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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하여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과 함께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1년간 <사람들>은 네 번의 프로젝트를 거치며 해고노동자, 농민, 세월호 유가족,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번 <사람들>에서는 사회적 가치와 공익을 위해 조금은 '다른 삶'을 택한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0대의 청년활동가, 30대의 노동활동가, 40대의 공익의료활동가를 모시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 기자말

이전에도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이 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책의 저자인 그에게 사인을 받았었다. 펼쳐보지 않은 채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그 책을 다시 꺼내어본 건 우연히도 최근이었는데, 그건 요즘의 내가 원룸 보증금을 마련한답시고 월화수목금토일, 주말도 없이 알바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로감이 일상이 되어가던 어떤 날이었고, 덕분에 무력감 비슷한 기분을 얼마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의 자리에 당신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힘이 되어주곤 한다.

1월 9일 오전, 신촌에 있는 알바노조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알바노조 활동가다. 최근에는 알바노조 위원장에 출마했고 당선되었다. 자기소개를 부탁했지만, 특별히 자신을 소개하고 싶은 말은 없다고 했다.

알바노조 2기 위원장 박정훈 씨
 알바노조 2기 위원장 박정훈 씨
ⓒ 알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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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2004년 20살 알바를 전전하며 대학을 다니다. 학자금대출이 900만원.
- 2009년 25살 서울에 와서 학생운동에 투신하다.
- 2013년 28살 알바연대를 함께 만들고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
- 2014년 29살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을 쓰다. '최저임금1만원' 투쟁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1년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하다.
- 2015년 31살 알바노조 노동개악대책위원장을 맡아 투쟁하다. 알바노조 위원장에 도전하다.

- 2016년 32살 알바노조 위원장이 되다.

"우리가 구상했던 것들이 사회적인 목소리가 되었다"

- 수많은 의제들 가운데 '노동' 의제에 집중하고, 그 중에서도 '알바노동'에 집중하여 활동하시게 된 경과를 듣고 싶습니다.
"노동자로 칠 수 있는 인구가 2000만 명 정도예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러니까 국민의 절대다수가 실제로는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지만 자기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회적 시각이나 권력의 문제, 그런 것들 때문에.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자존감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거니까요.

자기를 인정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면 자기의 욕구를 말할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사회의 주체로서의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죠. 그들을 대변할 필요가 없어지는 겁니다. 지배하기 매우 좋은 거죠. 그것이 우리 삶을 파괴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상황에 처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노동조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알바'야말로 자신을 노동자로 정체화하기 힘든 사람들이죠. 또한 점점 늘어나는 불안정노동, 즉 알바가 미래의 노동형태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요. 그래서 이걸(알바노조)조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 노동조합 자체가 힘을 얻기 힘든 시기임에도 알바노조 결성, 첫 단체협약 체결, '최저임금 1만 원' 구호의 대중화 등에 성공'하셨어요. 여전히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이 같은 '성공'으로부터 느끼는 즐거움들에 대해 말해주세요.
"첫 번째는 내가, 우리가 구상했던 것들이 사회적인 목소리가 되었다는 것. '알바'라고 불렸던 존재들이 자신이 노동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나아가 단체협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했다는 게 큰 의미가 있죠. 하지만 '가맹점주'라는 만만한 상대와 싸웠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합니다. 서로 불쌍한 사람들끼리 싸운 거죠. 물론 가맹점주가 더 힘이 세고 악랄하긴 하지만요.

두 번째는 선제공격을 했다는 것. 지금까지는 정부나 기업이 먼저 말하고 거기에 우리가 대응하고 반대했었는데, 최저임금 1만 원 요구는 '선방'을 날린 거죠."

1월 22일, 알바노조는 노동청을 방문하여 "근로감독관에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1월 22일, 알바노조는 노동청을 방문하여 "근로감독관에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 알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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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활동가의 일과는 어떤가요?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으실 것 같습니다. 노동활동가로 살면서 에너지가 소진될 때가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해소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침 9시까지 출근을 하고, 같이 모여서 여러 일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사람 만나고. 공부하고. 사건이 터지면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논평 쓰고. 인터뷰하고, 글을 쓰고. 조합원들도 만나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홍보하러 다니고, 가끔 상담 전화가 오면 상담해드리고, 노동법도 공부해야 하고. 새벽에 무언가 일이 터진다든지, 예를 들면 노동개악을 발표한다든지 그러면 노숙도 해야 되고, 백남기 어르신 때 같은 사건이 터지면 밤새워 일하게 되고.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죠.

