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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시간인데도 지하철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다.
▲ 오사카 지하철. 이른 아침시간인데도 지하철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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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찾은 일본 오사카(大阪). 숙소에서 새벽에 일찍 눈을 떴다. 여행 일행들과의 일정은 아침식사 후에 여유있게 시작하기에 자유로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잠을 더 잘까 갈등하다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지난 몇 번의 오사카 여행에서 들러보지 못했던 곳을 이번에 꼭 찾아가보기로 했다. 그중에 한곳이 바로 오사카성(大阪城) 남쪽에 자리 잡은 나니와노미야(難波宮)였다.

나는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신사이바시역(心斎橋駅)에 내려가서 지하철을 탔다. 그동안 오사카에서 지하철을 여러 번 타 보았지만 티켓 파는 기계를 보니 다시 생소했다. 티켓 자판기에 그려진 그림을 주의 깊게 읽은 후 동전을 집어넣고 티켓을 샀다. 지하철 안에는 예상 외로 아침 일찍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여고생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과거 일본의 지하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보고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일본의 젊은이들도 지하철 안에서 우리나라 같이 대부분 스마트 폰을 보고 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일본의 지하철 내부는 통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고 고요하다는 점이다. 

지하철 나가호리추루미료쿠치선(長堀鶴見綠地線)을 타고 동쪽으로 4개 역을 갔다. 지하철 노선 이름에서 한자 '학(鶴)'을 일본어로 '추루미'라고 읽는 것이 너무 흥미로웠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을 두루미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학'을 부르는 한국과 일본의 고유어 이름이 거의 비슷한 것을 보면 이 단어는 분명히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왜(倭)로 전해진 단어일 것이다. 나는 다니마치로쿠초메(谷町六丁目)에서 지하철 다니마치선(谷町線)으로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니마치욘초메(谷町四丁目)에서 내렸다.

5세기 후반 대형 창고 16채 이상 발굴

수십 개의 창고들은 강과 바다를 잇는 거대한 물류창고였다.
▲ 나니와노미야 고상창고. 수십 개의 창고들은 강과 바다를 잇는 거대한 물류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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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안내도를 따라 5번 출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나는 대각선 방향에 있는 나니와노미야 공원으로 건너가기 전에 오사카 역사박물관 쪽으로 먼저 가보았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이 바로 나니와노미야의 서북단 끝 유적지 위에 세워진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이 박물관 부근에는 과거 나니와의 물류창고인 거대한 고상창고(高床倉庫)들이 있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곳에서 5세기 후반의 대형 창고가 16채 이상이나 발굴되었다고 한다. 고상창고는 평지보다 높게 기둥을 올려 지은 창고로 습기와 짐승을 피하기 위한 것인데 바닷가 교역로에 있던 나니와가 물류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박물관 앞에는 지붕이 건물의 몸통보다 더 큰 고상창고 건물 1채가 복원되어 있다. 고상창고 앞에는 원통형의 석재 기둥이 일정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는 이 일대에서 발굴한 고상창고 건물의 기둥이 있던 부분을 표시하고 있다. 기둥이 있던 흔적만 발굴한 후에 건물 1채를 복원하였는데 폼나게 복원을 하려다보니 아무래도 원래 건물보다는 지붕 높이가 높게 복원된 것 같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의 유물과 벽화를 보면 고상창고들이 많이 보이는데 당시 한반도와 왜의 고상창고는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습기와 동물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지면보다 높은 곳에 창고를 만들었다.
▲ 고상창고 복원도. 습기와 동물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지면보다 높은 곳에 창고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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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대각선 건너편에는 나니와구(難波宮)라고도 부르는 나니와노미야(難波宮) 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행객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일본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궁궐터 안으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걷는 동안 아침의 시원한 바람이 계속 얼굴을 부딪쳤다.   

나니와노미야는 현재 오사카에서 남북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높은 평지인 우에마치다이치(上町台地)의 북쪽 끝, 주오구(中央區) 호엔자카(法円坂)의 중심에 있다. 궁궐 터 주변은 온통 관청과 오피스 건물, NHK사옥으로 둘러싸여 있고, 궁궐 터 바로 북쪽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된 도심 속에서 넓은 땅덩어리의 유적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 

궁궐터의 이름인 '나니와(難波)'는 오사카의 옛 이름으로서, 역사가 오랜 고대 지명이다. 한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니와는 거친 파도라는 뜻이며 바다와 맞닿은 해안지대에 있었던 오사카의 자연환경이 반영된 이름이다.

