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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가 잠시 주춤하자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 앞으로 유빙이 몰려왔다. 해빙기가 되면 강에서 내려오는 유빙이 더 많이 몰려 온다고 한다.
▲ 교동도 사이를 흐르고 있는 유빙 한파가 잠시 주춤하자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 앞으로 유빙이 몰려왔다. 해빙기가 되면 강에서 내려오는 유빙이 더 많이 몰려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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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유빙이다."

기록적인 한파가 잠시 주춤한 지난달 27일 인천광역시 강화도 북서쪽에 위치한 교동도 남선포 선착장에는 수 만개의 유빙들이 몰리면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석모도와 강화도 사이의 좁은 해역 탓에 빠르게 움직이는 유빙은 그 크기가 제각각이지만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면서 큰 것은 지름 20m가 넘어 보이는 것도 있었다.

교동도 토박이이자 향토역사문화전문가인 한기출 교동문화보전위원장(65)은 "유빙들끼리 서로 합쳐져 가운데는 낮고 가장자리가 높아지는 것이 특징"이라면서 "강에서 얼음이 풀릴 때가 되면 더 많은 유빙이 떠내려 온다"고 말했다. 교동도를 찾은 것은 SBS '물은 생명이다'의 섬 역사문화생태 기행 촬영을 위해서다.

교동도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섬이었다. 강화도의 일부라고 인식되기도 했다. 2010년 3월 KBS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서 소개 되면서부터 유명세를 탔지만, 2014년 7월 연육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아, '섬 속의 섬'으로 불렸던 곳이다. 참고로 '1박2일' 방송 당시 교동도 이야기는 분당 최고 시청률 43.3%로서 역대 최고였다고 한다.

교동도(僑桐島)는 한자로만 보면 '키 큰 오동나무 섬'이란 뜻이다. 한기출 위원장은 "먼 바다에서 보면 구름과 안개 때문에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섬처럼 보여서 그리 불렸을 것"이라 해석했다. 서해 섬 전문가인 장정구 인천녹색연합 정책위원장(45)은 "식물학자에 따르면 교동도는 오동나무가 살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면서 "향교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전국적으로 향교가 있는 곳 지명이 주로 '교동(校洞)'이라 불렸는데, 중국에서 향교가 가장 먼저 전래된 곳이 교동도라는 점에서 섬 이름(한자만 변화돼서)도 그리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물론 이견도 있다) 남선포 선착장에는 중국으로 오고 가는 사신들의 숙소인 '동지원'이 있고, 지금은 콘크리트에 의해 사라졌지만, 사신을 위한 전용 돌계단도 있었다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던 교동도

고려와 조선시대 교동도는 유배지로 사용됐는데, 많은 군사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감시가 편리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사진은 교동도 화개산 중턱에 위치한 연산군 유배지 재현 공간이다.
▲ 연산군 유배지 고려와 조선시대 교동도는 유배지로 사용됐는데, 많은 군사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감시가 편리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사진은 교동도 화개산 중턱에 위치한 연산군 유배지 재현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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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는 강화도의 약 1/5 정도 크기지만, 가깝게는 6.25 전쟁부터 멀게는 삼국시대의 역사가 담겨진 곳이다. 현재도 북한과 인접해 해상 및 수도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 잡고 있는데, 교동도에는 그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기출 위원장은 "광개토대왕비에 나온 관미성이 바로 교동도"라 말했다. 관미성은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과 서해의 교두보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지역으로서, 임진강 오두산성이라는 설도 있다. 한기출 위원장은 전문가들의 고증 결과 교동도 내 화개산성이 유력하다고 밝혔다.

고려 시대 때는 간척이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몽골의 침략에 따라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무신 정권은 인구 증가와 장기간 항쟁을 대비해 교동도 갯벌을 매립해 농지를 조성했다. 이 때문에 교동도는 원래 3개의 섬이 하나가 됐고, 다른 섬에서는 보기 드물게 드넓은 평야를 보유하게 됐다. 현재 교동도의 논과 밭은 모두 3300만㎡로서 강화군 내에서 가장 넓은 상황이다.

