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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마을 극장, 때 아닌 만원 사례를 이뤘다.
 산골마을 극장, 때 아닌 만원 사례를 이뤘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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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힐 듯한 적막감…. 갑자기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아니 괴성에 가까웠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극장 안은 한숨이 깊어갔다.

김향란 할머니는 96세다. 자신의 20대 시절을 떠올렸다. 그녀 또래 아이들이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바다 건너 낯선 땅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이 되리란 걸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서글픔 보다 뜻 모를 분노가 끓어올랐다고 했다. 갑자기 고함을 치신 이유란다.

미션, 버스를 구해와라

군 부대는 할머님들을 위한 지원병을 파견했다.
 군 부대는 할머님들을 위한 지원병을 파견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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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장님 우리 마을 어르신들 60명 정도 모시고 영화 <귀향>을 보여드릴까 하는데, 버스지원 좀 안될까요?"
"그렇게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지난주 화천군 사내면 광덕3리 이희철(58) 이장은 느닷없이 버스 지원을 요청했다. 화천군청 버스를 지원하든, 관광버스를 대절하든, 선거법 문제가 될 수 있다. 안 된다고 하는 게 옳다. 그런데 난 '그렇게 하겠다'고 덜컥 약속해 버렸다.

"주임원사님, 사실 이래저래 한데, 버스 지원 좀 부탁드릴게요."
"제가 알아보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장에게 "알아보겠다"라고 말했던 건 이기자 부대 강원근 주임원사 때문이다. 강원도 호천군 사내면은 38선 이북 지역이다. 수해가 났을 때나 마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혹은 다른 행사를 할 때 군 부대의 민간지원을 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군 부대를 떠올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부대장님(김정수 사단장)께서 그런 일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찾아 지원해드리라고 했습니다."

20여 분 뒤, 내게 전화를 건 강 주임원사는 나보다 더 들뜬 목소리였다. 부대버스뿐 아니라 어르신들을 안내할 지원병까지 붙여주겠다고 했다.

<귀향>은 슬픈 영화가 아니었다

이희철 화천군 사내면 광덕3리 이장. 귀향 영화를 보고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이희철 화천군 사내면 광덕3리 이장. 귀향 영화를 보고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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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영화구경 한 번 시켜드린 적이 없었어요. 바쁘다는 건 핑계였겠죠. 그런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께 영화를 보여 드리는 것이)부모님께 못해 드린 후회를 그나마 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이장은 부모님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해 산골마을에 개봉관이 생기고 난 이후, 부모님께 영화구경 한번 못 시켜 드린 게 그를 괴롭혔단다.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가 나오길 기다렸다. 기왕이면 슬픈 영화가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가 '귀향'이란다.

"슬프던가요?"
"슬프긴요. 어르신들 표정 보세요. 다들 화가 나 있잖아요."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나온 그에게 영화 내용을 묻자 대뜸 '슬픈 게 아니라 나라의 힘이 없다는 것과 지금의 위정자들 행태가 겹쳐져 영화 보는 내내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슬픈 역사 상기 그리고 분노

토마토 시네마에 걸린 영화 '귀향' 포스터
 토마토 시네마에 걸린 영화 '귀향' 포스터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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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어제 영화 어땠어요?"
"다신 그런 영화 안 볼란다. 분해서 밤새 한잠도 못 잤다."


지난 3일, 어르신들 영화관람 다음날 광덕3리 경로당을 찾았다. 이장님이 눈을 찡긋했다. 밖으로 잠깐 나오란 눈치다.

"내 판단 미스였어요. 어르신들은 (신파극 같은) 슬픈 영화를 좋아하시거든요. (<귀향>이) 그런 영화인줄 알았지. 잘못 생각했던 거죠. 돌아오면서 분노하신 어르신들 달래드리느라 진땀 뺐다니까요."
"나중에 어르신들 좋아할 만한 영화 나오면 한 번 더 합시다."

어르신들께 영화평을 여쭤보러 갔다가 제대로 질문도 못했다. "그래도 우리가 잊고 살아왔을지 모를 뼈아픈 역사를 상기했다는 측면에서 효과는 있었다"라는 이장의 말을 뒤로 하고 경로당을 나섰다.

군부대에선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버스 2대를 지원했다.
 군부대에선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버스 2대를 지원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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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시민기자는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장입니다.



태그:#귀향, #광덕3리, #이희철 이장, #토마토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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