당시 나니와의 항구는 일본 내해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바닷길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래서 나니와에는 일본 서부, 그리고 한반도에서 다양한 물자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니와노미야 유적의 아래 지층에서 6세기 전반의 신라 토기가 발견된 것을 보면 나니와가 특히 한반도로부터 선진문물과 문화를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왜(倭)의 고토쿠(孝德) 일왕은 645년에 백제 도래인 출신의 집권층이었던 소가씨(蘇我氏) 가문을 제거하고 국정을 일신하고자 아스카(飛鳥)에서 이곳 나니와로 궁을 옮겨 왔다. 

나는 아침 공기를 마시며 나니와 궁터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현재는 궁터 안에 남아있는 당시의 건물은 없고 주요 건물이 있던 자리에 석제 기단과 주초석만 복원되어 있다. 궁의 드넓은 터에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무성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마치 주택가 안에 자리한 잘 정비된 공원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눈에 띄게 보이는 것은 없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에 옛 왕궁의 흔적들이 여행객의 발길을 잡아 끈다. 

누구라도 알기 쉽게 만화와 말풍선으로 설명하고 있다.
▲ 나니와노미야 유적 설명도. 누구라도 알기 쉽게 만화와 말풍선으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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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쾌적한 공원에는 이른 아침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 나니와노미야 공원. 넓고 쾌적한 공원에는 이른 아침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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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노미야 입구에는 유적지를 설명하는 몇 개의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하늘에서 찍은 궁궐터 사진, 궁궐 복원 배치도, 주요 전각을 말풍선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가르쳐 주듯이 간결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현실의 궁궐 터에는 사라지고 없는 건물들을 그림으로 복원하여 보여주고 있어서 나니와노미야를 이해하기에 많은 도움이 되는 안내도이다.  

궁궐 터 안에는 산책을 나온 주민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고대의 건물 터 옆에서 주민들은 자유롭게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수령이 오랜 거대한 소나무 밑을 걸어가는 할머니의 모습도 편안해 보인다. 노인국가로 접어든 일본이기 때문인지 공원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보인다. 유적지의 건물터 위를 잔디밭으로 덮어놓았기 때문에 외양만 봐서는 마치 주민들을 위해 만들어둔 공원같이 보인다.

나니와노미야가 워낙 넓어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 공원 안의 길을 지름길로 이용한다. 아침에 등교하는 학생들은 이 유적지 공원 안을 가로질러 학교에 간다. 일본을 여행하다보면 야구의 나라 일본답게 야구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 공원 안으로도 야구 유니폼을 입은 오사카 동중 학생 여러 명이 들어선다. 야구 마니아인 나는 야구배트를 들고 가는 한 중학생 야구선수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큰 소나무 아래로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노인들이 많다.
▲ 공원의 고목. 큰 소나무 아래로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노인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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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동중 학생들이 야구 시합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 중학교 야구선수들. 오사카 동중 학생들이 야구 시합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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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야구선수들! 타자로는 몇 번을 치니? 수비 포지션은?"
"6번 타자에 2루수예요."
"오늘 야구시합이 있는 모양이지?"
"네, 오늘 오사카 중학교와 시합이 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야구선수로도 꼭 성공해라."

어린 학생들이 등굣길을 서두르는 나니와노미야 공원. 고향이 이곳인 어린 학생들도 이 나니와노미야의 지나간 역사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은 공원으로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이 이용하는 한적한 곳이지만 1400년 전에는 일본의 왕궁이 자리한 수도로서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던 곳이었다.  

일본 역사의 초창기에 지어진 궁궐인 나니와노미야는 비로소 궁궐다운 크기의 규모를 갖춘 본격적인 궁궐이었다. 오랫동안 이 나니와노미야는 신화 속의 궁궐로만 전해져 왔었다. 이 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 나니와노미야가 어디에 있었는지 결정적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니와노미야는 2차 세계대전 후 일본 고고학계의 지속적인 발굴 노력 끝에 현재의 오사카 성 남부에 위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사라져가는 백제 돕기 위해 3만 명의 병력 파견한 왜

옛 왕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석제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 다이고쿠덴의 기단. 옛 왕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석제 기단이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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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고쿠덴의 북쪽으로 이어지는 이 건물은 왜왕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 다이리. 다이고쿠덴의 북쪽으로 이어지는 이 건물은 왜왕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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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니와노미야 북쪽 중앙에 자리 잡은 한 전각의 기단 위에 올라섰다. 거대한 응회암 석재를 쪼아서 만든 높은 기단으로 인해 제법 장엄해 보이는 건물이다. 다른 곳은 유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장방형의 구획만 해두고 그 안에 주초석만 복원했지만 이 전각만은 주초석 위에 높은 석제 계단과 석제 기단을 복원해 두었다. 당시에는 돌로 장식된 기단을 가진 건물이 최고 권위와 격식을 가진 건물이었다. 이 전각은 그만큼 이 왕궁 터에서 가장 중심이었던 건물, 다이고쿠덴(大極殿)이기 때문이다.

