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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라는 영화를 아는가? 그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다. 찻집에 온 일본인 손님들이 한국인 주인 일행에게 과거 일본이 한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한다. "제가 한국분들에게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과거 일본의 잘못을 부디 용서해 주세요" 그저 관광온 평범한 아주머니들이었다.

좀 뜬금없었다. 그 마음이 이해도 되고 고마우면서도 뭔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들인 그 분들이 왜 사과를 해야할까?그 사과를 우리는 받아야 할까. 뭐라고 답해야할까. 어려웠다. 그 장면을 잊고 살다가 어느날 놀랍게도 난 현실에서 똑같은 장면을 맞닥뜨렸다. 하지만 다행히 이번에도 난 관찰자였다.

일본의 잘못을 사과하는 일본인 아주머니
▲ 영화 경주의 한 장면1 일본의 잘못을 사과하는 일본인 아주머니
ⓒ 영화 경주 제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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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드문 평일 오후 소녀상 앞에서 묵념하듯 고개숙인 젊은 여자 뒤에서 말을 걸까 말까 주저하는 한 일본 남자가 있었다. 여자의 고개가 들리자 그제서야 용기를 낸 듯 그 남자는 서툰 한국말로 말을 건넸다. "미안합니다. 일본의 잘못 미안합니다. 사과드립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를 나는 계속 엿들었고 거칠지만 힘 닿는대로 옮겨본다.

여자 : 아닙니다.
남자 : 아니예요. 정말 미안합니다.
여자 :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남자 : 이런 사과라서 미안합니다.

남자는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여자는 빙긋 웃었다.

여자 : 당신은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자 : 맞습니다. 저는 사과할 자격이 없습니다.
여자 :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남자 : 아닙니다.
여자 : 일본의 국민들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다만 일본을 대표하는 사람이 사과를 해야하는거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남자 : 하지만 우리가 대표를 잘못 뽑아서 제대로된 사과를 안 하고 있어서. 그게 너무 미안합니다.
여자 : 우리도 뭐 마찬가진걸요. 우리도 이 모양이어서 미안합니다.

여자도 지지 않았다.

여자 : 선량한 일본 국민들도 피해자 아닌가요? 원치않는 전쟁으로 힘들었겠죠.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들과 적극적으로 침략전쟁, 양민학살에 가담한 나쁜 사람들이 문제인 거죠.
남자 : 맞습니다.
여자 : 근데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권력을 쥐고 일본을 다스리고 있는거죠? 전범들도제대로 단죄하지 못했고.
남자 :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여자 : 뭐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일본에 부역하며 동포들을 탄압했던 사람들, 군사독재하며 국민들을 압살하던 나쁜 사람들이 이제는 온갖 기득권으로 한국을 지배하고 있어요.
남자 : 아. 한국도 그렇습니까?
여자 : 네. 그러니까 참담하네요. 일본은 제대로 사과를 할 준비가 안 되어있고, 한국은 제대로 사과를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네요. 위안부 할머니들과 시민사회에서 정당한 요구를 아무리해도 우리 정부에서 저렇게 엉터리 사과를 받고 합의를 해줘버렸으니까요. 법 절차적으로 어차피 무효이긴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무척 분노하고 있답니다.
남자 : 그런거였군요. 잘 몰랐습니다.

남자는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선량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여자 : 우리가 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세요?
남자 : 당연히 우리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그것은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여자 : 맞아요. 일본은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전쟁과 식민통치를 하면서 너무도 많은 잘못들을 저질렀습니다. 아직도그 피해자들이 생존해있습니다.
남자 : 맞습니다.
여자 : 하지만 한국의 국력이 성장해서 우리가 사과 받을 힘이 생겼기 때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예요.
남자 : …
여자 : 위안부 할머니들이 고통받았고 지금 그분들이 너무 불쌍해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자 : …
여자 : 제가 감히 할머니들의 고통과 심정까지 다 헤아리지는 못하겠어요. 다만 우리 국민들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과는 잘못에 대한 "인정" 위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반성"입니다. 당신들이 했던 잘못들을 분명히 인정한다는 것은, 다시는 그런 잘못을하지 않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한국에, 나아가 세계에 하라는 것입니다.
남자 : 아…

