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를 여행하다 보면 룩셈부르크 사람들의 기질이 다른 유럽 사람들에 비해 매우 명랑하고 외국 사람들에게도 친절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거리의 카페에서 지인들과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즐기는 룩셈부르크인들의 모습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즐긴다는 사실을 여행 중에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룩셈부르크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장미밭을 가꾸고 두 명이 모이면 커피를 마시며 세 명이 모이면 악단을 만든다고 한다. 룩셈부르크 구시가를 걷던 나는 그랑 뤼 거리(Grande rue)를 걷다가 룩셈부르크인들이 얼마나 음악을 즐기는지를 보여주는 조각상을 만났다. 그랑 뤼 거리에 있는 분수대에는 룩셈부르크 사람들의 국민성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룩셈부르크인들은 3명이 모이면 악단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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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들의 행진 분수대. 사람이 모이면 음악을 즐기는 룩셈부르크 인들의 특성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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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행진'이라는 뜻의 청동 조각상 '하믈스마치(Hämmelsmarsch)'는 1937년에 만들어졌다. 이 청동 조각상에는 3명의 악사들이 익살스럽게 악기를 연주하고 있고 두 명의 어린이는 우산을 쓰고 있으며 그 주위를 양들이 걷고 있다.

음악을 즐기는 룩셈부르크인들이 축제의 행렬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이다. 사람들을 둘러싸듯이 걷고 있는 이 조각상의 양들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 룩셈부르크에 있었던 양 파는 시장의 양들을 상징한다. 현재도 룩셈부르크의 축제를 시작하는 상징으로 양들이 행렬에 참여한다고 하는데 양의 표정에서 장난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런데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의 가운데 손가락이 곧추 세워져 있어서 웃음을 자아낸다. 자세히 보면 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게 손가락이 들려 있다. 이 동상을 만든 작가가 동상 제작 당시 의견이 맞지 않았던 정부 사람들을 향해서 이 손가락 욕을 했다고 룩셈부르크 사람들은 믿고 있다. 룩셈부르크인들의 음악사랑 뿐만 아니라 익살이 함께 느껴지는 재미있는 청동상이다. 시내의 번화가 한복판에 이런 동상을 버젓이 세운 그들의 여유가 놀랍기만 하다. 

나는 '양들의 행진' 분수에서 뤼 드 포세 거리(Rue du Fossé)를 따라 계속 남쪽으로 걸어갔다. 뤼 드 포세 거리 끝에 룩셈부르크 구시가 어디에서나 보이는 성당의 첨탑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당에 거의 다 와서 머리를 들어 올려다보니 높고 높게 세워진 첨탑의 맨 위에 조그마한 새 모양의 앙증맞은 풍향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양들의 행진' 분수와 같이 성당 장식물에도 룩셈부르크 사람들의 여유가 느껴져서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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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르담 성당. 가톨릭 국가인 룩셈부르크의 대표 성당으로서 고딕의 보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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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룩셈부르크 사람들의 여유와 낭만이 성당에는 어떻게 나타나있는지 궁금한 마음을 안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대칭을 이루는 2개의 첨탑과 함께 건물 입구 파사드(façade) 위에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첨탑이 1개 더 세워져 있었다. 높이도 다르고 첨탑을 받치는 지붕의 모습도 완전히 달라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첨탑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균형 잡히고 위엄있는 성당의 모습을 과감히 던져버린 성당의 외관이 역시 룩셈부르크의 성당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성당은 룩셈부르크의 가톨릭 신앙을 대표하는 노트르담 성당(Cathedrale Notre-Dame)이다. 높은 첨탑을 포함한 성당의 매력적인 외관은 고딕의 보물로 평가받고 있다. 일단 멀리 떨어져서 성당을 보니 고딕의 보물답게 시원스럽게 하늘로 뻗은 기둥들이 장엄하다. 1621년에 예수회에서 세운 이 성당은 전체적으로는 고딕 건물이지만 성당의 입구 부분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육중하고 탄탄하게 만들어져 있다. 분명히 나중에 가져다 붙였을 정문이지만 간결한 고딕 양식과도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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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도서관. 예수회에서 건립한 성당 옆 도서관은 현재 국립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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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 마리아상. 성당 파사드의 오랜 석상들 앞에 선 성모는 순백색으로 순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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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을 세울 당시 가톨릭 교단의 예수회에서 성당 입구 왼쪽에 대학 역할을 하는 도서관을 만들었는데 이 역사적 건물은 현재도 성당 옆에 붙어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나는 도서관을 지나 성당 입구로 걸어갔다. 성당의 입구 중앙에는 순백색이 성스러워 보이는 성모상이 서 있었다. 사암으로 만들어진 이 성모는 아기 예수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듯 예수의 얼굴을 앞으로 돌린 채로 두 손을 들고 서 있었다. 성모상 바로 뒤의 석상들은 세월의 이끼가 끼여 누렇고 검지만 이 성당의 주인공인 성모상만은 최근에 만들어 모셨다. 그래서인지 이 성모상은 눈에 띌 정도의 순백색을 자랑한다.