하지만 노동 강도는 노동 시간만으로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어서, '많이 힘들다', 이렇지는 않아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드는 시간은 그렇지 않은 시간과 느낌이 다르니까요. '일을 주도할 수 있느냐'의 문제죠. 에너지가 소진될 때는, 원피스 같은 만화를 봅니다. 운동도 좋아하고요. 수영, 탁구, 등등. 겉보기와 달리 운동신경이 좋습니다."

"가능과 불가능은 경험과 상상력의 차이... 해봐야 안다"

- 운동에 있어서 구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구체적인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제시하시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함을 꾸준히 주장하시고요.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임을 증명해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무조건적인 평등'에 반감을 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망설이는 것은, 아까 말한 자존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본인에 대한 자존감이 낮으면 타인에 대한 평가도 낮아지죠. 내가, 그리고 타인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를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우리가 주장하는 건 "모든 인간은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논리나 가능성의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불가능한 것들이 이미 현실에 존재하고 있어요. 가계부채가 1100조. 불가능한 일인 것 같은데. 한 사람이 집 2000채를 갖고 있다. 불가능할 것 같은데, 현실인 거죠. 가능과 불가능은 경험과 상상력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제가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이후에는 믿음의 문제죠.

'최저임금 1만 원' 외칠 때도 온갖 소리 다 들었습니다. 그게 가능하냐고. 지금 다 외치고 있잖아요. 간단한 원리로 이야기했어요. 생계비가 이만큼 드니까, 최저임금이 1만 원이 되어야 한다. 명약관화하게. 그런데 이걸 운동진영 스스로도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거죠. 현실이 너무 낮으니까. 운동이란 그런 것 같아요. 논리 체계가 아니고 직관. 직관과 당연함. 이론은 권력의 도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정확하지 않죠. 해봐야 압니다."

- "대안은 있다. 힘이 없을 뿐. 힘은 조합원들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꾸준히 하고 계십니다. 알바노조 위원장 출마의 변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고요. "흙수저니 헬조선이니 하는 세간의 자조와 죽창과 같은 혐오와 분노"를 표현하는 것과 "정치적 행위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서로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그 둘의 간극을 넘어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마련되어야 하고, 또 어떤 노력을 하여야 할까요?
"운동이란 비이성적 행위입니다. 근대적 의미의 이성으로는 이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안 나옵니다. 모든 인간들이 자기 인생을 걸고 운동을 하지만 아웃풋이 뭐가 나옵니까. 특정할 수 없죠. 하지만 인간의 세계는 이성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지금 지배자들도 이성이 아니라 강한 믿음과 신념으로 지배하죠. 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혐오와 분노를 정치적 행위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내 인생의 문제로 마주해야 합니다. 누가 봐도 이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면, 의심을 나한테로 던지고,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해야 합니다. 또한 운동 단체는 대중에게 '집단적 행위를 하면 바뀐다'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제1 정언명령은 '생존하라'입니다. 대중이 '생존에 조합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되면 운동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대답을 토대로 '다른 삶'을 선택하다

- 이전 인터뷰에서 2002년, 소위 '미선이, 효순이 사건' 추모 촛불시위를 기점으로 '운동'을 시작하셨다고 하셨어요.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한둘이 아닐 테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진 않을 거예요. 하나의 요인만으로는 분명 충분히 설명되지 못할 테지만, 그럼에도 무엇이 다름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이런 활동을 하니까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어요. 공감의 능력이 다소 특별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근데 그 공감의 능력이란 건 인간이 모두 비슷하게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나 자신을 속이지 않고 이런 질문을 던져본 거죠. '너 이런 거 그냥 무시하고 살 수 있어?' 저는 이런 걸 하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고 판단한 거죠.

또 하나는, 활동할 때 학교가 탄압을 많이 했어요. 야, 이거 한두 개 바꿔서 될 게 아니다. 학교의 탄압이 그런 걸 느끼게 한 거죠. 이것도 제게 하나의 질문이 되어 주었죠. 여기서 싸움을 접으면, 평생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아니,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속이지 않았던 이유는, 내 안의 평화. 내 마음의 평화(때문이다).

저와는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 역시, '너는 남들의 편견을 견디면서 열악한 삶을 살 수 있어?'라고 물었을 때 그럴 수 없겠다고 정직하게 답한 겁니다. 저와 똑같은 질문을 했고, 똑같이 정직하게 대답을 한 거예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건 전혀 아니죠.

