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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마량과 완도 고금도를 이어주는 고금대교 주변 풍경.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재건한 조선수군을 이끌고 지난 곳이다.
 강진 마량과 완도 고금도를 이어주는 고금대교 주변 풍경.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재건한 조선수군을 이끌고 지난 곳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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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8월 20일(양력 9월 30일) 회령진에서 조선수군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나간 이순신은 잠시 감회에 젖었다. 수군 철폐령까지 극복하고 꾸린 조선수군이어서다. 전라도 내륙에서 모집한 군사도 든든했다. 다시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관련기사 : 조선수군 함대 12척 손에 넣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함대는 조심스럽게 마량 앞바다로 진출했다. 고금도와 약산도가 눈앞이었다. 저만치 신지도와 생일도도 보였다. 이순신의 시선은 약산도와 생일도 사이 바다를 지나 신지도와 완도 외곽을 그리고 있었다. 해남 이진성을 염두에 둔 항해였다.

이순신은 순항하던 조선함대를 바다 가운데에 멈추게 했다. 잠시 뒤 두 갈래로 나눠 출발토록 했다. 한참 나아가던 함대를 다시 불러 세우고 빠르게 방향을 바꿔 되돌아오도록 했다. 이 같은 상황을 두세 차례 반복했다.

처음에 허둥대던 함대도 빠르게 적응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전투에 대비한 낮은 수준의 해상 적응훈련이었다. 일본군과의 일전에 대비한 전술훈련이기도 했다. 군사를 모으고 병참물자를 확보한 이순신이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간 것이었다.

고금대교에서 본 마량포구 전경. 마량항은 고려 때부터 제주도에서 훈련시킨 말을 서울로 올려 보내기 위해 싣고 왔던 바닷길이었다.
 고금대교에서 본 마량포구 전경. 마량항은 고려 때부터 제주도에서 훈련시킨 말을 서울로 올려 보내기 위해 싣고 왔던 바닷길이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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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마량의 마을 풍경. 마을 뒷편에 있는 마도진성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강진 마량의 마을 풍경. 마을 뒷편에 있는 마도진성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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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함대가 가볍게 적응훈련을 한 바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보성과 장흥에서 완도와 해남, 진도로 이어지는 서해 뱃길의 중간지점이었다. 일본군과의 진검승부를 앞둔 울돌목과도 그리 멀지 않는 거리다. 이순신이 해상훈련을 시키면서 바닷물의 흐름을 눈여겨본 것도 이런 연유였다.

이 바닷길은 당시 제주와 뭍을 연결시켜 주는 항로였다. 고려시대부터 제주도에서 훈련시킨 말을 서울로 올려 보내기 위해 싣고 왔던 바닷길이기도 했다. 이 바닷길을 통해 마량포구에에 내린 말은 한동안 적응기간을 거쳐 서울로 보내졌다.

마량 일대에 말 마(馬)자를 쓰는 지명이 많은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신마(新馬)는 말을 받아서 적응시켰던 지역이다. 숙마(宿馬)는 말을 잠 재웠던 곳이다. 말을 뜻하는 지명은 이보다도 더 있다.

원마마을 뒷편에 남아있는 성벽에다 일부 복원한 마도진성 풍경. 그 앞에 당시 관리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원마마을 뒷편에 남아있는 성벽에다 일부 복원한 마도진성 풍경. 그 앞에 당시 관리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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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마도진성의 흔적. 마량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옛 마도진성의 흔적. 마량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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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포구에는 진(鎭)이 설치돼 있었다. 당시 마도진(馬島鎭)으로 이름 붙었다. 1400년경(조선 태종) 설치돼 병선과 수군이 배치됐다. 마량포구 앞 바닷길은 고려 말부터 세금으로 낸 곡식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이 지나는 지역이었다.

