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사 수정 : 28일 오후 2시 6분]

유난히도 고성과 비난이 거셌다. 1974년생 40대 초반의 초선 여성 의원이 필리버스터에 나섰다. 그리고 자신이 수사했던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 댓글 사건을 요목조목 파헤쳤다. 침착하게 자료를 읽어 내려가는 순간에도, 목청 좋은 새누리당 의원들의 고함이 국회 본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28일, 오전 9시 20분께 22번째 필리버스터 주자로 나선 국민의당 권은희 의원.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집착하는 테러방지법에 단호하게 '아니다'라는 의지를 보여줘야"라는 취지의 그의 발언에 새누리당 의원들은 유독 견제하고 딴죽을 거는 모양새였다.

필리버스터가 118시간을 넘긴 28일 오후 5시 현재. 권은희 의원은 필리버스터에 나선 11번째 여성 의원이었다. 23번째 주자인 더불어민주당(아래 더민주) 이학영 의원 전까지, 당과 나이, 국회의원 당선 전 경력과 상관없이, 딱 절반을 여성 국회의원이 차지했다.

주요 외신을 통해 해외로까지 타전되고 있는 야당의 세계 최장기 필리버스터는 아마도 대한민국 국회에서 양성평등을 이뤄낸 최초의 사례로 꼽혀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세계 100위 정도인 15% 수준인 것에 비하면 50%는 놀라운 숫자 아닌가. 이런 수치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한국 국회의 슬픈 현실을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다. 여성 의원들의 활약 역시 도드라졌다. 필리버스터의 수확이자 숙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새누리당 의원들은 유독 권은희 의원만?

권은희 국민의당 의원이 28일 오전 국회에서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마친뒤 본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안철수 상임 공동대표 등 국민의당 의원들은 이날 본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필리버스터 주자로 나섰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의원들이 같은 당 동료의원들의 격려를 받으며 퇴장한 것과 대비된다.
 권은희 국민의당 의원이 28일 오전 국회에서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마친뒤 본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안철수 상임 공동대표 등 국민의당 의원들은 이날 본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필리버스터 주자로 나섰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의원들이 같은 당 동료의원들의 격려를 받으며 퇴장한 것과 대비된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수사과장이었던 권 의원이 국회 방송 카메라 앞에서 여과 없이 폭로하는 내막이 부담스럽기도 했을 터다. 계속되는 방해에 '힐러 리'라는 별명의 이석현 국회 부의장이 "발언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며 "자꾸 그러면 (새누리당에서도) 발언을 신청하라"고 중재를 했을 정도다.

실제로, 자료 읽기 중심의 발언이었지만 '테러방지법=국정원 강화법' 공식이 필리버스터를 통해 알려지면서 권은희 의원의 발언이 관심을 모은 것도 사실이다. 이를 의식한 듯 권 의원은 "(국정원 사건과) 관련된 당사자란 이유로 발언권을 제한하는 상황"이라며 3시간의 발언을 마치고 국민의당 의원이 아무도 없던 국회 본회의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한편으로, 권은희 의원의 더민주 탈당을 염두에 둔 듯, 평소 유튜브 생중계 댓글창과 SNS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비아냥과 같은 어투도 눈에 띄었다. 필리버스터과 관련 '양비론'을 펼쳤던 안철수 대표와 중재를 시사했던 국민의당의 어정쩡한 스탠스에 대한 반응으로 풀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은희 의원은 제 할 일을 다 해냈다. 테러방지법의 부당함을 역설하는 동시에 당사자가 전할 수 있는 국정원 댓글 사건의 전모를 국회 회의록에 남겼다. 과거 국정 조사와 법정에서 다하지 못한 발언들로 채워진 권 의원의 발언은 3시간이 부족해 보일 정도였다.

엘리너 파전의 <줄넘기 요정> 속 이야기를 거론하며, "동화 속 주인공처럼 국민들께서 박근혜 정부와 여당의 오만한 질주를 포기하게 만들어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5박 6일 필리버스터, 은수미의 눈물에 응답하다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4일 오후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저지를 위해 국회 본회의에서 10시간 18분동안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을 진행 한 뒤 동료들의 격려를 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4일 오후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저지를 위해 국회 본회의에서 10시간 18분동안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을 진행 한 뒤 동료들의 격려를 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영화 <암살> 속 배우 전지현의 대사다. 28일 오후, 더민주 은수미 의원은 SNS에 사진 한 장을 게시했다. 은 의원이 필리버스터 지속 여부에 대한 의견을 SNS로 물었고, 한 사용자가 은 의원의  필리버스터 발언 사진과 <암살>의 스틸컷을 합성한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세 번째 주자로 나서 10시간 18분 동안 발언을 이어간 은 의원은 '눈물'과 '투사'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자신의 기록을 깬 '참필리버스터' 정청래 의원에게는 이런 인사도 전했다.

"정청래 의원님 덕분에 다른 분들이 좀 짧게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잖아요. 아예 12시간 넘기셨으면 했는데... 기다렸던 진선미 의원님 생각하면 무리한 부탁이었죠. 전 아직 완전 회복이 안 돼요. 의원님도 건강조심!"