역시 룩셈부르크 인들의 자유분방함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성당건축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새 성모상을 만들어 성당 입구 중앙에 배치한 것이다. 게다가 성모 품에 안긴 아기예수는 한쪽으로 다리를 꼬고, 가슴은 앞으로 내민 채로 천진난만하게 손을 벌리고 있다. 엄숙한 성당에서 아기 예수님을 이렇게 정말 아기의 모습으로 묘사한 자유로움이 놀랍기만 하다.

성당의 손잡이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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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정문 손잡이. 천사상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오랜 세월 속에 반질반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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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에 달린 손잡이는 날개 달린 청동 천사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문을 열 때 사용한 손잡이라서 청동의 푸른색은 모두 벗겨지고 마치 황금으로 만든 듯 노란빛으로 반질반질 빛나고 있다. 두 손잡이 중 유독 오른쪽 손잡이가 완벽한 황금색으로 빛나는데 이는 성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오른손잡이가 많기 때문이다.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살짝 밀어보았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문을 닫은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돌아서서 한참을 걸어가는데 뒤에서 중국인들이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중국인 2명이 성당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말 상대가 없어서 심심하던 나는 간단하게 영어로 몇 마디 물어보았다.

"성당 안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들은 중국인들답게 거침없이, 약간 높은 목소리로 나에게 알려주었다.

"저 문 열려 있어요. 좋은 성당이야. 그런데 우리 일행은 어디 갔지?"

나는 다시 성당 앞으로 가서 청동문을 힘껏 밀어보았다. 방금 전과는 달리 성당문이 조용히 열리기 시작했다. 워낙 무거운 청동문이라서 힘껏 문을 밀어야 했던 것이다. 시끄러운 중국 관광객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성당 밖으로 나온 덕분에 나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 성당의 실내는 넓고 웅장했다. 룩셈부르크 노트르담 성당은 한 나라 수도의 대표적인 종교 시설다웠다. 나는 가톨릭 성당의 경건함에 이끌려 성당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거대한 성당들에서 느껴지는 압도적 근엄함보다는 깨끗하게 잘 보존된 성당의 산뜻함이 느껴졌다. 이 성당은 윤택한 도시에 있는 기품 있고 좋은 성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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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내부. 원형 문양이 반복되는 기둥이 화려하면서도 육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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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천장은 여러 개의 아치를 한곳에 모아 쌓은 구조가 계속되고 있었다. 힘을 분산시키는 아치가 수없이 이어지고 있어서 높고 높은 고딕건물이 잘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천장을 받치는 육중한 기둥에는 반복되는 동심원 문양이 장식되어 있었다. 성당의 기둥이 다른 성당에 비해 화려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스페인 르네상스식 기둥 조각 때문이다. 천장과 기둥만 보아도 이 노트르담 성당은 온갖 정성을 들여서 만든 성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치형 천장에서 이어지는 벽면에는 벽에 바로 성화를 그렸고, 스테인드글라스 주변 벽면에는 액자에 담긴 성화들이 걸려 있다. 성화는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마치 수많은 LCD 화면이 연이어 있는 비디오 아트처럼 눈이 황홀하다. 역시 그림이나 사진이나 눈에 가득 찰 정도로 크기가 커지면 시각적 효과가 더 커지는 것 같다.

