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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대구에는 일본군과 명군이 번갈아가며 총본부를 설치했다. 명군 총사령관 이여송의 참모인 두사충은 종전 이후 대구에 눌러앉았다. 사진은, 두사충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대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대명동 뒤편 앞산 중턱에서 바라본 대구 풍경.
 임진왜란 당시 대구에는 일본군과 명군이 번갈아가며 총본부를 설치했다. 명군 총사령관 이여송의 참모인 두사충은 종전 이후 대구에 눌러앉았다. 사진은, 두사충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대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대명동 뒤편 앞산 중턱에서 바라본 대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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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부 주사(戶部主事) 애자신(艾自新)이 군량이 계속 조달되지 않는다고 관량관(管糧官) 김응남, 민여경, 황진에게 곤장을 쳤다.'

이 문장은 <조선왕조실록> 1593년(선조 26) 2월 1일자 기사의 일부이다. 명나라 호부(우리나라의 현 재정경제부와 유사)의 주사 애자신이 조선의 군량미를 관장하는 책임자 김응남 등에게 매질을 했다는 증언이다.

김응남은 정2품 지중추부사였다. 지중추부사가 어느 정도 고위직인가는 국무총리 격인 영의정 및 부총리 격인 좌의정과 우의정이 정1품이고 장관 격인 판서가 지중추부사와 같은 정2품이라는 사실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그날 김응남과 함께 애자신에게 매를 맞은 민여경과 황진 또한 호조참판(종2품, 재정경제부 차관)과 의주목사(정3품, 시장) 자리에 있던 대단한 고관이었다.

조선 백성들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

매질을 한 명나라 관리 애자신은 주사였다. 현대의 관료 체제에서 주사는 관리 중 관(官)보다 낮은 리(吏)에 들어간다. 사무관인 5급 이상을 관, 주사인 6급과 그 이하 공무원을 리로 나누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애자신의 벼슬은 지금의 6급보다는 높았겠지만 남의 나라 최상위급 고관을 매질할 만큼 엄청난 직급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자신이 조선의 정2품 지중추부사, 종2품 참판, 정3품 목사에게 곤장을 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명나라 관원이라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애자신 기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명에게 얼마나 치욕을 당하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김응남, 민여경, 황진 같은 고관들까지 그토록 민망한 꼴을 당한 것을 보면, 일반 백성들이야 차마 기록으로 남길 수조차 없을 만큼 압제와 고통에 시달렸을 터이다.

그래서 류성룡의 <징비록>은 당대 조선 백성들이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고 한탄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왜군의 수탈이 '대충' 수준이었다면 명군의 그것은 '악착'이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1593년 1월 11일자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는 중국 관리가 제 나라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에조차 '이여송이 평양에서 목을 벤 수급 가운데 절반은 조선 백성입니다, 또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 여 명도 모두 조선 백성이라 합니다' 하고 탄원했다는 놀라운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대구 달서구 와룡산의 전경. (비록 일부 합성을 거쳤지만) 와룡산의 능선이 Ω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확인된다.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용두봉이 높고, 꼬리에 해당되는 용미봉은 현저히 낮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능선은 높고낮음을 반복하여 마치 용이 엎드린 형상을 하면서 전체적으로 Ω모양을 이룬다. 용두봉과 용미봉은 서로 붙을 만큼 가깝다. 명군 총대장 이여송이 이 모습을 보고는 "큰 인물이 태어나 명나라를 위협할 지세"라면서 용두봉, 정상, 용미봉에 칼질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대구 달서구 와룡산의 전경. (비록 일부 합성을 거쳤지만) 와룡산의 능선이 Ω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확인된다.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용두봉이 높고, 꼬리에 해당되는 용미봉은 현저히 낮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능선은 높고낮음을 반복하여 마치 용이 엎드린 형상을 하면서 전체적으로 Ω모양을 이룬다. 용두봉과 용미봉은 서로 붙을 만큼 가깝다. 명군 총대장 이여송이 이 모습을 보고는 "큰 인물이 태어나 명나라를 위협할 지세"라면서 용두봉, 정상, 용미봉에 칼질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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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 대구에는 일본군의 총본부가 주둔했다. 그 후 일본군이 부산으로 내려가자 이번에는 명군의 총본부가 대구에 머물렀다. 조선 정부보다는 외국 군대들이 대구의 군사적, 지리적 중요성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한 꼴이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경주, 안동, 상주 등지를 돌아다니던 경상감영이 대구로 왔다. 경상감영은 1601년(선조 34)부터 지방 행정 체제가 13도로 재편되는 1896년(고종 33, 3차 갑오개혁)까지 거의 300년 동안 대구에 아주 붙박이로 설치되었다. 당시 경상감영의 수령 경상감사(관찰사)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역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한 손에 거머쥔 막강한 권력자였다.

