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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 국회의장의 테러방지법 상정은 '필리버스터', 무제한 토론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너무나 익숙케 만들었다. 10시간에 달하는 일부 국회의원들의 진심 어린 발언들은 일부 언론의 1면과 SNS를 채우고, 시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일부 시민들은 국회에 직접 방문해 그 열기를 느끼기도 했다. 더 나아가 국회 밖 정문에서 직접 발언을 한 이들도 있었다. 국회방송에서 봤던 의원들의 연설보다 거칠었지만, 신선한 발언들이 인상적이었다. 며칠간 국회 앞에서 지켜본 몇몇 이들의 모습을 긁적여본다.

#1. 한 정치하는 뮤지션의 '필리버스킹'

그의 이름은 김영준. 1인 인디밴드로 본명보다 '하늘소년'으로 더 자주 불리는 그다. 영준 씨는 필리버스터와 길거리 공연을 뜻하는 버스킹을 합쳐서 국회 정문 앞에서 노래로 정책을 이야기하는 '필리버스킹'을 했다. 다음날 그는 은수미 의원과 나란히 모 주요일간지의 1면을 장식했다.

사실 인디뮤지션 외에도 그의 직업은 하나 더 있다. '정치인'이다. 그는 2주 전 20대 국회의원 선거 서대문 갑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그는 노래로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이야기했고, 인터뷰에서도 '녹색당 국회의원 후보'라고 기자에게 말했지만, 신문에는 그저 인디뮤지션으로 소개됐다. 기타에 그가 소속된 정당의 스티커를 크게 붙였으면 그가 신문 1면에실릴 수 있었을지는 의문. 아무렴 어떠랴. 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스스로의 생각을 뱉어냈으니 그로 충분하지 않은가.

제20대 총선 국회의원 예비후보 김영준 씨는 한겨레 지면에서 단순히 인디뮤지션으로만 소개되었다.
▲ 한겨레 신문 1면 제20대 총선 국회의원 예비후보 김영준 씨는 한겨레 지면에서 단순히 인디뮤지션으로만 소개되었다.
ⓒ 진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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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이 쉬어라 외치는 할아버지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예순은 됨직한 그는 "야당 국회의원 나오라 그래!!"를 외쳐대고 있었다. 100와트짜리 엠프는 그의 목소리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 채 고막을 긁는 소리들을 뱉어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났다. 시민 필리버스킹을 방해하려는 고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혼자였다. 자신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국회 문 앞을 지키는 경찰들과 필리버스터를 하는 시민들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1시간 반을 쉴새 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에서 갈라진 쉰소리가 나왔다. 그에게 어떤 아픈 기억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으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기억이 있는 걸까? KAL기 폭발 사건으로 아들이 죽은 걸까? 그 쉰소리에서는 외로움, 고독 어린 슬픔이 묻어났다.

차마 그에게 말을 걸지는 못했지만, 차디찬 날씨 속에서 목이 쉬어라 외치는 그가 문득 안쓰러워졌다. 잠시 자리를 떠 캔커피를 가져다 드렸다. 그는 멈칫하다 캔을 받아들고, 나를바라보며 "정의는 살아있다!!"를 외쳤다. 그후 그는 한 시간 정도 그 자리를 지켰지만, 시민 필리버스터를 하던 무리에 삿대질을 멈추었다. 문득 병원에 계신 할아버지가 떠올라 눈가가 붉어졌다. 그에게 말을 걸어 이야기라도 들어볼 걸.

시민 필리버스터 현장에는 찬성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시민 필리버스터 현장에는 찬성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 진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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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느 중년 여성의 울음

뒤에서 지켜보던 한 중년 여성이 손을 들었다. 짙은 화장,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그녀의 발언은 논리정연하지는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합니다"로 시작한 그녀의 연설은 "내 아이들을 이런 나라에서 살게 할 수 없습니다", "과거 행동하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해 후회합니다"로 이어졌다.

그녀는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두어 시간 동안 지켜본 것만으로는 그녀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쉬이 판단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녀는 그곳에서 말하고 있었고, 그녀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눈물을 끌어냈으리라.

지켜보던 시민들은 하나 둘 손을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지켜보던 시민들은 하나 둘 손을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발언을 하기도 했다.
ⓒ 진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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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는 통쾌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청량감으로 대중의 시선을 붙잡았다. 장외 시민 필리버스터를 며칠간 지켜보며 청량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한다는 것.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지, 논리가 있든 없든, 말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역설적이게도 표현의 자유를 축소할 수 있는 테러방지법에 찬성하는 이들도 열린 광장에서 그들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 어설프지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의 필리버스터에는 국회 안 의원들이 하는 연설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태그:#필리버스터, #테러방지법,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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