왜왕은 이 다이고쿠덴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다이리(內裏)라는 건물에 거주하고 있었다. 왜왕은 다이리에서 나와 다이고쿠덴에서 국가의 각종 의식과 행사를 주관하였다. 7세기말 왜왕의 권력이 확립된 이후 왜왕은 이 다이고쿠덴 중앙의 어좌에 앉아 신하들에게 의식의 진행을 지시하였을 것이다.

나니와에 왕궁이 건설될 당시인 7세기에 한반도에서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고 있었다. 백제의 우방이었던 왜국도 한반도 정치상황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당시 덴지(天智) 일왕은 백제의 수도 부여가 당나라에 의해 함락되자 백제의 백촌강(白村江)으로 왜군의 파병을 결정한다. 663년 당시 덴지 일왕이 백제에의 파병을 지시한 곳이 바로 이 다이고쿠덴(大極殿)이었다. 당시 왜는 사라져가는 백제를 돕기 위해 무려 3만 명의 병력을 옛 백제 땅에 파병한다.

왜국의 정치적인 의식과 행사가 진행되었던 공간이다.
▲ 쵸우도우인 터. 왜국의 정치적인 의식과 행사가 진행되었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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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니와노미야 조정에는 백제의 왕자인 부여풍(扶餘豊)이 체류하고 있었다. 그는 왕궁 터의 중앙 남쪽에 있는 쵸우도우인(朝堂院, ちょうどういん)에 서 있었다. 그는 이 나니와노미야에서 백제 부흥군의 리더로서 백제 땅으로 출발하게 된다.

중앙에 너른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쵸우도우인은 조정의 중요한 정치적인 공식 의식과 행사를 하는 곳이었다. 쵸우도우인 안에 있는 8동의 쵸우도우(朝堂)에는 조정의 관료들이 앉았으며, 이 쵸우도우 중 한 곳에서 부여풍은 평소의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백제에 대한 왜의 지원군을 파견하는 의식에서는 부여풍도 쵸우도우인의 광장 위에 다른 신하들의 앞에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이미 망한 남의 나라의 전쟁에 3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시 왜가 백제와 어느 정도의 관계였기에 그런 파병을 했던 것인가? 왜의 지배층에 백제 도래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당과 신라의 대군이 버티고 있는 백제 땅에 왜가 수 만 명의 대군을 파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의 조정에는 백제에서 온 도래인 1세대도 있었고 백제가 할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인 지배층들도 많았다. 아르헨티나에 이민 온 스페인 사람들이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듯이 백제 도래인 1세대와 백제계 지배층은 마음속으로 조국, 백제를 응원하고 있었다. 또한 백제는 왜에게 선진문물을 전해준 스승과 같은 국가였기에, 백제의 멸망은 왜에게 '조국'의 멸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백촌강에서 왜와 백제 부흥군이 괴멸 당하면서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이 패배로 왜군이 퇴각하면서 백제의 많은 유민이 거친 파도를 넘어 나니와까지 건너왔다. 백제의 유민 중 귀족계층은 이 나니와노미야에 들어왔고 귀족의 정무공간인 쵸우도우에서 왜의 나라 기틀을 잡아나가는 데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백제 유민들의 합세로 인해 왜는 '일본'이라는 국가로서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그 후 일본이 한반도와 단절되어 일본열도 안에 갇힌 채 폐쇄적인 국가로 발전하면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우호적인 역사는 지금까지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이웃나라를 침탈한 과거의 역사를 부정하는 속 좁은 나라, 일본에게 나는 오사카 나니와노미야에서 펼쳐졌던 고대 한반도와 왜의 역사를 말해주고 싶었다. 당시 한반도의 백제는 왜에게 멘토와 같은 나라였고, 당시 왜는 스승의 나라를 도우러 온 국력을 기울였다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일본은 왜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실마저도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는지 나는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그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니와노미야 공원에는 아침의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불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500여 편이 있습니다.



태그:#일본, #오사카, #오사카여행, #나니와노미야, #나니와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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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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