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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강조하는 정부와 기업이 부패하는 이유 ①에서 이어집니다.

한국은 '경쟁중독' 사회다. 물론, 모두가 경쟁을 즐기지는 않을 것이다. 경쟁 자체는 좋아하지 않지만, '발전'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발전'이 무엇일까? 개인이 비참해지고 사회가 생지옥이 되는 것? 삶이 어찌 되든 국내총생산(GDP) 수치만 올라가면 '발전'하는 것일까? 발전의 목적은 개인을 비참하게 만들지 않고, 사회를 생지옥으로 만들지 않는 데 있다. 발전이 사람을 위한 수단이지, 사람이 발전을 위한 수단일 수 없다.

성장을 사람 위에 두는 나라를 보면, 대개 잔혹한 독재체제를 겪은 불우한 곳이다. 경제 발전이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과정이 아니라, 부당하게 탈취한 권력을 정당화하고 영속화하는 수단이었던 탓이다. '개발독재'는 개발하기 위해 독재를 하는 게 아니라, 독재를 하기 위해 개발을 한다.

한국은 목적이어야 할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해 온 대표적인 나라다. 개발의 목적이어야 할 국민은 개발의 소모품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민들은 국가에 대해서는 유순하고, 서로에게는 강퍅한 '경쟁기계'로 전락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듯, 최고의 자살률, 최저의 출산률, 최하위의 행복지수다. 경제? 한국 경제는 이미 장기침체의 문턱으로 깊숙이 들어섰다. 경제주체가 불행하다 못해 소멸해가는 나라에서 경제가 잘 돌아갈 수는 없다. 한심하게도 정부는 여기서 더 치열한 경쟁을 주문한다. 우리 사회의 참담한 몰락은 가혹한 경쟁이 낳은 결과이지, 더 가혹한 경쟁이 필요한 이유가 아니다.

목적과 수단을 구분 못하는 정부가 원인과 결과를 구분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 반 세기 동안 국민들을 (말 그대로) 죽도록 경쟁시킨 결과를 빤히 보면서도 그런 헛소리를 한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국민의 불행과 죽음을 방치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 조장해왔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의 몰염치는 아둔함을 넘어 죄악에 가깝다.

'경쟁은 사악하다'고 솔직히 가르치는 사회

아미쉬 어린이의 초상화. 아마쉬는 전통주의적 기독교 공동체로, 경쟁을 배제하고 협력을 강조한다.
 아미쉬 어린이의 초상화. 아마쉬는 전통주의적 기독교 공동체로, 경쟁을 배제하고 협력을 강조한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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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경쟁은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회가 있을까? 있다. '아미쉬(Amish)'를 보자. 이들은 '경쟁주의'의 종주국이라 할 미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독립적인 교육, 경제, 문화체계를 구축해 온 전통주의 기독교 공동체다.

아미쉬는 아이들에게 경쟁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경쟁은 사회 구성원들을 적으로 만들어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경쟁의 극단적 형태인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편을 갈라 다투는 놀이도 최대한 멀리하라고 가르친다. 이들이 교육에서 강조하는 것은 협력이고, 이에 따라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를 찾는다.  

아미쉬는 16세기에 스위스에서 발생한 뒤, 종교적 박해를 피해 18~19세기 경에 미국에 정착했다. 현재 30만 정도가 펜실베니아, 인디애나, 오하이오 등 전국 30개 주에 퍼져 살고 있다. 비록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크지 않지만, 아미쉬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공동체중 하나다.

