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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직접 만든 음반을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발표하고 있다.
▲ 제작음반 발표 학생들이 직접 만든 음반을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발표하고 있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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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두 번째 발표와 함께 길고 길었던 프로젝트 수업이 끝났다. 고등학교 음악 수업.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활동을 함께 해볼까 고민을 하다가 생각해냈던 수업의 주제는 바로 '나만의 음반 만들기'였다. 이는 작곡 및 편곡이 아닌, 선곡과 배치만으로 새로운 음반을 구성해보는 작업이다.

언뜻 듣기에는 매우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조별로 음반의 주제와 선곡의 기준을 정하고 그 이유 또한 타당하게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음반처럼 CD 케이스에 들어가는 소책자도 만들고 표지 디자인을 해야 하며, 그 모든 것들이 주제 혹은 제작 의도와 동일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련의 작업들을 음반을 홍보하는 제작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동반해 발표를 하는 것만으로 이 수행평가를 마무리한다.

음악 수업이 이럴 수도 있답니다

실제 음반처럼 음반 안에 들어가는 책자와 표지까지 학생들이 직접 디자인, 제작한다.
▲ 완성된 음반의 모습들 실제 음반처럼 음반 안에 들어가는 책자와 표지까지 학생들이 직접 디자인, 제작한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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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현장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원천적인 고민은 교육과정을 만드는 사람들의 몫이다. 교사들은 중앙에서 제시하는 표준화된 교육과정과 평가 항목에 의거해 수업의 내용과 순서를 정한 후 이 내용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중점적으로 하게 된다. 그런데 고등학교에서의 음악 교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교육과정이 존재하지만 고입 시험이나 수능과 같은 표준화된 평가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끝내줘야 하는 분량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시된 교육과정은 거기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라는 것이라기보다는 가르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주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교사는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철학과 학교의 실정에 맞게 수업의 내용을 재량껏 정할 수 있다. 엄격한 음악교육자나 교육과정 제작에 참여한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음악 교과의 존위를 위해 대학 입시를 위한 시험 과목에 음악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평가와 진도에서 자유롭다는 이 사실이, 마치 풍족한 여행 경비를 주머니에 넣은 채로 미지의 장소를 탐험하는 것과 같은 설렘과 도전의식을 준다.

진지하게 음반 제작 회의에 몰입하고 있는 아이들. 음반의 주제를 정하는 첫 회의 시간이다.
▲ 음반 제작 회의 진지하게 음반 제작 회의에 몰입하고 있는 아이들. 음반의 주제를 정하는 첫 회의 시간이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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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해마다 수업의 내용이 바뀌고 수업의 방식이 달라진다. 세상이 바뀌기 때문이며 음악의 트렌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변화무쌍한 음악시장이라 하더라도 역사를 통해 검증된 음악들은 가르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수업의 내용으로 항상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을 가르치는 방식,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을 학생들이 배우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교사 본인의 성장과 학생들의 성향에 따라 적절한 방식을 선택하다 보면 작년의 수업과 올해의 수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만의 음반 만들기' 수업은 현재 5년 동안 꾸준히 실행하고 있는 수행평가다. 각각의 학생들이 무궁무진한 악곡들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음반의 내용은 정말 다양하다. 학생들은 교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음악적 개념이나 악곡을 일제히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신만의 느낌과 취향을 적극 반영해 과제를 완성해나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음악을 재해석하며 주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회의를 통해 나온 결론을 매 시간마다 발표한다. 자기 모둠에서 새롭게 해석한 대중가요의 의미를 피력하고 있다.
▲ 회의내용 발표 회의를 통해 나온 결론을 매 시간마다 발표한다. 자기 모둠에서 새롭게 해석한 대중가요의 의미를 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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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함축과 상징이다. 때로는 직설적이고 과감한 표현이 동반되기도 하나, 결국은 그것들도 예술적인 구조 가운데에 배치된다. 함축과 상징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획일적 교육은, 시의 심상을 각자의 감성으로 느끼게 하기보다는 누군가가 남긴 가장 보편적인 해석을 가르치며, 음악의 아름다움을 마음 깊이 울려주기보다는 놀라운 기능을 가진 천재가 남긴 역사적인 숙제 정도로 받아들이게 한다.