교동도는 쌀 등 농작물이 잘 되기로 유명하다. 이 섬이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하구에 위치한 까닭에 기름진 퇴적토가 매년 쌓였기 때문이며, 별다른 오염원이 없는 청정지역이라 현재까지도 알아주는 농작물이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장정구 위원장은 "교동도에서 한 해 생산되는 쌀은 인천 사람들 모두를 몇 년 동안 먹이고도 남을 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갯벌을 매립한 농경지에는 '둠벙'처럼 물을 담아 둘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됐는데, 빗물과 지하수를 직접 퍼올려야 했다. 사진은 교동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물꽝'의 모습이다.
▲ 교동도 '물꽝' 갯벌을 매립한 농경지에는 '둠벙'처럼 물을 담아 둘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됐는데, 빗물과 지하수를 직접 퍼올려야 했다. 사진은 교동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물꽝'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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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라 농경문화가 발달했다. 인공으로 조성된 낮은 평야지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물꽝'이다. 물꽝은 '물을 담아 두는 저수지'를 말하는데, 논이나 밭 일부 지역에 물이 고이도록 만든 '둠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전기로 지하수를 끌어 올리지만, 1950~1960년대까지만 해도 나무로 깎아서 만든 '용두레'를 써서 물을 일일이 퍼올렸다.

1970년대에는 염전에서 쓰던 회전식 수차인 '무자위'를 동원에 빗물과 지하수를 퍼 올렸다. 고된 노동으로 기력이 떨어질 때면, 물꽝 속에 자리를 튼 뱀장어, 가물치, 잉어, 붕어를 잡았다. 한기출 위원장은 "마을 사람들이 물꽝 별로 돌아가면서 물고기를 잡아 기력을 보충했다"면서 "(이를 통해) 마을 공동체가 단합할 수 있는 계기도 됐다"고 말했다.

교동도는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이 잦아 군사들이 항시 주둔했고, 조선시대 때는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의 '삼도수군통어영'이 자리 잡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수도방위해군사령부라 할 수 있는데, 현재 섬 곳곳에서는 수군의 흔적이 산재해 있다. 이는 교동도가 그만큼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향민들의 삶의 터전이 된 교동도

대룡시장에는 196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 교동도 대룡시장 벽화 대룡시장에는 196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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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또한 고려, 조선시대 왕족과 귀족의 유배지로도 사용됐다. 대표적으로 조선조 연산군의 유배지가 화개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한기출 위원장은 "교동도가 유배지로 사용됐던 이유는 군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다시 말해 군사들이 유배온 이들을 일상적으로 감시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교동도는 한국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원래 이곳은 여타의 섬답게 연안어업이 발달했다. 바다 어종과 함께 뱀장어, 황복, 숭어 등 고가로 거래되는 회유종 어종이 민물로 올라가는 입구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한기출 위원장은 "교동도에는 '죽산포'라고 있는데, 포구에 정박된 배의 돛대들이 마치 대나무가 산을 이룰 정도라는 의미"라면서 "그만큼 많은 어선들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남과 북의 분단은 높은 철조망과 함께 민간인통제구역을 형성케 했다. 그 때문에 교동도는 선박 출입이 제한돼 어업(맨손어업 포함)이 발달할 수 없게 돼 '섬 아닌 섬'으로 살아가야 했다.

또한 교동도는 피난민의 애환이 깊게 스며든 곳이다. 이곳에는 황해도 연백군에서 피난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들이 3만여 명에 달했다. 현재 교동도 인구가 3천여 명인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피난민 규모는 10배 이상이다. 피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생계를 위해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의 모습을 재현한 시장을 열었다.

