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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고개에서 본 고령군 대가야읍 전경. 읍내 뒤편으로 주산과 주산 능선의 대가야 고분군이 보인다.
 금산 고개에서 본 고령군 대가야읍 전경. 읍내 뒤편으로 주산과 주산 능선의 대가야 고분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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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터널을 지나는 새 도로가 나서 통행량이 많이 줄었지만 본래 대구에서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으로 들어가는 주된 길은 금산재였다. 금산재는 비단(錦)같이 아름다운 금산(錦山) 289m를 넘어가는 고개이다. 금산재를 허위허위 넘으면, 대가천·소가천·안림천·용담천 등이 모여(會) 큰 물줄기(川)를 이룬 회천(會川)이 잠시 후면 만날(會) 낙동강을 바라보며 발밑을 흘러간다. 회천 바로 너머에는 대가야읍이 310m 주산을 베개 삼아 둥지를 틀고 있다. 

회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경북 고령 일원은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이 모이는 요지였다. 대가야 때 이곳에 조선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하여 세워진 빗돌(읍내 고아동 벽화고분 앞)과 고령향교 옆 대가야 궁성지 표시 빗돌(사진 오른쪽)의 모습
 회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경북 고령 일원은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이 모이는 요지였다. 대가야 때 이곳에 조선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하여 세워진 빗돌(읍내 고아동 벽화고분 앞)과 고령향교 옆 대가야 궁성지 표시 빗돌(사진 오른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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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금산은 망산(望山)이라는 이름도 가졌다. 초병들은 이 산 정상에서 망을 보다가 침략군이 오면 회천 너머 주산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임금(主)이 머무르는 주산(主山) 아래에 대가야 궁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산에는 망산 초병들의 외침소리를 듣는(耳) 산이라는 뜻에서 이산(耳山)이라는 별칭도 생겼다.

하지만 망산 초병들이 미처 소리를 지르지 못한 날도 있었다. 562년(진흥왕 23), 이사부를 대장으로 한 신라 정병이 대가야 정벌에 나섰다. 선봉장은 불과 15∼16세에 지나지 않는 소년 화랑 사다함이 자임했다. 사다함은 대가야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못한(不意)' 때에 전단량(旃檀梁, 성문)을 들이쳤다. 대가야 사람들은 놀라 허둥대기만 할 뿐 막을 엄두도 못 내었다(驚動不能禦). 이사부의 대군은 대승을 거두었고, 그 길로 대가야는 멸망했다.

<삼국사기>는 사다함 군의 공격에 대한 대가야 사람들의 반응을 '불의(不意)'로 표현하고 있다. 주산 아래 궁성을 지키던 대가야 군이 사다함 군의 움직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또 파악하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주산 경비병들이 회천을 건너오는 신라군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사다함이 밤비가 쏟아지고, 회천에 안개가 짙게 서린 때를 공격 일시로 선택했다는 뜻이다. 물론 회천 넘어 궁성보다 훨씬 접근하기 쉬운 망산의 대가야 초병들은 사전에 일찌감치 제거했을 터이다.

아득한 선사 시대에도 이미 주산 아래 회천 강변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고령군 대가야읍 장기리의 암각화. 국가 보물 60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득한 선사 시대에도 이미 주산 아래 회천 강변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고령군 대가야읍 장기리의 암각화. 국가 보물 60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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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고령군 일원의 고대 국가 반로국(대가야의 전신)은 지금의 대가야읍 자리, 즉 회천 너머가 아니라 금산과 회천 사이에 터를 잡았다. 강변을 따라 넓게 펼쳐져 있는 옥토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은, 사다함의 기습군이 주산보다 망산을 먼저 친 예에서 보듯, 외적의 침입에 무방비로 노출된 지형이었다. 결국 반로국은 회천을 천혜의 방어선으로 삼기 위해 물 건너 주산 아래로 중심지를 옮겼다. 그래도 대가야는 뒷날 통일신라로 발전하는 강국의 공격 아래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금산재를 넘어 회천 강변으로 내려간 사다함 군은 강 건너 대가야 궁성에 대한 공격 준비로 부산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도 대가야읍 장기리 532 회천 물가에는 보물 605호 암각화가 있었다. 사다함 군은 그 암각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울산 천전리 서석(書石, 국보 147호)의 선사시대 암각화 사이에 진흥왕의 아버지가 글자를 남겨놓은 것을 보면, 사다함의 시대는 아직 암각화에 대한 인식이 없던 때였다.