마량항은 강진에서 생산한 옹기와 청자를 개경과 제주 등지로 수송한 무역항이기도 했다. 강진에서 생산한 농수산물도 오고갔다. 여기에 진이 설치된 건 조운선과 무역선을 약탈하려는 일본군을 막는데 목적이 있었다.

마량항은 지리적으로도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바다에서는 고금도와 약산도, 신지도 등 크고 작은 섬이 포구를 이중, 삼중으로 감싸고 있다. 항구 뒤쪽의 뭍에선 말머리산의 능선이 포구를 휘감고 있다. 외부로부터 포구의 위치를 완벽하게 감출 수 있어 군항으로써 맞춤이었다.

복원된 마도진성의 모습. 강진 마량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복원된 마도진성의 모습. 강진 마량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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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 앞바다에 떠있는 까막섬 풍경. 썰물이 돼 모습을 드러낸 섬이 한 폭의 수묵화 같다.
 마량 앞바다에 떠있는 까막섬 풍경. 썰물이 돼 모습을 드러낸 섬이 한 폭의 수묵화 같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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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에 마도진성이 쌓인 것은 1499년(연산군 5년)이었다. 장방형의 석성으로 쌓았다. 석축 890척에 높이 12척이었다. 둘레가 2700m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당시 방어기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북선도 상시 대기했다. 이후 이순신의 부대와 명나라 진린의 부대가 연합작전을 폈던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마도진성은 마량항 뒤편, 원마마을의 서북쪽에 있었다. 지금도 성터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장방형으로 된 성벽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성벽을 담벼락으로 삼은 집도 있다. 성벽 아래는 밭이다.

마량항은 고금도와 약산도가 거센 바닷바람을 막아줘 아늑하다. 앞에는 까막섬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떠 있다. 섬이 열대성 난대수 120여 종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바다 풍광이 '미항'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항구도 활기를 띠고 있다. 청정해역의 방파제를 따라 산책로가 단아하게 놓여있어 낭만적이다.

완도 고금도 충무사 앞에 있는 월송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유해가 처음 안치된 곳이다.
 완도 고금도 충무사 앞에 있는 월송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유해가 처음 안치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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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고금도의 월송대 앞에 있는 충무사.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완도 고금도의 월송대 앞에 있는 충무사.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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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고금대교로 연결되는 섬이 완도 고금도다. 이순신과 인연이 깊은 섬이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본영을 설치하고 일본군을 물리쳤던 곳이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유해가 이곳 고금도로 옮겨졌다.

장군의 유해는 고금면 덕동리 충무사 앞에 80여 일 동안 안장됐다가 이듬해 충남 아산으로 이장됐다. 장군의 유해를 임시로 안장했던 터가 월송대다.

월송대 앞에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 충무사도 있다. 충무사에는 조선수군의 해상전투 대형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전진도첩(戰陣圖帖)이 보관돼 있다. 조선후기 전라우수영의 군사조직과 운영 실태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과 군사들이 식수로 사용한 우물도 남아있다.

관왕묘비도 있다. 노량해전 때 이순신과 함께 연합군을 꾸렸던 명나라 진린이 이순신의 전사를 애석히 여기고 피를 토하며 귀국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충무사로 오가는 숲길도 단장돼 다소곳하다.

고금도 충무사에 있는 관왕묘비. 명나라 진린이 이순신의 전사를 애석히 여기고 피를 토하며 귀국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고금도 충무사에 있는 관왕묘비. 명나라 진린이 이순신의 전사를 애석히 여기고 피를 토하며 귀국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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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 충무사 주변 풍경. 길지 않은 숲길이지만, 깔끔하게 정비가 돼 있다.
 고금도 충무사 주변 풍경. 길지 않은 숲길이지만, 깔끔하게 정비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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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전라남도), 이순신의 수군재건 활동과 명량대첩(노기욱, 역사문화원), 명량 이순신(노기욱,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등을 참고했습니다. 지난 3월 24일과 11월 11일 두 차례 답사했습니다.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조선수군재건, #마도진성, #까막섬, #마량항, #월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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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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