'1박2일'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탄 대룡시장은 황해도 연백군 피난핀들이 고향인 연백시장을 재현해 조성된 곳이다. 현재도 좁은 골목길을 두고 오래된 낮은 건물이 늘어서 있어 1960년대를 연상시키고 있다.
▲ 교동도 대룡시장 '1박2일'에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탄 대룡시장은 황해도 연백군 피난핀들이 고향인 연백시장을 재현해 조성된 곳이다. 현재도 좁은 골목길을 두고 오래된 낮은 건물이 늘어서 있어 1960년대를 연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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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바로 '1박2일'에 소개된 대룡시장이다. MBC 드라마 '전설의 마녀'에서 주인공들의 제빵점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한때 번창했던 대룡시장을 소개하는 안내판에 '시간을 멈춘 교동'이라 쓰여 있다. 무슨 의미일까? 시장은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슬레이트와 양철 지붕 건물이 늘어서 있다. 시장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2층이다.

지붕 바로 밑에는 도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제비집이 있는 등 마치 1960년대 서울 변두리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쥐를 잡자'라는 포스터와 '뻥이요'라는 소리에 귀를 막은 까까머리 아이들 모습 등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벽화도 눈에 띈다. 할머니가 등에 업은 아이에게 국수 가락을 먹여주는 벽화는 어려운 시절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벽화를 촬영하고 있는데, 파마를 위해 머리에 비닐캡을 하신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면서 "정감 있죠"라며 말을 건네주기도 했다.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가 공존하는 교동도

골재가 부족해 옛 성곽의 돌을 빼서 건축 및 도로 골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 교동읍성 남문(홍예문) 골재가 부족해 옛 성곽의 돌을 빼서 건축 및 도로 골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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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교동도의 역사 유적은 크게 훼손됐다. 한기출 위원장은 "이 섬은 퇴적토로 형성된 지형이라 골재로 사용될 돌이 귀했다"면서 "집을 만들 때 옛 성곽의 돌을 빼서 사용했고, 도로를 만들 때도 성곽의 돌을 깨서 골재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현재 교동읍성의 남문인 홍예문 주변 성곽이 일부만 남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기출 위원장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큰 만큼 교동도 내 역사 유적에 대한 보전 방안이 절실하다고 피력했다.

피난민이 몰리면서 산림도 망가졌다. 장정구 위원장에 따르면 현재 교동도 산림은 30~40년 생이 대부분인데, 가옥 건축과 뗄감용으로 산림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마을마다 300~400년 된 큰 나무들이 보존됐다는 것이다. 장 위원장은 "교동도는 농경문화가 발달해, 그늘이 있는 큰 나무들이 필요했고, 그 나무들은 서낭당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다른 나무들은 몰라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나무를 목재와 뗄감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보호수로 지정된 교동면 인사리에 위치한 350여 년 된 느티나무가 대표적이다. 또한 보호수로 지정되진 않았지만 교동읍성 터 내에 있는 300년 넘은 물푸레나무도 있다. 교동도 내에는 대략 40~50여 그루의 큰 나무들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교동도 산림은 건축 자재 및 땔감으로 크게 훼손됐지만, 다행히 마을의 서낭당 역할을 했던 큰 나무들은 보존돼 있다.
▲ 교동도 보호수 교동도 산림은 건축 자재 및 땔감으로 크게 훼손됐지만, 다행히 마을의 서낭당 역할을 했던 큰 나무들은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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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의 드넓은 농경지는 철새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됐다. 장정구 위원장은 "김포평야가 개발되면서 그곳을 찾던 새들이 이곳에 몰리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인근 갯벌에는 전 세계적으로 300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저어새 번식지가 있다. 기자가 교동도 현장을 취재하는 동안에도 머리 위로 큰기러기 떼들이 'V'를 그리며 끊임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교동도는 자연이 만든 역사 속에, 사람이 만든 역사가 녹아든 상태다. 자연과 사람이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가치가 앞으로도 계속 되길 기대해 본다. 교동도에서는 이곳의 역사유적 해설이 진행된다. 매주 토,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운영되는데, 휴일 나들이 삼아 교동도 역사문화를 탐구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청소하고 물 길러 오면서 어깨 너머로 이발 기술 배웠지"

"이발하러 왔습니다."