다만, '운동권들 이상한 놈들이다'와 같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은 문제죠. 또 하나의 문제는 어떤 삶을 선택하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면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죠. 강요되는 삶들이 많아요. 제가 '선택'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강요된 선택일 가능성이 조금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

2014년, 박정훈 씨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1년 6개월 간 수감생활을 했다.
 2014년, 박정훈 씨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1년 6개월 간 수감생활을 했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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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이나 이전에 하신 인터뷰들을 보면, 본인의 삶에 대한 믿음이 강하신 것 같아요. 함께 운동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고요. 누군가를 설득하고 연대를 제안하는 일은 그 믿음 없이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와 연대를 하면, 너는 지금보다 더 잘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요. 그 믿음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동어반복이지만, 나의 제안을 선택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있는 거죠. 나 하나 때문에 이런 삶을 선택하는 게 아니니까. 그 사람의 결단에 대한 믿음. 한편으로 인간적 고뇌는 있어요. 윤상원(5.18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에 저항한 노동운동가)평전을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내가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생존했을 텐데." 이 문구가 기억에 남는데. 저와 함께 인생을 걸었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아무리 봐도, 이 길을 택하지 않으면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잘 살 수 있어요. 그런 인간적 고뇌는 있지만. 그런 건 보장할 수 있는 거죠. 자유. 자신의 철학과 인생.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은, '틀리면 고치면 되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땐 책임지면 되지' 라는 생각에서 비롯돼요. 그런데 이 믿음에는 제가 남성으로 태어난 것도 큰 영향을 미쳐요. 여성으로 사회화된 많은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사회화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남성으로 태어난 것이 가장 큰 특권 중 하나죠. 덕분에 저는 그렇게 사회화되지 않았으니까. 여성 동지들은 하나를 더 넘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 공허한 질문이긴 하지만, 언젠가 꿈꾸는 세계가 실현되어 '알바노조'가 필요 없어지게 되면 무엇을 하며 살고 싶으신가요?
"글을 쓰고 싶어요. 소설도 쓰고 싶고. 에피소드는 많습니다. 삶에 굴곡이 많기 때문에... 감방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가 소설을 쓴다면 그건 어떤 소설일까, 궁금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떠올랐던 글을 붙이며 인터뷰를 끝맺는다.

"원폭 이후 히로시마 땅에는 75년 동안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목소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급한 나머지 실수를 저지른 어리석은 예언자였을까? 아니, 오히려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솔직한 한계상황의 관측자였을 것이다. 그가 한 예언은 금방 뒤집어졌다. 늦여름에 내린 비는 황폐한 토지에 금세 새싹을 돋아나게 했다. 하지만 좀 더 깊은 곳에서 진정한 파괴가 일어나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현미경으로 확대된 잎의 세포가 미묘하게 변형된 큰개불알풀의 표본을 보고는 상처 입은 인간 몸을 봤을 때처럼 처절하게 본질적인 구토감을 느꼈던 일이 떠올랐다. 사실 지금 녹음이 무성한 히로시마의 모든 식물이 그러한 치명적 파괴를 입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눈앞의 초토화된 땅에 파란 싹이 나오면 그것을 믿고, 새로운 이상 징후가 나타날 때까지 절망적인 상상력은 그대로 멈추어 버린다. 달리 한계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일상생활의 균형을 지키며 살아갈 방법이 없다. 히로시마에서 진정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녹색 풀이 무성해지리라는 희망이 없는 땅에서, 인간이 소소하고 자잘한 노력을 차곡차곡 쌓아 갈 기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잠깐 동안은 풀의 미래에 대해 낙관주의자가 될 수밖에.

게다가 그들은 풀이 무성해진 다음에는 녹색 풀 내부의 상태를 주의 깊게 간파하는 예민함을 지녀야 한다. 너무 절망하지 않고 헛된 희망에도 취하지 않는 인간,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스트여야 한다. 그런 진정한 휴머니스트를, 1945년 여름 히로시마는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히로시마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비로소 인류가 경험한 최악의 절망의 시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희망이 존재했던 것이다."

- 오에 겐자부로 <히로시마 노트>, 이애숙(역), 2012년, 삼천리, 129p


태그:#사람들, #인권기행 사람들, #박정훈, #알바노조, #다른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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