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인공지능이 '가장 복잡한 두뇌싸움'으로 불리는 바둑 종목에서 사람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영화 얘기가 아니다. 구글의 딥 마인드(DeepMind) 인공지능 로봇 '알파고'와 세계 최강으로 불리는 바둑 9단 이세돌의 대결이 3월 9일부터 벌어질 예정이다.

이 대결을 위해 수십만의 기보(바둑 대전 기록)를 연습했다는 알파고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꼽히는 것은 '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감정이 없기에 흔들리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이론적으로 가장 최선의 수를 놓는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교수는 "'기싸움'은 기계가 가질 수 없는 인간의 고도화된 뇌기능"이라며 감정이 없는 알파고의 패배를 예측했다. 돌 하나를 놓을 때 기사가 담는 세세한 의미들을 알파고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을 잡는 것'의 중요성

이세돌 9단이 구글이 만든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의 맞대결을 하루 앞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사전 브리핑에 참석해 구글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하사비스과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세돌 9단이 구글이 만든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의 맞대결을 하루 앞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사전 브리핑에 참석해 구글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하사비스과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바둑의 기싸움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둑을 둘 때 상대의 바둑 스타일을 파악하고, 상대의 행동을 결정하게 만들고 예측하는 것이 기싸움이다. 단순히 최선의 수인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돌로 전하는 기사의 '발언'이자 '공격'이자 '외교'다. 때로는 홀로 장판파를 지키면서 허세를 부려 조조를 쫓아낸 장비처럼, 때로는 후퇴하며 기습을 노린 제갈량처럼 상대에게 겁을 주고, 함정에 빠뜨리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나 역시 바둑을 배운 일이 있다. 그런 내가 이해한 기싸움 중의 하나는 '언제나 선을 잡는 것(먼저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바둑은 상대적으로 실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흑' 돌을 잡고 시작한다. 먼저 두는 것은 곧 유리함을 의미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싸움을 이끌어갈 수도 있고,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수도 있다. 상대는 먼저 두는 이의 공격을 무시하지 못하는 이상 따라가며 방어해야만 한다.

종종 그 '선'을 잡고 놓지 않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싸움에서는 지더라도 나는 늘 먼저 싸움을 걸어서 네가 날 따라오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따라가는 이는 자신의 돌을 두지 못한다. 상대가 선점한 이슈를 따라갈 뿐이다. 그런 이들은 작은 패배와 손해에 연연하지 않는다.

실제로 바둑을 배우면서 가장 중요하게 배운 것은 '버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두던 곳에서의 싸움이 지거나, 끝났다면 깔끔하게 버리고 새로운 곳에 돌을 두는 것이 이기는 법이라고 했다.

늘 먼저 싸움을 시작하며 기싸움을 걸어오는 이들은 먼저 시작한 싸움에서 내가 이기더라도 매달리지 않고 또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나는 이전의 이익에 기뻐할 틈이 없었다. 지금 제대로 따라가지 않는다면, 난 더 큰 피해를 볼 것이니까. 그 과정이 지나고 나면 나는 기운이 빠지고, 자그마한 싸움들에서 집중을 하지 못해 악수를 둔다. 후에 돌로 메워진 바둑판에 내 의지는 남아있지 않다. 보통은 패배로 끝난다.

웹툰 <미생>의 첫 시작마다 나온 조훈현 9단과 녜 웨이핑 9단의 대국을 두고 후에 조훈현 9단은 저서 <고수의 생각법>에서 그 대국을 인용하며 선을 잡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상대의 수를 따라 다니며 방어만 하느라 패색이 짙었던 경기에서 승기를 잡은 것은 129수를 기점으로 자신이 선을 잡아 기세를 몰아쳤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그것이 이세돌 9단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싸움'의 중요성이다. 패배는 작은 싸움들에서의 패배가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돌에 따라가기만 하는 이에게 남겨진다. '자신의 돌'을 놓지 못한 이들이 패배한다.

