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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 당하는 사회
 감시 당하는 사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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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의 일기장을 걷어갔었다. 모든 아이들의 일기장을 자세히 읽어보는 것은 물론 일기장에는 밑줄을 치거나 사소한 맞춤법 검사, 선생님의 감상평과 '댓글'이 풍성하게 달려있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나는 내 일기장임에도 선생님의 '일기 검열'이 신경 쓰여 눈치를 봐야만 했다. 맞춤법 하나에도 걱정하고, 주관적인 내 느낌을 거침없이 표현할 때도 고민을 했다. 나의 일기가 거의 '재미있었다', '보람찼다' 류의 천편일률적인 결말로 끝을 보았던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사실은 기분이 나빴던 날도, 재미없는 날도 있었을 텐데).

어릴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선생님의 감시에 노출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약간의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나의 일기장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내 스마트폰의 주인은 누구인가

요즘 시대에 일기장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은 단연 스마트폰이다. 나를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폰 내에 내장되어있는 플래너와 메모장에 일정을 기록하고, 간단한 감상을 쓰기도 한다. 특히 SNS에서는 나의 사생활을 드러내고 느낌을 표현하는 일이 빈번하게, 그리고 가감 없이 이루어진다.

언뜻 봐선 사람들은 스마트폰 세상에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그러나 내가 '표현'한 느낌과 감상이, 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미국 안전보장국 요원으로 일하던 'IT 천재' 에드워드 스노든은 NSA의 무차별적인 통신정보감시를 폭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스마트폰을 샀지만 주인은 따로 있다." 그렇다면 내 스마트폰의 또 다른 주인은 누구인가?

No Place To Hide
 책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표지.
 책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표지.
ⓒ 모던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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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내용은 놀랍게도 현 정부가 시행하려는 테러방지법의 핵심 독소조항의 내용과 닮아있다. 한 국가의 정보기관이 이메일, 전화 등 어떠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막론하고 도·감청을 할 수 있고, 통장 입·출금내역이나 노트북 안에 있는 개인의 비밀정보까지 샅샅이 감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스노든과 함께 폭로를 준비했던 탐사 저널리스트 글렌 그린월드가 저술한 책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에서의 몇 대목만 살펴봐도,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일이 마치 '평행이론'처럼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테러방지법으로 인해 판옵티콘이 만들어진 한국은 이제 말 그대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미국 정부는 극단적인 행정권이라는 논리에 호소해서 NSA의 비밀프로그램을 정당화하려 했고, 정부의 논리는 테러 위협에서 '국가를 안전하게 보호하기'위해 대통령에게 법 위반을 포함해서 사실상 무한한 권한을 부여했다" (본문 中)

'훔쳐보기'가 정당화되는 사회

오늘날 지식정보사회에서 유저는 디지털 콘텐츠의 생산자이자 감시의 대상자이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올린 사진과 글, 로그 기록까지 전부 손쉽게 소위 말해 '털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유저는 점차 감시의 대상자뿐만 아니라 감시의 주체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 연예 매체에서는 연예인의 카톡 대화를 스스럼없이 공개한다. 배우 이병헌과 클라라, 가수 김현중의 사생활 대화 기록을 대중들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고, 웃음거리로 삼는다.

SNS나 커뮤니티에는 "이런 내 남친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친구의 인성 수준"이라는 글 제목으로 카톡대화의 캡처가 심심찮게 올라온다. 때로는 실명과 프로필사진이 가려지지 않은 원본이 돌아다닐 때도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바라보며 정부도, 국민도 '집단 관음증'에 걸린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국민이 아무런 자각 없이 남들의 사생활을 관음하는 동안, 검열은 이미 내면화되었을 수도 있다.

지난 2일 본회의를 통과한 테러방지법은 분명 테러행위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처를 위한 '테러예방법'이다. 그러나 법안에서 말하는 '테러위험인물'의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정의, 그리고 '테러위험인물'에 대해 국정원에 주어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사상·신념, 노동조합·정당의 가입·탈퇴, 정치적 견해, 건강, 성생활 등에 관한 정보까지 수집할 수 있는 권리와 무영장 감청까지) 등은 '시민감시법'을 테러방지법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둔갑시킨 것이 아니냐는 논란을 낳았다.

테러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판옵티콘'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 국가가 국민의 감시를 위해 '빅브라더'로 존재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관음사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훔쳐보기'사회가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혹자는 국정원이 내 정보를 수집해도 내가 모르기만 하면 되지 않냐는 말을 한다. 감시사회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일상의 일기장이 누군가에 의해 읽힌다는 것, 관음과 감시 속에서 내면적 자기검열을 밥먹듯이 하게 되고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그러다가 언젠가 나의 자유와 인권이 박탈당할 때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태그:#테러방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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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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