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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점점 빨리 변하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삶의 여정은 점점 길어진다. 헐떡이며 뛰다보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밥 먹고 하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렇다. 사람에게는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다. 아무리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이라지만 음식 앞에서 잠깐 '살맛'이 난다. 아무리 지친 마음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그릇 앞에선 절로 기운이 난다. 어머니 품처럼 평안하다. 그런데 먹는 일조차, 세끼를 챙겨먹는 일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음식 맛을 잃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것은 바로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이다. 그 아련한 맛, 그 음식과 함께한 그리운 사람. 갓 지은 밥을 크게 한술 떠 입에 넣으면 유쾌하고 가슴 뭉클한 사연들이 하나 둘 생각난다. 2015년에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을 새롭게 펴내는 까닭이다.' -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에서.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책표지.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책표지.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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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댄다'는 속담이 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데 쓸 뿐, 별 쓸모가 없는 부지깽이마저도 일손을 거든다고 바삐 움직여야 할 정도로 일손이 딸리는 농촌의 바쁜 가을 수확기, 그 현실을 이야기해주는 속담이다.

그처럼 바쁜 가을 어느 날. 밭으로 논으로 정신없이 오가며 며칠째 캄캄해져서야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시곤 하던 아버지가 해가 지려면 두어 시간은 더 있어야 할 시각에 마당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손에는 그즈음 뽑는 콩대 한 묶음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 4남매를 마당으로 불러 모은 후 모닥불을 피워 콩을 구워 차례차례 먹여 주셨다.

주전부리가 변변치 못한 농촌살림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구워 주시는 콩이 얼마나 맛있던지, 우리 4남매는 제비 새끼처럼 입을 쪽쪽 벌려가며 콩을 날름날름 받아먹었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던 아버지는 영문을 몰라 하는 우리를 데리고 논으로 나갔고, 논에서 다시 콩을 구워 주셨다. 그런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버지는 밝게 웃으시며 말했다.

"맛있지? 그렇지. 콩은 이렇게 들에서 구워 먹어야 제 맛이지!"

무엇이든 한 알이라도 더 얻으려고 논둑에도 콩을 심던 1970년대 말 어느 가을날의 사연이다. 아버지는 그날 콩대를 뽑다가 그 바쁜 와중에 어린 자식들에게 구워 먹이고 싶어 집으로 달려온 것이고, 이왕이면 낭만의 맛을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자식 사랑과 바쁘고 고단한 중에도 놓지 않았던 낭만의 여유는 이런 가을이면 물론 힘들 때마다 떠올라 고단한 일상을 위로하곤 했다.

살아갈 힘 얻게 되는 음식과 관련된 추억들

'싱싱한 호박잎을 잎맥의 까실한 줄기를 벗기고 깨끗이 씻어서 뜸들 무렵의 밥 위에 얹어 부드럽고 말랑하게 쪄내는 한편 뚝배기에 강된장을 지진다. 된장이 맛있어야 한다.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썬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진다. 다만 예전보다 간사스러워진 혀끝을 위해 된장을 양념할 때 멸치를 좀 부숴 넣어도 좋고, 호박잎을 밥솥 대신 찜통에다 쪄도 상관없다.

새로 지은 밥을 강된장과 함께 부드럽게 찐 호박잎에 싸먹으면 밥이 마냥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진다. 그까짓 맛이라는 것, 고작 혀 끝에 불과한 것이 이리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분수에 넘치게 비싼 음식이나 보기만 해도 뱃살이 오를 것이 걱정스럽게 기름진 양식으로 외식을 하고 나서 비위도 들뜨고 오장육부도 자리를 못 잡아 불편할 때 이걸로 입가심을 하면 비위와 속이 편안하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박완서 - 이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없다'에서.  

소설가 고 박완서를 시작으로 성석제(작가), 공선옥(작가), 주철환(PD), 김진애(도시건축가) 등 열 세 명이 풀어내는 음식에 얽힌 사연 모음집인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한길사 펴냄)을 펼쳐 읽노라니, 가을 찬바람이 본격적으로 느껴지던 10월 초 어느 날 떠올랐던 30여 년 전 콩 구워먹던 그 가을날의 풍경이 다시 떠올랐다.