도진리 사람들, 임진왜란 때 모두들 창의

낙락당
 낙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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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비 6m,  높이 3m의 거대한 바위에 동심원 등 29개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이곳의 암각화 유적은 장기리 일원이 선사인들의 제사 장소였다는 사실을 추정하게 해준다. 금산 아래 장기리, 양전리 일대가 아주 옛날부터 사람들의 밀집 거주지였음을 증언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것을 빼앗아 종족의 번영을 구가한 청동기 시대 이래 사람이 많은(都) 곳에는 늘 전쟁이 일어났다. 회천과 낙동강이 만나는(會) 까닭에 도회(都會)가 형성되기에 아주 적합한 지점이었던 이곳은 사다함 군만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일본군이 몰려오는 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령군 우곡면 도진 1길 27 낙락당(樂樂堂) 앞의 안내판도 이 일대가 왜적 출몰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낙락당 박택(1521∼1566)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40년 건립한 이 재실의 안내판에는 '선생의 장자(長子)인 양죽당(養竹堂) 박정완(朴廷琬)은 임진왜란 시 창의하여 낙동강을 왕래하는 왜선을 공략했고, 무계 전투와 개산진 승첩에 공이 많았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다. 박택의 장남 박정완이 임란 때 '낙동강을 왕래하는 왜선'을 공격했다는 기록이다. 마을이름 도진의 진(津)이 나루를 가리키는 것은 물론이다.

죽연정사 안내판

원래는 마을앞 냇가에 죽연정(竹淵亭)이라는 목루각(木樓閣, 나무로 지은 큰 정자)이 있어서 죽연 박윤 선생, 남명 조식 선생, 낙천 배신 선생,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선생,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현감, 월오(月塢) 윤규(尹奎) 진사가 만나서 도의를 강마(講磨, 토론하고 연마함)하며 음풍농월(吟風弄月, 바람을 읊고 달을 희롱, 자연을 즐김)하셨던 곳이며, 정자 뒤에는 대숲이 울창하였고 앞에는 호수가 있으며 호수에는 청룡산과 소학산의 그림자가 흰 구름과 함께 배회하며 물고기가 뛰놀아 그 경관을 두고 옛날부터 소동정호(중국 소동파가 놀던 호수)라 하였다.

그러므로 인근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고 소인묵객(騷人墨客, 풍류를 아는 사람)들이 즐겨찾던 곳이었다. 1920년 대홍수로 기반이 허물어졌던 것이 다시 병신년 홍수로 도괴(倒壞, 무너짐)되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문중에서는 1939년 현 위치에 새로 지어 이름을 죽연정사로 했다.

죽연 선생은 선조 조(朝, 왕의 재임 기간)에 효행으로 복호정려(復戶旌閭, 세금이나 부역을 면제해주고 붉은 비각을 지어줌)되시고 효행비(효자의 덕행을 기려 세운 비)가 있으며 장손(長孫, 맏손자)인 박원갑(朴元甲)은 임란 창의(의병)로 공이 많았다.

박정완(1543∼1613)은 김면, 곽재우와 더불어 임진왜란 3대 의병장으로 일컬어지는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이다. 박정완은 왜란이 발발하자 동생 박정번(朴廷璠)과 함께 가동(家僮, 집의 종)들을 이끌고 개산포 전투, 무계 전투에 참전한다. 그는 박정번과 더불어 이들 전투에 크게 기여했고, 전공을 인정받아 뒷날 거창 현감, 안음 현감을 역임한다.

