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연암이 '불을 품은 물'이라면 다산은 '물을 품은 불'이다. - 고미숙

연암 박지원(1737~1805)과 다산 정약용(1762~1836). 25년 간격을 두고 태어나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은 조선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로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연암과 다산은 확연히 다른 외모만큼이나 평행선처럼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책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에서 두개의 평행선처럼 만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헤어질 수도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라이벌' 구도로 풀어 놓는다.

'라이벌 평전'이라는 독특한 콘셉트의 이 책은 역사를 보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연암과 다산, 두 사람의 인생을 각각 다루어도 이야기 거리가 어마어마할텐데, 이 둘을 한 데 묶어 '역사의 라이벌'로 재탄생시켰으니 그 재미가 오죽하랴. 거기에 두 사람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적인 인물 정조(1752~1800), 18세기 조선시대 르네상스가 시대적 배경이니 흥미진진한 한 편의 역사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동시대를 살았던 두 천재에 관한 미스터리

.
▲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표지 .
ⓒ 북드라망

관련사진보기

정조 시대를 다룬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문학작품들이 있지만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이 함께 등장하는 작품은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 둘은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난 적이 없으니 함께 만든 드라마가 없다.

심지어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당대에 이름을 떨쳤던 이들이 서로에 대해서는 철저히 '노 코멘트' 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자아낸다. 다산의 글에서는 연암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연암의 글 어디에서도 다산에 관한 언급은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선 뿐만 아니라 세계 지성사에도 빛나는 천재였던 그들은 왜 한번도 만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서로에 대해 철저하게 침묵했을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기다. 저자는 연암과 다산이라는 상이한 기질과 벡터를 지닌 천재가 동시대에 공존했다는 사실로부터 이 둘의 생애를 동시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역사적인 추적에 나선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분명 연암은 주류고 다산은 비주류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서 살펴보면 연암이 소수자고, 다산은 다수자다. 연암을 통해 노론 '벽파'의 이면을 볼 수 있고, 다산을 통해 성호 '좌파'의 권력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더 중요한 사항 하나. 이제 연암은 주류의 내부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원심력의 소용돌이를 일으킬 것이고, 다산은 비주류들의 부활을 꿈꾸며 전력을 다해 중심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한 사람은 중앙에서 변방으로, 다른 한 사람은 변방에서 중앙으로. 원심력과 구심력의 한판 승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43쪽)

18세기 당파와 당론이 좌우하던 조선 정치판에서 '노론 벽파'인 연암은 주류였고, '성호 좌파'로 분류되는 다산은 비주류였다. 하지만 둘은 모두 파벌정치에 물들지 않았고 계파의 이익에 충성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연암은 허세와 권위를 거부하고 주류 내부의 균열을 꾀하며 '중심에서 변방으로' 달려갔고, 다산은 비주류의 부활을 꿈꾸며 끊임없이 중심으로 질주해 갔다.

우도(友道)를 중시한 연암은 청년기를 벗들과 유람하는 것으로 보내며 주류세력으로의 편입을 거부했다. 다산은 주류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방법으로 입시에 전념했다. 관료사회 진입을 거부해 오던 연암은 가정 경제가 심각하게 기울자 마흔의 나이에 늦깎이 생계형 관직에 나서 잠깐 동안 관료 생활을 했을 뿐 대체로 평탄한 삶을 영위했다. 반면 관료사회 진입의 강한 열망을 품은 다산은 정조의 정치적 파트너가 되어 승승장구하다가 정조 사후 18년 넘는 세월을 유배되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의 넓고도 깊은 학문적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열하일기>(1783)와 <목민심서>(1818)다. 연암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문장가다. 유사 이래 연암을 뛰어넘을 만한 탁월한 문장가는 없었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가 출간과 동시에 조선 전역에 '신드롬'을 일으키고 후대에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이유이기도 하다.

다산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였다. 그 중 <목민심서>는 누구나 존경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혹은 읽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불운한 '고전'으로 꼽힌다. 무려 48권에 달하는 <목민심서>는 치밀하고도 방대한 체계와 내용을 자랑한다. 연암이 질로 승부했다면 다산은 양으로 승부한 셈인데, 두 사람은 각자의 분야에서 모두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조선의 문장가라면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어야 하고, 조선의 관료라면 다산의 <목민심서>를 교과서로 삼아야 한다.