아미쉬는 최근 들어 미국 주류사회의 모델로도 부각되고 있다. 사진은 2015년 <타임>에 실린 "왜 아미쉬 아이들이 당신 아이보다 더 행복한가"라는 제목의 기사다.
 아미쉬는 최근 들어 미국 주류사회의 모델로도 부각되고 있다. 사진은 2015년 <타임>에 실린 "왜 아미쉬 아이들이 당신 아이보다 더 행복한가"라는 제목의 기사다.
ⓒ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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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쉬는 매년 3% 넘는 인구 성장률을 자랑한다. 2013년 기준으로 미국의 전체 인구 증가율이 0.7%이고, 한국은 0.4%라는 점을 생각하면 '폭발적 성장'이라 할 만하다. 출산률이 높은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이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아미쉬는 모든 청년들에게 외부 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고, 원하면 떠날 수 있게 선택권을 주기 때문이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때 아미쉬 청년들 90% 가까이가 공동체에 남는 선택을 한다. 공교롭게도 이 수치는 나라를 떠나고 싶어하는 한국인의 비율과 정확히 일치한다. 2015년 9월 제이티피시(JTBC)의 설문조사에서 '한국이 싫어서 다른 나라로 이민을 생각해 본 적 있느냐'는 질문에 90%가 그렇다고 답했다.

놀이 중인 아미쉬 어린이들. 아미쉬는 놀이에서도 편을 가르기보다 함께 즐기도록 노력한다.
 놀이 중인 아미쉬 어린이들. 아미쉬는 놀이에서도 편을 가르기보다 함께 즐기도록 노력한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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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하기 위한 공부, 섬기기 위한 공부

아미쉬에 대해 잘못 아는 이들이 많다. 전기를 쓰지 않는다든지, 자동차 등 모든 기술 문명을 거부한다든지 하는 믿음이 그렇다. 그들이 기술을 조심스럽게 취사선택하는 것은 사실이다. 기술이 삶의 방식, 특히 공동체 중심의 생활양식을 해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기술을 채택하기 전에 신중하게 토론을 거쳐 공식적으로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의견 충돌로 인한 갈등이 공동체를 위협할 정도가 되면 차라리 기술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어느 정부와 달리, 수단과 목적을 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이 시간에도 나의 경쟁자는 책장을 넘기고 있다."

한국에서 수많은 학생들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는 '격언'이다. 아미쉬 교사는 학생들에게 "남들보다 앞서가는지는 뒤처져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배운다. 학생이 잘 했는가도 별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최선을 다 했는가와, 배운 지식을 공동체를 위해 쓰는지 여부다.

당연히 교사는 우등생을 중심으로 수업을 이끌지 않는다. 남들보다 빨리 배운 학생은 속도를 늦춰 다른 학생들을 돕는다. 앞서가는 소수에게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 대다수를 '뒷발 잡는 열등생'이나 '평균 깎아먹는 버러지'로 만드는 한국과는 차이가 있다.

아미쉬 학교의 교실. 칠판 옆에 "중요한 것은 남보다 앞서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 하는 것"이라고 쓰여있다.
 아미쉬 학교의 교실. 칠판 옆에 "중요한 것은 남보다 앞서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 하는 것"이라고 쓰여있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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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쉬 교실 출구에 "나가서 섬기라"고 쓴 푯말이 보인다. 아래에는 "와 줘서 고맙다"고 쓰여 있다.
 아미쉬 교실 출구에 "나가서 섬기라"고 쓴 푯말이 보인다. 아래에는 "와 줘서 고맙다"고 쓰여 있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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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돕고 배려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인 나라와, 싸워서 이기라고 가르치는 것을 '교육'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교실의 '급훈'도 다르다. 내가 본 아미쉬 교실의 입구에는 "들어와서 배우라"라는 팻말이, 나가는 문에는 "나가서 섬기라"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한국에서는 2015년 한 문구업체가 "10분만 더 공부하면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등의 글귀를 넣은 상품을 판매했다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당했다. 하지만 이 문구들은 몇몇 학교 교실에 실제로 걸려있던 '급훈'이었다.

떠나고 싶은 사회와 머물고 싶은 사회

10명 중 9명이 떠나고 싶은 사회와, 10명 중 9명이 머물고 싶은 사회에는 어떻게 다를까? 둘 모두 무리를 지은 '집단'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일까? 하나는 '지배'와 '탐욕'을 중심에 둔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공감'과 '배려'를 중심에 둔 집단이라는 차이가 있다.