명군 총본부가 설치되었던 대구에 명군 총사령관 이여송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대구에 남아 있는 이여송 흔적의 대표는 와룡산에 서려 있는 전설이다. 물론 이여송 전설은 그가 조선에 어떤 위해를 가했는지에 대한 비유적 증언이다. 명군 주사 따위도 조선 정1품에게 곤장을 쳤지만, 이여송 본인 또한 선조의 말을 자기가 타고 다니겠다고 했던 무례한 위인이다.

대구에 남아 있는 이여송 흔적의 대표는 와룡산

와룡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서재 지역의 낙동강변에서 출발하여 달서구 성서 일대를 북쪽으로 휘어감은 다음 서구 상리동을 거쳐 금호강변에서 꼬리를 내린다. '꼬리를 내린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낙동강에 붙은 용두봉이 두드러지게 높고 금호강에 붙은 용미봉이 눈에 띄게 낮기 때문이다.

용두봉부터 용미봉까지 이어지는 와룡산의 능선은 기이하게도 Ω 모양을 하고 있다. 용의 머리를 뜻하는 용두봉과 용의 꼬리에 해당되는 용미봉이 서로 맞닿을 듯이 가까이 위치한다. 뿐만 아니라 와룡산의 길다란 능선은 높고 낮음을 되풀이하면서 커다란 원형을 만든다. 마치 산 전체가 용이 머리와 꼬리를 맞대고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와룡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여송이 지맥을 끊기 위해 칼질을 했다는 와룡산 정상을 지나가고 있는 등산객들. 사진 왼쪽에 정상석이 서 있다.
 이여송이 지맥을 끊기 위해 칼질을 했다는 와룡산 정상을 지나가고 있는 등산객들. 사진 왼쪽에 정상석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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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산의 꿈틀대는 기세를 본 이여송이 점잖게 경치만 감상하고 돌아갈 리가 없다. 이여송은 "와룡산은 큰 인물을 탄생시켜 명나라를 위협할 지세를 지닌 곳"이라면서 칼을 뽑아 용의 머리인 용두봉, 용의 몸통 한복판인 산 정상, 용의 꼬리인 용미봉을 난도질했다. 이여송의 칼날이 몸부림을 칠 때마다 와룡산은 검붉은 피를 하늘로 솟구쳐 뿜었다고 한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도 와룡산의 이여송 전설과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일리와 단산리 사이에 있는 부엉덤산이 바로 그곳이다. 부엉덤산의 산세가 용장(勇將)을 낳을 명당이라고 판단한 이여송은 종이에 부엉덤산을 그린 다음 그 위에 무거운 붓을 올려놓는다. 그러자 마른하늘에 천둥번개가 쳤고, 산이 꿈틀거리더니 지맥 가운데가 잘룩 끊어졌다. 그날부터 부엉덤산에는 100일 동안 피가 흘러내렸다. 