음악은 시대적 배경과 작곡가 개인적 배경 그리고 노래를 만든 작곡가 본인의 의도로 인해 어느 정도 정해져있는 해석의 틀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틀 안에서 감상자가 느낄 수 있고 적용할 수 있는 감상의 종류는 무한하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음악 이론적 사실들과 음악사적 상식들을 접하게 해줌과 동시에 그 틀 안에서 자신만의 해석으로 감상하고 노래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보편적 틀 안에서 즐기는 개인의 미학적 즐거움이야 말로 음악을 비롯한 많은 예술의 본질이 아닐까? 그리고 가끔씩은 그 보편적인 틀 마저도 벗어나서 자신만의 예술적 세계를 잠깐 만들어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차시에 세부적인 아이디어를 구성하고 그것을 발표하는 모둠의 이끔이. 가끔씩 기상 천외한 내용의 발표가 학급을 웃게 만든다.
▲ 회의내용 발표 2차시에 세부적인 아이디어를 구성하고 그것을 발표하는 모둠의 이끔이. 가끔씩 기상 천외한 내용의 발표가 학급을 웃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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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내용은 음악 수업을 구성할 때 최대한 지키려고 하는 원칙 세 가지다.

① 아이들이 창작의 과정 가운데 있을 것..
② 제재로 사용되는 음악 작품을 주관적으로 경험할 것.
③ 위의 과정들이 수업 뿐 아니라 일상생활과 졸업 후에도 연결이 될 수 있을 것.

이를 바탕으로 재미와 의미까지 있는 활동이 무얼까 고민하다가 '나만의 음반 만들기' 활동을 구성하게 되었고 해를 거듭하면서 소소한 노하우가 쌓여 약 6회차의 긴 시간동안 프로젝프 수업을 진행하고, 한 모둠에 한 시간의 수업을 통째로 할애해 발표를 시키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그 수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① 4인, 혹은 5인의 모둠을 구성한다. 한 모둠에는 이끔이, 칭찬이, 꼼꼼이 등의 역할이 각각 있다. 무임 승차 효과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② 1차 시에는 음반의 주제를 정하고 2차 시에는 세부적인 아이디어를 정해서 개요를 완성한다. 각 차시별로 수행했던 내용들을 모둠별로 간략하게 발표하고 질의, 응답 시간을 갖는다.
③ 모둠별로 인터넷 검색이 가능한 기기 두 개를 소유하도록 허용하고 구성한 개요에 맞는 곡을 선곡한다.
④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개요를 짤 때 선곡할 악곡을 미리 염두에 두면 안 된다는 것을 반드시 안내하고 지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악곡을 미리 생각하고 앨범을 구성하면 그 곡의 표면적인 내용에 사고가 매몰돼버리기 때문이다.
⑤ 이 후에 일정한 기간을 주고 음반을 완성해오도록 한다. 수업 시간에 거의 모든 과정을 지도하지만 최소한의 과제물을 주는 것은 피할 수 없다.
⑥ 모둠별로 50분 한 교시를 제공해 자신의 음반을 홍보·발표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교사는 모든 발표의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한 후 그 다음 시간에 피드백한다.