힘들 때 누가 사준 밥, 그 음식을 유독 잘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을 알고 있어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유독 생각나는 어떤 음식, 생일날처럼 특별한 날과 함께 생각나는 음식, 늘 먹고 자라 식상했으나 이제는 그리운 맛이 된 어머니의 음식 등 우리들은 누구나 특별한 음식과 관련된 기억과 추억을 몇 개쯤은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나처럼 위로를 받거나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할 것이다.

책 제목만으로도 누구든 특별하게 간직하고 있는 먹을 것과 관련된 사연들을 떠올리게 할 그런 이야기들이다. 소설가 최일남씨는 고향의 맛과 전주콩나물해장국과 전주비빔밥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성석제씨는 좋은 이웃 덕분에 운 좋게 맛볼 수 있었던 원조 묵밥 이야기를, 공선옥씨는 너무나 가난했던 성장기를 '밥으로 가는 먼 길'이란 제목으로 들려준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먹는 것을 포기하면서 산다"

만화가 홍승우씨는(<비빔툰> 저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따뜻한 밥상을 생각했다, 하지만 출근 시간이 너무 늦었다, 아침을 거른다, "젠장, 먹고 살기 되게 힘드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먹는 것을 포기하면서 산다'와 같은 내용의 만화를 시작으로 빠삐용의 특별한 음식 등 '음식에 대한 열 가지 공상'을 만화로 들려준다.  

그리고 방송인 주철환씨는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어느 집에 양자로 갈 뻔했던 일을 '바나나를 추억하며'란 제목으로 들려준다. 내게도 바나나가 비싼 과일이었던 어느 겨울 난생 처음으로 먹었던 특별한 사연과 동네 어떤 아줌마가 걸핏하면 우리 집에 와 7남매 중 넷째인 나를 서울 잘 사는 집에 보내자고 꼬드기곤 했던 아찔한 기억이 있던 터라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을 많이 떠올리며 읽은 글이다.

'보통 연어나 복어 같은 해산물과 샤브샤브(얇은 고기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칠 때 나는 소리가 '샤부샤부'처럼 들린다 해서 붙여진 이름)할 때 재료로 쓰이는 얇은 돼지고기·쇠고기 등은 살짝 익혀 먹고, 닭고기는 푹 끓여 먹는다. 나베의 종류에 따라 국물의 맛을 내는 방식이 다르고, 주재료에 따라 나베의 이름은 수십 가지나 넘는다. 그래서인지 나베요리의 시작에 대한 설도 여러 가지다. 그중 몽골군의 '투구요리'가 그 출발점이라며 많은 일본 요리의 뿌리는 대륙에서 시작되었다는 중국유학생의 이야기가 근거는 없지만 제일 그럴듯하다.

서양까지 정벌에 나섰던 칭기즈칸의 군대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먹는 문제'였는데, 한 재치 있는 병사가 해결책을 내놓는다. 쓰고 다니는 투구에 물을 끓인 다음 주위의 동물과 그 지방의 갖은 야채를 넣고 익혀 간장류를 찍어먹어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 요리가 일본까지 전해져 '샤브샤브', '나베' 등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일본의 <만국사물기원역사>(1884)라는 책에도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전혀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에서.

오사카에서 재일동포가 가장 많이 산다는 한 빈곤지역의, 밥 한 끼 해먹기 힘든 5평 정도의 공간에 살았던 고경일씨(시사만화가)가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먹는 샤브샤브를 처음 맛봤던 사연을 샤브샤브의 기원과 비명횡사요리로 통하는 장코나베, 일제강점기 끌려가 노동을 착취당한 조선인들로부터 시작됐다는 모쓰나베(호르몬나베) 이야기와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는 샤브샤브를 좋아하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좋을 것 같다.

잊지 못할 밥 한 그릇 그 사연은 물론, 이처럼 음식 관련 읽을거리도 쏠쏠한 이 책은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박완서 외 12인) | 한길사 | 2015-09-21 | 13,000원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박완서 외 지음, 한길사(2015)


태그:#음식, #한끼, #밥, #박완서, #샤브샤브(나베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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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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