성화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당의 유물관 입구에 있는 모자이크 성화다. 황금색 바탕에 파스텔 톤으로 그려져 있어서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 성화이다. 이 성화에는 요셉(Joseph)이 성모 마리아가 수태고지(受胎告知) 후에 낳은 아기 예수를 조용하고 단정하게 안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친 부자지간처럼 평화로워 보인다. 성모 마리아의 성당에서 마리아가 아닌 요셉이 안고 있는 아기 예수님이라! 성모의 성당에 그 남편이었던 요셉을 예수님과 함께 그린 룩셈부르크인들의 자유분방함이 여기에서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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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 성모상. 잘 장식된 드레스를 입은 성모상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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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드글라스에 둘러싸인 성당 제대(祭臺)의 모습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스테인드글라스 외에 다른 장식물은 없고 제대 중앙에 성모상만이 마치 한 지점을 강조하듯이 작게 모셔져 있다. 성모 마리아는 혼자 있지는 않고 역시 아기예수를 안고 있다. 제대에 모셔진 성모 마리아는 마치 인형같이 예쁜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있다. 힘든 여정을 살고 간 성모 마리아를 위해 정성껏 치장해 주고 싶은 룩셈부르크인들의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 룩셈부르크 성당의 제대에 모셔진 성모는 마치 천사같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룩셈부르크의 대표 성당답게 이곳에서는 국가적으로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국가의 공식적인 의식이 펼쳐진다. 룩셈부르크를 다스리는 대공 가문이나 주요 인사의 결혼식, 장례식 등이 이곳에서 개최된다. 룩셈부르크의 전 국가원수였던 장 대공(Jean, Grand Duke)과 벨기에 공주인 조세핀 샬롯(Josephine Charlotte)의 결혼식도 이 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한 국가 안에서 국민들이 믿는 종교가 동일하고 이렇듯 대표적인 종교시설이 구심점 역할을 하는 모습도 국민이 단결하는 측면을 생각하면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노트르담 성당 내부에 펼쳐진 깔끔하고 산뜻한 스테인드글라스는 다른 성당에 비해 상당히 돋보이는 수작이다. 제대 위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룩셈부르크 대공 가문의 상징인 왕관을 쓴 사자가 힘차게 발을 벌리고 있다. 이 성당이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성당이지만 이 나라는 대공 가문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상징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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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인드글라스. 세련된 색상에 간결한 그림이 매우 현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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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한 묘사를 생략하고 대담하다고 느껴질만큼 간결하게 처리한 그림들이 놀랍기까지 하다.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초에 다시 디자인된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하지만 당시를 고려해도 색감이 세련되고 그림의 묘사도 너무나 현대적이다. 유럽의 수많은 성당을 보았지만 이토록 스테인드글라스의 그림들을 현대 회화같이 대담하게 그린 성당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성당의 제대를 포함하여 성당의 측면, 그리고 파이프오르간이 있는 성당 입구의 모든 스테인드글라스를 유심히 둘러보았다. '노트르담(Notre-Dame)'이라는 이름 자체가 프랑스어 존칭으로서 가톨릭의 성모를 뜻하는 것이니, 이 성모 성당 안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자세히 보면 다양한 모습의 성모 마리아가 있다. 성당의 모든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모 마리아의 연대기를 묘사하듯이 성모 마리아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안고 있었던 아기 예수는 결국 제대 뒤의 스테인드글라스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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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실의 여인. 룩셈부르크 여인들이 조용하고 차분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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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룩셈부르크에서는 가톨릭이 국가의 중심 가치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노트르담 성당의 영향력은 강력하며 성모 마리아를 향한 룩셈부르크인들의 신앙심도 독실하다. 내가 성당을 둘러보는 중에도 노트르담 성당의 성모 마리아 앞에서는 룩셈부르크인들의 절실한 기도가 계속되고 있었다.

성당 안의 작은 기도실에서는 두 여인이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이 여인들은 신심을 다해 기도를 올리고 있고, 그들을 둘러싼 성당 안은 쥐 죽은 듯이 적막 속에 휩싸여 있다. 사람들이 성당 안을 걷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특정 종교에 심취해 있지 않은 나지만, 성모를 향한 그들의 마음에서 강한 진정성이 느껴졌다. 왠지 이 성당 안에서는 걸음을 빨리 해도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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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의 야경. 밤이 되면 성당 주변 나무에 아름다운 조명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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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당 안의 기도의자에 잠깐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성당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저녁의 성당 앞에는 푸른빛이 도는 흰 조명이 어둠 속에서 무리를 지어 빛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성당 앞의 아름드리 나무들을 둘러싸고 있는 조명이다. 저녁시간의 조명쇼는 마치 가톨릭 신자들이 손을 들어 성모를 찬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해는 완전히 졌다. 나는 놀라운 체험을 해준 룩셈부르크 구시가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해가 지자 룩셈부르크 구시가를 움직이는 바람도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옷깃을 세우고 다시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