여자: 다시는 그런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양민을 학살하고 자원을 수탈하고, 강제 징용과 강제 노동, 위안부, 생체 실험 등 온갖 나쁜 잘못들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동감하는지, 정말 반성하는지 확인하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일본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남자: …
여자 : 당신들의 흉악무도한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의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이 아직 살아계시듯이, 전쟁을 일으키고 온갖 나쁜 짓을 했던 세력들이 아직 일본에 있습니다. 심지어 버젓이 권력을 잡고 있습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한분 한분 세상을 떠나시고 곧 한분도 남지 않겠지요. 하지만 당신네 나쁜 세력들은 아직도 건재합니다.
남자 : 맞습니다.
여자 : 그리고 단 한번도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단 한번도약속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나라의 나쁜 사람들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고, 심지어 지금 일본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전범들의 유해도 아직도 건재하지요.
남자: 부끄럽습니다. 참담합니다.

여자: 그렇기에 선량한 일본 국민에게 우리는 사과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위로하고 응원을 보냅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나쁜 짓을 한 세력들이 일본 내에서부터 제대로 단죄받을 수 있기를. 그리고 정말 양심적이고 선량한 정치세력이 일본을 대표하게 되어, 진정한 사과와 책임있는 약속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럴 때만이 그 약속 지켜나갈 수 있겠지요. 당신들이 일본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당신들이 하는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응원합니다. 약자인 대다수 선량한 일본 국민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반드시 이기고 바꿔내세요. 그리고 나서 진정한 사과와 약속을 해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남자: 네! 잘 알겠습니다.

여자: 그러니 마찬가지로 일본 국민도 우리 한국을 응원해주세요. 우리 역시 부끄럽고 참담합니다. 우리도 갈길이 너무 멉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남자: 응원하겠습니다.
여자: 한국 역시 누군가에게 사과해야할 잘못들이 있습니다. 사과를 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과를 하기 위해서라도 한국도 더 나아져야 합니다. 잘못한 사람들 사과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 계속해서 새로운 잘못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죄를 묻고 끊어내고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나아지며 나아가는 것, 그게 바로 진보라는거 아닐까요. 사회가 진보할 때에만 진정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남자는 감동 받았는지 고개를 숙였다. 울먹이는지 어깨가 들썩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아뿔사. 그때서야 난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일본인이여, 사과하지 마세요"라고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지만, 이어지는 뒷문장은 다음과 같다. "대신 한국을 응원해 주세요. 우리도 일본을 응원하겠습니다."

일본의 잘못을 사과하는 아주머니에게 이야기하는 신민아 배우의 역
▲ 영화 경주의 한 장면2 일본의 잘못을 사과하는 아주머니에게 이야기하는 신민아 배우의 역
ⓒ 영화 경주 제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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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주>에서 사과하는 일본 아주머니에게 박해일 배우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낫또를 정말 좋아합니다" 그리고 신민아 배우는 이렇게 말한다. "아픈 과거도 잊어버려선 안되지만, 이제부터는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이다.

함께 나아간다는 것이 한일 양국의 양심없고 생각없는 사람들이 주장하듯 이젠 과거를 덮은 채 잊고 살아가자는 것은 아닐거다. 잘못한 사람의 죄를 덮어두면 잘못은 반복되며, 고통받은 피해자들의 아픔을 외면하면 그건 사람사는 세상이 아니다.

함께 나아가자는 것, 그것은 얼굴도 못봤고 이름도 모르는 평범한 그녀의 말처럼 각자 더 나아지면서 나아가자는 말일 거다. 당당하게 사과하고 사과 받을 수 있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고, 그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바로 진보일 것이다. 그녀의 말에 큰 울림이 있어 전하기 위해 부족하지만 이렇게 정리를 해봤다. 부디 오해가 있다면 다 내 탓이니 용서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일본군 위안부 졸속 협상을 보고 느낀게 있어서 써본 컬럼입니다. 오마이뉴스에만 기고하는 글이며, 다른 매체에 보낸 바 없습니다.



태그:#위안부,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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