박정완의 동생인 박정번(1550∼1611)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곧 창의하여 김면 진영에서 작전 계획을 세우는 참모로 활동했다. 그는 개산포 전투를 사실상 주도했고, 정유재란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에 입성했다. 예빈시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종전 이후 문연서당(文淵書堂)을 열어 후학들을 육성했다.

그런가 하면, 낙락당 바로옆의 죽연정사(竹淵精舍) 안내판에도 도진리 선비의 창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자 주인 박윤(朴潤, 1517∼1572)의 '장손(長孫, 맏손자) 박원갑(朴元甲)은 임란 창의로 공이 많았다'는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박원갑(1564∼1618)은 경상우도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김면과 함께 창의했고, 정유재란 때에는 곽재우, 박정번과 함께 화왕산에 입성하여 의병 활동을 했다.

죽연정사
 죽연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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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연서원 유허비 앞 안내판

(문연서원은) 문연서당 구지(舊地)에 인조 14년(1636) 사림(士林) 영건(營建)되어 죽연(竹淵) 박(朴)선생 윤(潤), 낙락당(樂樂堂) 박선생 택(澤), 월오(月塢) 윤(尹)선생 규(奎), 학암(鶴巖) 박선생 정번(廷璠), 매헌(梅軒) 최(崔)선생 여설(如契) 오현(五賢)을 배향(配享)하고 (중략) 233년 간이나 존속하였던 바 고종 5년(1868) 서월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터에 오현의 후손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아, 저 무초(茂草)유허(遺墟)가 73년이 되었도다. 이제 만약 그 터를 버려두고 표(表)를 아니하면 후래(後來) 사람들이 문연(文淵)에 대하여 누가 당시의 성거(盛擧)를 알리오?" 한즉 모두가 "옳다!"고 찬동하였다. 이에 최순곤(崔淳崑), 박중열(朴仲烈), 박우열(朴瑀烈), 박재희(朴在禧), 박인회(朴仁會), 박의회(朴義會)가 대표가 되어 임정 2년(1940)에 수비(竪碑)하였고 비문(碑文)은 정종호(鄭宗鎬)가 지었다.

정사 안내판에는 언급이 없지만 내용에 등장하는 윤규(尹奎)도 왜군과 싸우다가 1593년 순국한 인물이다. 윤규의 순국 사실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된 문연서원(文淵書院) 터의 '문연서원 유허비(遺墟碑)' 안내판에 쓰여 있다. 또 도진리 마을 안 모현정(慕賢亭, 별칭 문연재, 고령박씨 죽연종가 사랑채) 안내판에도 문연서원 유허비의 인물 중 한 사람인 최여설(崔如契)이 왜란 때 전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소개되어 있다. 

문연서원 유허비는 대가야읍에서 67호 지방도로를 따라 들어가 우곡면 소재지인 도진리에 거의 접근했을 때, 도진교 직전 왼쪽 도로변에 나란히 건립되어 있는 도계 박기언공 교행비(桃渓朴基彦公教行碑), 증 숙인 함안조씨 정려유적비(贈淑人咸安趙氏旌閭遺蹟碑), 증 이조참판 양죽당 박공 기적비(贈吏曹参判養竹堂朴公紀蹟碑), 죽연 박선생 효행정려 유허비(竹淵朴先生孝行旌閭遺墟碑)의 뒤편에 세워져 있다. 67호 도로는 이들 빗돌들과 회천 사이를 지나간다.

도진리 전경. 임진왜란 때 도진리 사람들은 마을 뒷산에 도진리산성을 쌓고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다.
 도진리 전경. 임진왜란 때 도진리 사람들은 마을 뒷산에 도진리산성을 쌓고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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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에는 도진리(桃津里)에서 직접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1592년과는 달리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완전히 점령한 후 북상하려 했다. 이 계획에 따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1만 대군이 (경남) 의령과 삼가를 거쳐 (경북) 성주 방면으로 북상했다. 이때 일본군은 배를 타고 낙동강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1597년(선조 30) 8월 초 일본군은 고령 일대까지 진입했다. 일본군은 (대구 달성군) 화원 일대를 분탕질한 후 (경북 고령) 무계진(茂溪津)에 진을 쳤다. 구미 금오산성에 총지휘부를 두고 있던 도체찰사 이원익은 장군 정기룡에게 기병 150명과 보병 800명을 주어 고령의 적을 치게 했다. (<포로로 잡은 적장의 가짜 편지로 얻은 '둔덕 대첩'> 기사 참조)