5박 6일째 이어지고 있는 필리버스터 초반, 누구도 예상치 않았던 은 의원의 장시간의 발언은 여론과 언론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청년층의 고충으로 출발해 인권으로 마무리한 은수미 의원의 마지막 발언은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헌법에 보장된 시민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언론의 자유 누리고 표현의 자유 누려야 합니다. 어떤 억압으로부터도. 자기 운명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못하게 할 수 있는 법이라고 누차 이야기, 끊임없이 주장하는데 제발 바른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하는데..."

아마도 '은수미의 눈물'과 함께 은 의원의 호소력 있는 발언과 쏟아지는 호응은 필리버스터 초반, 그 실효성을 두고 반신반의했다던 여타 더민주 의원을 움직이는 촉매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필리버스터의 절반, 여성 의원의 힘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7일 정청래 의원에 이어 테러방지법 본회의 처리를 막기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18번째 주자로 나섰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7일 정청래 의원에 이어 테러방지법 본회의 처리를 막기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18번째 주자로 나섰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더민주 유승희, 최민희, 김현, 배재정, 전순옥, 추미애, 진선미, 박혜자, 정의당 김제남, 국민의당 권은희.'

필리버스터에 나선 여성 의원 명단이다. 새누리당 한 의원은 "그런다고 공천 못 받는다"며 막말을 쏟아냈지만, 필리버스터를 지켜보는 이들은 한 명 한 명을 주목하고 과거 활약과 캐릭터(?)를 분석하며 '국회의원 재발견'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과거 '박근혜 저격수'로 불렸던 배재정 의원이나 '전태일의 동생' 전순옥 의원이 대표적이다. 배재정 의원은 필리버스터가 한창이던 25일 '취임 3주년'을 맞아 대전 창조경제혁신센터에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국가비상사태라면서 이런 사진이나 찍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전센터를 방문한 대학생들과 '손가락 하트' 사진을 찍은 것을 염두에 둔 비판이었다. 이 발언은 즉각 '마이국회텔리비전' 시청자들이 만든 패러디 사진으로 화제가 됐다. 

전문 분야가 다른 만큼 발언의 내용들도 다채로웠다. 전태일 열사를 소환한 전순옥 의원은 1970년대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기억을, 유일한 현역 4선인 추미애 의원은 판사출신으로서 테러방지법의 법적인 맹점을, 민주언론시민연합 출신인 최민희 의원은 언론 탄압의 가능성을 역설했다. 정청래 의원에 이어 27일 오후 발언에 나선 진선미 의원 역시 마지막 발언 중 "국가의 의심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란 문장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의심받는 사람은 늘 빈민이고, 여성이고, 탈북자이고, 가난한 나라 출신의 외국인입니다. 의심은 늘 정권의 반대편에 선 사람과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은 철저히 합리적이어야만 하고, 정보 관리는 반드시 통제되어야 합니다. 비합리적인 의심과 통제되지 않는 정보는 권력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칼이 됩니다. 의심은 합리적이고 평등해야 합니다. 정보를 관리하는 행정부는 국민에게 통제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결코 물러날 수 없는 법치주의의 기본 원칙입니다.

테러는 정보를 독점하는 비밀스런 조직에 의해 예방되지 않습니다. 테러는 소중하게 지키고픈 삶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국민들의 힘으로 예방됩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대한민국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우리나라와 세계의 빈곤과 갈등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국민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움직일 때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동력은 국민들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하고,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은수미 의원 트위터 중.
 은수미 의원 트위터 중.
ⓒ 은수미 트위터

관련사진보기


여성 의원만 나오면 유난히 새누리당 남성 의원들이 고성을 지른다. "여자라 만만한가"란 반응이 터져 나올 법하다. 우리 국회가 아직 남성 본위의 분위기 탓이라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여성 의원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필리버스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대한민국 국회의 오늘이다.

28일, 여야 합의로 선거구획정안이 확정됐다. 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이다. 19대 임기 내내 비례대표를 늘리자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지만, 결과는 7석 감소로 돌아왔다. 비례대표에 주목하는 까닭은 어렵지 않다. 필리버스터에 나선 여성 의원들 중 추미애(서울 광진을), 박혜자(광주 서구갑), 권은희(광주 광산을), 유승희 (서울 성북갑)을 제외한 7명이 비례대표였다.

그만큼, 여성 지역구 의원은 아직도 소중한(?) 존재다. 당내 경선과 공천을 뚫고, 선거전에 승리해 지역구를 이끄는 여성 국회의원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남성 중심의 한국 정치문화와 유권자의 의식이 결합한 결과라 할 만하다.

"은수미도, 추미애도, 전순옥도, 진선미도 있는데, 왜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은 박근혜냐."

SNS 상의 자조섞인 한탄이다. 필리버스터가 진행 중인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이 한탄은 그러나 현실과는 확실히 괴리돼 있다.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여성 의원 11명 중 20대 총선에서 지역구에 도전하는 의원을 꼽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례대표가 7석 줄면서 여성의원들의 숫자 역시 감소하지 말라는 법도 없게 됐다. 테러방지법과도, '여성의 국회 진출'이란 현실과도 싸워야 하는 여성 의원들의 현재. "국회의원의 재발견"을 수확이라 꼽을 수 있는 필리버스터가 내준 어려운 숙제다.


태그:#필리버스터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