때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발표중인 학생. 이 조의 음반은 다소 선정적이다. 남자 고등학교다 보니 상당한 수준의 공감을 이끌어내었다.
▲ 제작음반 발표 발표중인 학생. 이 조의 음반은 다소 선정적이다. 남자 고등학교다 보니 상당한 수준의 공감을 이끌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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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업의 꽃은 한 시간 내내 자기 모둠이 만든 음반을 발표하는 시간이다. 50분이라는 긴긴 시간은 매우 부담스러워 하다가도 막상 발표에 돌입하면 발표자들은 매우 진지해진다. 발표를 듣는 청중들 또한 마찬가지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본래의 의미를 넘어서 새롭게 부여된 의미를 풍기면서 들릴 때, 듣는 학생들은 감탄을 하고 발표하는 학생은 스스로의 창작물에 여간 뿌듯해하지 않는다.

어떤 모둠이 '김동률'의 <출발>이라는 노래에 대해 발표했는데, 이 모둠원들은 '먼지 낀 카메라, 때 묻은 지도'라는 가사에서, 이 노래에 나오는 화자가 일상에 파묻혀 긴 세월 동안 여행을 떠나지 않았음을 상상해냈다. 그저 달콤하게 귓가를 스쳐 지나갔던 대중가요의 가사가 학생들의 깊은 감상과 재해석을 통해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학생의 책상에 앉아서 발표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 들려오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가, 기존 곡을 새롭게 재해석 한 내용이 음반의 기획 내용과 잘 맞아 떨어지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학생의 자리에 앉아보니 수업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피드백을 위한 기록은 상당히 자세하다. 음반의 기획 의도에서부터 곡의 세부적인 내용과 모둠원들이 재해석한 부분들 그리고 슬라이드 자료의 효율성과 전달의 방식에 대한 내용 까지 코치를 한다. 아래는 메모들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 첫 번째 슬라이드에서 전체적인 구성을 소개하고, 그 뒤의 몇 슬라이드를 통해 좀 더 세부적으로 구조를 먼저 보여줌.
- 시간이 얼마 없는데, 슬라이드의 모든 글자를 다 읽을 필요는 없겠다.
- 전체적으로 무난한 스토리 진행. 스토리의 상황과 잘 맞아 떨어지는 가사가 좋았다.
- 4번째 트랙에서 1절만 듣고 멈췄을 때 다들 탄식하는 것을 보니 선곡이 좋았나봐.
- 청중들에게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그들이 명확한 비판을 할 수 있도록 영어 노래에 번역된 뜻까지 슬라이드에 넣었다면.
- <기억의 습작> 같은 곡을 들으면 너희들은 어떤 느낌이 드는지? 궁금하네.
- <산속 마왕의 궁전에서>라는 곡을 고등학교 입학 때 압도된 분위기를 나타내는 곡으로 선곡. 기발한 선곡. 이 곡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

칭찬만 할 수는 없는 교사의 마음은 항상 무겁다. 하지만 진심어린 조언을 들은 학생들은 참으로 성숙한 자세와 눈빛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피드백이 향후 이 아이들이 면접을 치르거나 회사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발표할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발표까지 모두 마친 모둠들 중 그 소감까지 말하는 모둠이 종종 있는데, 꼭 빠지지 않는 내용들이 있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수행평가가 신선했다' '아무 생각 없이 듣기만 하던 노래를 이렇게 재구성해보니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등의 내용이다. 이 수업의 기획 의도와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니 한 학기의 수고가 더 이상 수고가 아니라 보람으로 다가온다. 올해 했던 이 수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년에는 좀 더 빈틈없는 진행으로 학생들의 감수성과 심미적 안목을 키워주어야겠다.

맨 뒷좌석에 앉아 발표자와 청중 모두를 관찰하여 기록을 남긴다. 이 기록은 다음 수업 시간에, 발표한 모둠에게 조언을 할 때와 추후 수행평가 점수를 매길 때 쓰인다.
▲ 발표내용 기록 맨 뒷좌석에 앉아 발표자와 청중 모두를 관찰하여 기록을 남긴다. 이 기록은 다음 수업 시간에, 발표한 모둠에게 조언을 할 때와 추후 수행평가 점수를 매길 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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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음악시간, #수행평가, #나만의 음만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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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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