정기룡 군, 도진리에서 일본군과 직접 결전

무계진의 일본군들은 낙동강을 건너기 위해 수심 측량에 들어갔다. 적들이 물 깊이를 재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정기룡은 그들이 밤을 틈타 덕산으로 건너오리라 예측했다. 정기룡은 군사들을 산과 숲에 잠복시켰다. 협공 작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적선들이 나타나자마자 명나라 노득룡(盧得龍) 군대가 성급히 발포를 하는 바람에 일본군 나룻배들은 눈치를 채고 모두 돌아서버렸다.

정기룡은 날쌘 병사들로 조직된 타격대를 이끌고 샛길로 도진리에 도착했다. 아군은 강 양쪽 기슭에 매복하고 적들을 기다렸다. 이윽고 수십 척 배에 나누어 탄 일본군들이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 아군은 회천 양쪽에서 불화살을 퍼부어 적 수백 명을 죽이고 다치게 만들었다. 전투가 불리해지자 나머지 왜군들은 (고령) 안림역으로 회군했다.

도진리 앞 회천의 겨울 풍경. 지금은 물이 많이 말라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큰 배들이 다닐 만큼 수량이 풍부했고, 왜적들이 배를 타고 이동한 주요 통로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일본군들은 이곳에서 정기룡 군에게 크게 패했다.
 도진리 앞 회천의 겨울 풍경. 지금은 물이 많이 말라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큰 배들이 다닐 만큼 수량이 풍부했고, 왜적들이 배를 타고 이동한 주요 통로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일본군들은 이곳에서 정기룡 군에게 크게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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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도진리 청룡산 백마덤
 임진왜란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도진리 청룡산 백마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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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리에는 백마덤을 둘러싼 임진왜란 전설도 전해진다. 백마덤은 도진리 왼쪽에 있는 청룡산 끝자락의 절벽 이름이다. 굳센 바위투성이의 이 절벽은 햇빛을 받아 반사되면 하얀 말 모습으로 보인다. 그래서 흰덤 또는 백마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백마덤 아래 회천 강변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의 접전지였다. 의병을 일으킨 도진리 사람들은 청룡산으로 적을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지휘를 맡은 대장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한 청년 장수였다. 아무 말도 못하는 채 줄곧 눈물만 흘리는 아내에게 장수는 "저 청룡산의 덤이 계속 하얗게 남으면 내가 살아 있고, 만약 까맣게 변하면 내가 죽은 줄로 아시오" 하고 말한 뒤 군사들과 함께 전장으로 나아갔다.

젊은 아내의 눈물을 뒤로 하고 청년 장수는 싸움터로

혈전이 벌어져 밤낮으로 싸움이 진행되었다. 다행히, 전투 도중에도 철룡산의 하얀 절벽은 빛을 잃지 않고 줄곧 백색으로 빛났다. 아내는 적이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을 모두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때 칼이 부딪히고 조총 난사음이 멎더니 벽력같은 말발굽 소리가 났다. 말을 휘달려온 남편이 아내 앞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뜨겁게 포옹했다.

지금도 도진리 청룡산의 백마덤은 변함없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나라의 위기를 맞아 서로 앞다투어 의병을 일으켰던 도진리 사람들의 올곧은 의기 또한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박정완, 박정번 등 도진리 선비들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격파했던 (고령) 개진포의 풍경(사진, 왼쪽), 도진리 뒤 청룡산에서 바라본 개진표 방향의 풍경
 박정완, 박정번 등 도진리 선비들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격파했던 (고령) 개진포의 풍경(사진, 왼쪽), 도진리 뒤 청룡산에서 바라본 개진표 방향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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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임진왜란, #도진리, #박정완, #박정번, #박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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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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