코어는 전 사무직 사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접수했다. 이에 입사한 1∼2년 차 총 88명 중 31%에 해당하는 28명이 신청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명퇴가 미래다" 등 쏟아지는 비난 여론에 박용만 회장이 "신입사원은 제외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후 두산 그룹은 '명예퇴직 종결자'로 낙인찍혔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문제적인 것은, 두산 그룹 내에 만연한 것으로 보이는 반인권적인 회사 문화다. 이번 '면벽' 근무 외에도 두산은 변형된 퇴직 강요로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지난해 11월 두산인프라코어는 희망퇴직을 거부한 기술직 직원 21명에게 대기발령을 내리고, 매일같이 A4용지 5장 분량의 회고록을 쓰도록 했다. 

"앉아가지고 명상을 하라고 한 거고요. 2시간이 지나면 자기 회고록을 쓰라고 했어요. 오후가 되면 다시 명상하고 또 회고록을 쓰고. 말 한마디도 못해요. 말을 하면 (회사에서) 경고장을 줘요."

지난해 말 JTBC <뉴스룸>이 보도한 두산인프라코어 직원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 정도면 희망퇴직이 아니라 사실상 정리해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작년 한 해 동안 네 번의 희망퇴직 신청을 받으면서 또 얼마나 많고 다양한 '반인권적인 강요'가 이뤄졌을까. 아마도 일반적인 업무대기와 강제 퇴직 교육은 일상이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세습이 '아름다운 승계'면 신입사원 명퇴는 '혁신적 해고'?"

두산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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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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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박용만 회장이 노동법 등 재벌 퍼주기 법안 통과를 강하게 요구했다. 심지어 국회가 기업인들을 외면한다는데 결코 외면한 적 없다. 국회는 두산이 4세 '세습'을 할 것이며 '세습'을 '승계'라 써주는 언론환경 속에서 주식까지 오른 것도 알고 있다.

재벌입법 통과를 요구하는 두산 박용만 회장이 직접 쓴 광고카피 "'사람이 미래다", 하지만 미래인 사람 심지어 신입사원까지 명예퇴직 대상에 올린 반면 임원들은 배당잔치 논란에 휩싸인 것도 국회는 안다. 세습이 '아름다운 승계'면 신입사원 명퇴는 '혁신적 해고'일까? 국회는 기업인들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다. 그런데도 박용만 회장께서 국회가 관심이 없다  하니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을 약속한다."

지난 8일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자신의 SNS에 게재한 글이다. 하루 앞선 7일,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남은 19대 임시회의 기간에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노동개혁법'등 경제 관련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촉구한 데 대한 반론이었다.

최근에도 여당은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인 민생법안, 그중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노동개혁법' 처리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지난 21일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야당은 일자리법 처리를 외면하고 선거운동만 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사람이 미래다'라는 박용만 회장과 두산 그룹의 반인권적인 희망퇴직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노동개혁법'은 '민생'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테러방지법이 '진짜' 테러방지법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산재보험법·고용보험법·근로기준법·기간제근로자법·파견근로자법 개정안을 포함하는 노동 5법도 문제지만,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이 바로 양대 지침 중 하나인 '공정인사 지침'이다. 그간 사용자는 근로기준법 23조1항의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 휴직, 정직, 전직, 감봉, 그 밖의 징벌하지 못한다"는 원칙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개정안의 '공정인사 지침'은 정리해고나 징계해고는 물론 업무능력 결여, 근무성적 부진과 같이 사용자의 주관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는 사유까지도 '정당한 해고'에 포함했다. '면벽 근무'도 끔찍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도 없이 더 '쉬운 해고'가 가능해진다는 논란이 나온 이유도 이 지점이다. 그야말로 '혁신적 해고' 방안 아닌가.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 지침'도 엇비슷하다. 근로기준법 94조는 사용자가 이 취업규칙(복무규율이나 근로조건 규정 등)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할 때는 반드시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개정안은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가 없어도 취업규칙을 바꿀 수 있게 했다. 대법원 판례에 포함된 '사회 통념상 합리성'을 근거로 든 것이다. 노동계에서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한 눈속임 아니냐'는 반발이 나오는 이유다.

2015년 한 해 '쉬운 해고'란 용어를 탄생시킨 저 '재벌 살리기' 법을 야당이 그대로 통과시켜 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미 더불어민주당은 '쉬운 해고 제한'과 '정리해고 여건 강화' 공약을 내걸었고, '쉬운 해고'를 제한하는 '살찐 고양이법'을 제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경영 위기를 자초한 경영진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벽이나 보면서 강제 퇴직을 기다리게 만들고, '쉬운 해고'를 가능케 하는 악법에 동의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면벽 근무'로 논란이 된 계열사 그룹의 박용만 회장에 '사람이 미래다' 광고 문구 중 하나를 꼭 추천해 드리는 바다. 본인이 시작한 광고인만큼 꼭 '경청'하고 '인정'하며 '실천'해 주시길.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 이 어떤 약속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정직과 용기를 보여주는 사람만큼 미래를 맡겨도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태그:#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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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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