조선 대신들 위협한 이여송... 결국 찬양비와 생사당 건립

이여송이 칼로 난도질을 했다고 전해지는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와 단산리 사이의 부엉덤산. 사진 앞부분의 억새가 잔뜩 우거진 물길은 대구 중심부를 관통하여 금호강으로 유입되는 신천이다.
 이여송이 칼로 난도질을 했다고 전해지는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와 단산리 사이의 부엉덤산. 사진 앞부분의 억새가 잔뜩 우거진 물길은 대구 중심부를 관통하여 금호강으로 유입되는 신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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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은 류성룡 등 조선 대신들에게 "(우리 덕분에) 그대들은 나라가 없는 데서 나라를 갖게 되었다"면서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군사를 인솔하여 요동으로 돌아가 그대들이 다시 나라를 잃는 슬픔을 당하게 할 것"이라고 위협한 자였다. 결국 선조는 1593년 2월 2일, 이여송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생사당(生祠堂)까지 지으라고 명령한다.

<임진록>의 줄거리

평안도 삭주 최위공의 부인이 최일경을 낳는다. 부인은 꿈에 관운장을 만난 뒤 아들을 잉태했다.

선조의 꿈에 한 계집이 기장 자루를 가져와 대궐 뜰에 내려놓자 큰불이 일어난다. 선조가 영의정 최일경에게 해몽해보라고 한다. 최일경은 왜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답하자 선조는 성질을 내며 그를 동래로 귀양보낸다.

3년 뒤, 일본국 도원수 조섭과 부원수 청정이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온다. 삭주의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대항하다가 적장 마홍에게 피살된다.

선조는 몽진길에 나선다. 최일경이 용강의 김응서를 천거하고, 곡산 사람 김덕령이 나타나 신술로 승리를 일군다. 명나라에 갔던 유성룡은 구원병을 얻어오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관운장의 도움 덕분에 이여송을 얻어 귀국한다.

이여송은 온갖 트집을 잡으며 출전을 하지 않다가 이윽고 선조가 통곡을 해대자 싸움터로 간다. 김응서는 평양 기생 월선을 시켜 조섭을 살해한다. 김덕령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청정을 죽이고 승전한 이여송은 조선의 지맥을 끊으려 한다. 그러나 초립동으로 변장한 태백산 산신령이 그를 중국으로 내쫓는다. 사명당이 일본으로 건너가 왜왕의 항복을 받는다.

풍수지리설에 기반한 이여송 설화는 대구의 와룡산과 부엉덤산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곳곳에 무수히 서려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첫째, 이여송 등 명나라 사람들이 풍수지리설을 깊이 신봉했기 때문이다. 이여송 등은 한반도의 지맥을 휘저어 놓으면 장차 조선의 국력이 강성해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해칠 산을 정하는 데에는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 직책을 맡아 이여송을 보좌했던 두사충 등 풍수지리 전문가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수륙지획주사는 군영을 설치하고 작전을 수립할 때 이여송에게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조언을 하는 자리였다. 두사충 등은 어디서 어떻게 싸워야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였지만, 앞으로도 조선을 영원히 속국으로 두려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여송에게 말했다.

그들은 이여송이 "조선에 큰 인물이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면 어디를 잘라야 하는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리면 그에 성실히 답변하기도 했고, 스스로 연구하여 "이곳의 지맥을 끊어야 조선이 감히 명에게 도전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건의하기도 했다. 와룡산과 부엉덤산이 오랫동안 피를 흘리게 된 사건도 두사충을 비롯한 명나라 풍수전문가들의 머리가 빚어낸 결과라는 말이다.

둘째, 군담소설 <임진록>이 한몫을 했다. 임진왜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가진 작자 미상의 이 고전소설은 대략 병자호란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황당한 사건 전개로 일관하고 있어 문학적 가치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임진록>은 사명대사가 바다를 건너가 일본왕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민족적 자존심을 북돋우는 설정 덕분에 당시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심리적으로라도 전란의 피해를 극복하고 싶어했던 조선 백성들의 정서에 딱 들어맞았던 까닭이다. 그 이후, <임진록> 속에서 이여송이 우리나라 산천 곳곳의 지맥(地脈)을 자르는 장면은 <정감록> 등 비서(秘書)를 읽으며 풍수지리설에 심취해 있던 조선 백성들에게 현실의 일처럼 각인되었다.