기자가 '교동이발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이발하러 왔다고 하자 흰 가운을 입고, 얼마 남지 않은 백발을 정성들여 올백으로 넘긴 할아버지가 다정하게 맞아 준다. 사실 준비한 멘트는 "이곳이 '1박2일'에 나와 유명한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이발관이죠?"라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황해도 연백군에서 13살 때 피난온 지광식 할아버지는 반백년 가까이 교동이발관을 지키고 있다.
▲ 교동이발관 지광식 할아버지 황해도 연백군에서 13살 때 피난온 지광식 할아버지는 반백년 가까이 교동이발관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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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곳 교동도에서 반백년 가까이 이발사로 살아온 지광식(76) 할아버지다. 20㎡(약 6평) 남짓의 이발관 내부는 할아버지의 주름만큼이나 오래된 물건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두 개의 전기스토브가 뿜어내는 붉은 빛 때문일까. 허름한 이발관은 사람의 온기처럼 따뜻함이 묻어났다. "이쪽에 앉아요" 할아버지는 기자에게 세 개의 의자 중 가운데를 권했다.

대형 거울에 비쳐진 할아버지에게 "짧게 치진 말아 주세요"라고 했더니, 수건과 흰 천을 기자에게 둘러주면서 "여기는 내 맘대로 잘라"라며 농담을 건넨다. 거울 위쪽에 A4 크기로 할아버지 일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 대여섯 장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서울에 있던 사진학과 학생이 찍어 줬는데, 제법 잘 찍었어"라고 말했다. '1박 2일'에서 은지원씨가 이발 하는 장면도 전시돼 있다.

지광식 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이다. 그는 6.25 전쟁 때 피난온 실향민으로서, 13살 때 가족들과 함께 피난왔다. 할아버지는 가위질을 잠시 멈추고 "처음 피난 나오려고 할 때 북쪽 경비병에게 걸려서 무조건 도망쳤지, 그때는 피난민이 워낙 많아서 경비병들이 일일이 다 잡을 수도 없었어, 그 때문에 1년을 기다렸다가 건너야 했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교동이발관 한 쪽 벽에는 '1박2일' 촬영 당시 사진이 걸려 있다.
▲ '1박2일' 촬영 사진 교동이발관 한 쪽 벽에는 '1박2일' 촬영 당시 사진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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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면 다시 고향에 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무심한 세월은 높은 철조망으로 서로를 나눈 채 그대로 흘러갔다. 교동이발관이 있는 대룡시장에 빈 가게가 늘어나는 것도 타계한 실향민들의 흔적이다. 할아버지는 27살 때 처음 이발관에서 일하게 됐다고 한다. 원래 교동이발관은 연백군 출신 이발사 두 명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당시는 실향민이 많아서 별도로 사람을 써야 했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3년 동안 보조 노릇을 했다. 지광식 할아버지는 "이발학원이 없던 시기여서, 청소하고 물 길러 오면서 어깨 너머로 이발 기술을 배웠지"라고 말했다. 지금이야 지하수를 끌어 온 상수도 시설이 깔려 있지만, 당시는 2km 떨어진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차량이 없던 시절 물지게를 지고 많게는 하루에 열댓 번 물을 길어 오는 일은 젊은 시절 할아버지에게도 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할아버지는 한때 원양어선을 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목재를 수입하는 일을 했는데, 목재가 떠 있는 물속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짧은 선원 생활을 마치고 교동도로 다시 와서 지금의 이발관을 인수했다. 자식들은 이미 서울에 살고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당신의 고향을 조금 이나마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이곳이 편했을 것이다.

지광식 할아버지는 "명절에 자식들하고 산에 가서 '저기가 내가 살던 곳'이라 말해주기도 했지, 얼마 전에 보니까 우리 집이 헐리고 창고가 들어섰어"라고 말했다. 가위질을 계속하면서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의 음성 속에서는 진한 쓸쓸함이 묻어났다.


태그:#교동도, #역사문화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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