얼핏보면, '지배'와 '탐욕'은 사람의 자연적 본능에 속한 것 같고, '공감'과 '배려'는 높은 도덕이나 고귀한 이상에 속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큰 착각이다. 생물학자인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침팬지 정도의 지능을 지닌 동물에게는 '도덕적 본능(moral instincts)'이 내재돼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람을 포함한 영장류는 공감의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남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군집 동물에게 '배려'는 곧 자신의 생존을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생물학자 프란스 드 발은 도덕이 자연적 기원을 갖는다고 말하며, 이를 '도덕적 본능'으로 부른다.
 사람을 포함한 영장류는 공감의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남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군집 동물에게 '배려'는 곧 자신의 생존을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생물학자 프란스 드 발은 도덕이 자연적 기원을 갖는다고 말하며, 이를 '도덕적 본능'으로 부른다.
ⓒ Matthew Hoels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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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본능'이란 남을 배려하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이다. 군집 동물은 혼자 살 수 없기에, 남이 고통 받거나 죽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이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을 포함한 영장류는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공감'을 본능적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배려는 타인에 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 내가 생존하기 위한 수단이다. 갓 태어난 아이들을 보라. 다른 아이가 울면 따라서 운다. 이것은 먼저 운 아이의 고통에 주목하라는 공감과 연대의 외침이다.

젖먹이가 울 때 근처에 좀 더 자란 어린이가 있다면 어떻게 행동하는가 보라. 안절부절못하며 장난감도 줘 보고, 얼러도 보며 아기를 달래려고 안간힘을 쓴다. 우는 아이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남을 돕고, 남이 나를 도우면 개인은 행복하고, 공동체는 번영한다.

'십알단'과 '아미쉬' 

물론 사람의 본성에는 탐욕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공감과 배려의 본능도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는 탐욕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부추기면서, 공감과 연대는 법과 공권력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탄압해 왔다.

가난한 사람을 국가 제도 차원에서 돕자고 하면 '빨갱이'가 되고, 생존권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 옆에서 함께 구호를 외치면 '3자개입 금지'를 어긴 범죄자가 된다. 예컨대 한국 정부는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을 후원하기 위해 찾아간 '희망버스' 참여자들을 처벌하면서, 정작 '3자인'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해 일방적으로 사용자 편을 들고 노동자에게 몽둥이질을 했다. 역시 '3자'인 검찰과 법원은 '살인적인' 손해배상 판결로 노동자를 죽음까지 내몰고 있다.

한국사회의 경쟁주의는 본능에 속한 게 아니라, 사회 제도에 속한 것이다. 경쟁주의는 국민들의 삶을 파괴하지만, 정부에게는 매우 요긴한 도구다. 서로 싸우기 바쁜 국민들은 한 목소리로 국가에 요구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경쟁주의는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데도 요긴하게 쓰인다. 국민이 고통받는 이유는 그저 개인이 '경쟁력'이 없는 탓이기 때문이다.

아미쉬의 타인 배려와 공동체 중심 교육은 한국사회가 몰락해 가는 이유를 거꾸로 보여주는 거울이다. 물론 소규모 종교 공동체를 국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물어 뜯으며 망해가는 나라를 바로잡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지속적으로 종교의 영향을 받아왔다. 종교지도자들은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일부 교계는 정당까지 만들어 현실정치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특히 보수 개신교는 '뉴라이트' 같은 우익정치 세력의 산파 역할을 했고, 일부는 '십알단' 같은 불법적 수단까지 동원해 가며 대통령 선거에 깊숙이 개입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아미쉬는 훨씬 선한 통찰력을 준다. 그들은 공감과 배려를 삶 속에서 구현해 왔을 뿐 아니라, '정교분리'라는 민주적 상식도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한 아미쉬 농민이 밭을 갈고 있다. 아미쉬는 단순한 삶을 위해 기술을 선별적으로 사용하지만, 구성원들의 삶의 만족도는 매우 높다.
 한 아미쉬 농민이 밭을 갈고 있다. 아미쉬는 단순한 삶을 위해 기술을 선별적으로 사용하지만, 구성원들의 삶의 만족도는 매우 높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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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아미쉬, #경쟁, #배려,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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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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