둘이 만났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두 사람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은 중세와 근대가 조우하는 장이면서 성리학과 서학(천주교)이 충돌적으로 대립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지루한 반복과 권태를 경멸했던 연암은 새로운 사회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대신 '패러독스'를 추구하며 주류 사회 내부의 균열을 불러일으키는데 주력했다.

그 중심에 불멸의 역작 <열하일기>가 있다. 반대로 다산은 낡은 이념에 맞서는 새로운 비전과 이상향을 추구했고 지금의 낡은 조선과는 다른 미래상을 탐색하는데 집중했다. 당연히 연암보다는 다산이 개혁군주 정조와 코드가 잘 맞았다.

조선 하늘에 뜬 두개의 별. 한 번쯤 서로를 쳐다봤을법직 한데 어째서 그토록 서로에 대해 침묵했던 것일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문헌에서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추론할 뿐이다. 저자는 "둘의 영역이 너무 심오하고 각자 밟아나가는 '길'이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해 만나기 어려웠다"며 "만나는 순간 '빅뱅'이 일어날테니까. 하여 둘은 서로 무의식적으로 비켜갔던 건 아닐까. 마치 저 하늘의 별들이 그러하듯이"(390쪽)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18세기 조선에 25년의 간격을 두고 두 별이 탄생했고, 그들은 죽어서 다시 별이 되었다. 연암과 다산이 없는 18세기. 아니 조선사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별은 지도다. 별이 없으면 길 또한 없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둘은 왜 만나지 않았을까?가 아니라 저 두 별을 어떻게 우리 삶의 지도로 변환할 것인가?'(391쪽)

저자는 "지금까진 이 두 별을 하나의 자리로 연결하려 애썼다. 한때 그것이 역사적 의미를 지닌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실로 부질없는 노릇"이라며 "지금 중요한 건 이 두개의 별을 각자 빛나게 해 주는 것이다. 알고 있듯이, 별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 서로를 비춤으로써만이 빛난다. 다산이 다산이 되려면 연암이 있어야 하고, 연암 또한 마찬가지다. 저 멀리서 다산 같은 별이 빛나야 그걸 배경으로 전혀 다른 빛을 분사할 수 있다"(410쪽)고 결론짓는다.

다산과 연암의 '현재적 함의'

저자가 보기에 연암이 21세기 코드라면 다산은 20세기 코드다. 백과사전적 집대성과 총체성, 계몽적 사고가 주를 이루는 20세기는 다산의 세기였다. 다산은 방대한 지식의 세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세상의 모든 정보를 모으고 누가 무엇을 물어도 명쾌하게 답변해 주는 '콜센터'와 같다. 반면 연암은 21세기와 조응한다. 생동감과 중심으로부터의 탈주를 추구했던 연암은 정보의 소통과 쌍방향 네트워크가 중시되는 SNS 시대와 어울린다. 이것이 두 개의 별이 밝히는 두 개의 지도에 담긴 '현재적 함의'다.

'다산은 '나중에 온 자'지만 '먼저' 우리에게 나타났다. 20세기는 명실상부한 다산의 세기였다. 그때 연암은 배경이었다. 연암은 먼저 왔으되 나중에 온 자다. 21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과의접속을 시작했다. 이로써 보건대, 역사는 결코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순환하고 변전할 따름이다.'(409쪽)

고미숙의 연암과 다산에 관한 라이벌 평전은 3탄으로 예정된 방대한 기획물이다. 2015년에 2탄을 출간할 계획을 밝혔으나 아직이다. 1탄을 감명깊게 본 독자로서 2탄이 어서 출간되기를 기다린다. 다산과 연암이 보여줄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펴냄 / 2013.6.)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고미숙 지음, 북드라망(2013)


태그:#고미숙, #박지원, #정약용, #열하일기, #목민심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은 시골 농촌에서 하루 하루 잘 살기 위해.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