와룡산에 올라 외적 침입의 교훈을 되새겨보다

와룡산의 시작점인 용두봉(왼쪽 봉우리)과 끝인 용미봉이 한꺼번에 보이는 모습. 와룡산의 능선이 원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사진으로, 용목 지점에서 촬영할 수 있다. 용두봉과 용미봉 사이로 금호강이 보인다. 용두봉 왼쪽은 낙동강이다.
 와룡산의 시작점인 용두봉(왼쪽 봉우리)과 끝인 용미봉이 한꺼번에 보이는 모습. 와룡산의 능선이 원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사진으로, 용목 지점에서 촬영할 수 있다. 용두봉과 용미봉 사이로 금호강이 보인다. 용두봉 왼쪽은 낙동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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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산 등산로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와룡산 등산로 초입으로는 네 곳을 소개할 만하다. 대구 달서구 새방로 7길 33 성산고교 운동장 옆, 선원로 33길 105 선원초교 정문 앞, 선원로 37길 65 이곡중 옆, 선원로 11길 21 대구외국어고교 옆이 바로 그곳들이다. 모두 학교 옆이라 찾기도 쉽다.

병암서원과 용강서원에서 오르면 헬기장을 거쳤다가 왼쪽으로 정상부와 용두봉 가는 길을 걷게 된다. 이곡중과 대구외고에서 오르면 정상부보다도 더 서쪽 능선에 닿아 곧장 좌측으로 용두봉을 바라보며 걷게 된다. 따라서 이여송 전설의 흔적을 밟아보려면 성산고 또는 선원초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어디에서 출발하든 정상까지 가려면 대략 35분가량 걸어야 한다. 물론 용두봉까지 가는 데에도 비슷한 시간이 소요된다. 입산 후 용두봉에 올랐다가 (용미봉 답사는 포기하고) 출발지로 돌아오는 데는 총 2시간 정도 걸린다. 높이는 낮지만 능선이 길고 높낮이가 많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만만하지 않은 산이 와룡산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용은 우주만물의 최고를 상징하는 영험한 존재이다. 와룡산은 이름에도 용을 품고 있고, 능선 또한 용이 엎드려 있는 형세를 하고 있다. 이여송이 "명나라를 위협할 큰 인물을 배출시킬 지세"라면서 용두봉, 정상, 용미봉에 칼질을 하고도 남음이 있는 전설의 산인 것이다.

와룡산 용두봉에 오르면 바로 아래로 흘러가는 낙동강이 보인다. 일몰 때의 낙조 경치가 특히 대단하지만 가파른 등산로와 어둠을 감안할 때 완상을 권장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나라 4대강의 하나인 낙동강의 위풍당당한 물길이 들판을 S자로 휘저으며 내닫는 정경은 한낮에 보아도 정말 장관이다.

그런데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왜선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물론 환상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은 배를 타고 낙동강을 돌아다녔다. 명군도 대구에 본부를 설치한 채 온갖 행패를 부렸다. 이제는 외국군이 우리나라에 꽈리를 튼 채 앉아 있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러나 대구 중심부와 왜관읍에서 오늘도 휘날리고 있는 미군 부대의 깃발은 환상도 아니고 엄연한 현실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임진왜란의 참화를 입었던 우리나라, 지금도 강대국들 사이에서 분단 조국의 고통을 겪고 있다. 명나라 군대의 횡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와룡산에 올라 통일의 그날을 꿈꿔본다.

와룡산 용두봉에서 바라본 낙동강
 와룡산 용두봉에서 바라본 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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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여송, #와룡산, #임진왜란, #용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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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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