선거판에서 먼저 기싸움 건 김종인 대표

드라마 <미생>에서 카메오 출연한 조훈현의 가르침을 받는 장그래의 장면.
 드라마 <미생>에서 카메오 출연한 조훈현의 가르침을 받는 장그래의 장면.
ⓒ tvn

관련사진보기


최근 야당은 38명의 국회의원이 참여한 192시간을 넘긴 필리버스터를 중단했다. 이를 두고 야당 지지층의 역풍이 거세다. 필리버스터를 계속 이어가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막았어야 한다고, 혹은 최소한 '그래도 끝까지 버티는 모습'을 남겨야 할 것 아니냐는 비판들이 오갔다. 끝까지 의견을 지탱하지 못하는 나약한 야당의 모습을 보았다며, 그러한 자세로는 지지층들을 설득하지도, 끌어오지도, 신뢰를 얻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시작된 필리버스터 중단을 '기싸움'으로 이해한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대 여당·청와대와의 기싸움이었던 것이다. 김종인 대표는 '비록 꼬리는 내릴지라도 주도권은 내가 가져가겠다'는 메시지를 던진 거나 다름없다. 어차피 필리버스터를 통해 테러방지법을 막을 수 없다면, 총선을 연기시켰다는 역풍을 맞기 전에 먼저 그만둠으로써 이슈를 선점하고, 상대가 테러방지법이라는 이득을 챙겨갈 때 바로 다음 싸움을 시작하겠다는 의미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눈물로 호소해 중단의 변을 하며 '진 싸움'을 마무리하고, 김종인 대표가 이후 국민의당에 야권통합 메시지를 던졌다. 국민의당은 밤새 격론을 하며 결론을 내놓았지만 그것은 국민의당의 수가 아니었다. 김종인 대표가 던진 수를 따라온 것이었고, 여전히 이슈는 김종인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이 쥐고 있다. 테러방지법을 통과하며 승리한 새누리당도, 국민의당도 먼저 돌을 두지 못하고 있다.

지난 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나선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선거법 처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게 됐다"며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할 때까지 서 있겠다"고 말한뒤 울먹이고 있다.
 지난 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나선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선거법 처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게 됐다"며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할 때까지 서 있겠다"고 말한뒤 울먹이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물론 테러방지법은 작은 싸움이 아닐 것이다. 판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싸움이고, 어쩌면 판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종인 대표의 관심은 이 싸움 자체가 아닌 듯하다. 싸움을 시작한 곳에서 졌으니, 매달리지 않고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총선일 것이다. 총선까지 선거판에 더불어민주당이 선점한 돌로, 선점한 이슈로 가득 메우는 것.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의 패가, 돌이, 메시지가 담기지 않게 하는 것. 그는 '이 판에 내 돌만 놓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큰 그림을 그리며 작은 패배를 견딘다"

바둑에는 '정석'이 있다. 가장 효율적인, '정답'에 가장 가까운 수다. 나는 정석을 잘 모른다. 그러한 내가 기억하는 '짜릿한' 승부가 있었다. 정석을 위주로 공부한 상대였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주변인들은 모두 쉽게 내 패배를 예측했다. 경기가 후반에 이르기까지 나의 집은 없었고, 상대의 세력은 넓었다. 나는 곳곳에서 싸움을 걸었지만 정석의 효율성 앞에 패배하고, 바로 다른 곳으로 가서 또 패배했다.

하지만 끝에 가서, 나는 이길 수 있었다. 바둑판의 수많은 싸움들은 모두 내가 시작하고 내가 끝낸 싸움이었고, 나는 그것들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짜서 새로운 싸움을 걸 수 있었다. 내 세력은 없지만 판의 돌들은 내가 만든 것들이었다. 결국 끊임없이 연결되는, '졌던 돌들'이 마무리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되살아나서 모두 내 세력으로 변했고 나는 승리했다.

조훈현 9단 역시 <고수의 생각법>에서 '버릴 때는 미련 없이 버려야한다'고 아예 한 챕터를 통해 이야기한다. 웹툰 <미생>에서 입사면접시 장그래는 "곤마가 된 돌은 죽게 두는 거야. 단 그들을 활용하면서 내 이익을 도모해야지"와 "전체를 보는 거야.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작은 패배를 견뎌낼 수 있어"라는 선생의 말을 떠올리며 질문에 답한다.

바둑
 바둑
ⓒ 위키미디어

관련사진보기


'기싸움'과 '싸움을 선점하고 시작하는 것'은 바둑의 승부를 가르는 주요한 요소다. 사람들은 그 요소가 인간이 고도로 숙달된 초인공지능 로봇을 이기게 만드는 힘이라고 믿는다.

3월 15일,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이 끝난다. 늘 최선의 수를 두는 인공지능과 기싸움을 할 줄 아는 인간의 대결. 내가 그 대결에 주목하는 것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에 대한 호기심인 동시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이 혼란스러운 총선 승리를 누가 가져갈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고함20(www.goham20.com)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최효훈, #알파고, #김종인, #필리버스터 중단, #이세돌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