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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데레 궁전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미

벨베데레 궁전 상궁
 벨베데레 궁전 상궁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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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벨베데레로 가는 목적은 그곳에 있는 오스트리아 미술관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다. 벨베데레 궁전은 2007년부터 오스트리아 미술관 벨베데레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드웨어로서의 궁전도 중요하지만, 소프트웨어 중심의 미술관도 별도의 조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뜻이다. 벨베데레 미술관은 중세부터 바로크를 거쳐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벨베데레 궁전은 상궁(上宮: Oberes Belvedere)과 하궁(下宮: Unteres Belvedere)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궁은 중세부터 20세기까지 오스트리아 예술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층별로 동쪽과 서쪽 양 전시실로 나눠진다. 1층의 서쪽에는 중세 예술, 동쪽에는 현대 예술이 전시되고 있다. 2층의 서쪽에는 1900년 전후 빈의 예술, 동쪽에는 바로크와 19세기 초 예술이 전시되고 있다. 3층 서쪽에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예술, 동쪽에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비더마이어 예술이 전시되고 있다.

벨베데레 상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실이, 2층 서쪽에 있는 1900년 전후 세기전환기의 빈 예술이다. 이곳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키스(der Kuss)'가 가장 인기 있다. 2012년에는 클림트 탄생 150주년을 맞아 이곳에서 클림트 특별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하궁은 상설 전시공간이 아니고 특별 전시공간이다. 이곳에서도 2008년과 2011년 클림트 관련 특별전시가 열린 적이 있다.

벨베데레 하궁
 벨베데레 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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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데레에 들어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상궁이 있는 란트슈트라세(Landstrasse)쪽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궁이 있는 렌베크(Rennweg)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란트슈트라세에서 차를 내려 상궁 남쪽의 정원으로 들어간다. 남쪽 정원은 커다란 인공 연못을 중심으로 잔디를 깔고 그 위에 화단을 조성했다. 멀리서 보면 연못에 벨베데레 상궁이 반영되게 만들었다.

우리는 상궁 왼쪽에 있는 매표소와 안내 센터로 가 표를 끊고, 안내 팸플릿을 하나 얻는다. 상궁의 입장료는 14.5유로고 하궁의 입장료는 12유로다. 이 두 궁을 다 보려면 20유로짜리 벨베데레 티켓을 끊어야 한다. 우리는 상궁 표만 끊는다. 이제 상궁을 돌아 북쪽 입구로 향한다. 그런데 북쪽으로 약간 경사진 곳에 정원이 길게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하궁이 있다. 하궁 너머로는 빈의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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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데레 궁전은 빈의 도심인 링슈트라세(Ringstrasse) 외곽에 자리 잡고 있다. 상궁으로 들어간 우리는 1층을 생략하고 2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먼저 동쪽에 있는 19세기 초 예술을 보러간다. 가장 먼저 찾아간 그림이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다. 이 그림은 고전주의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1801년 그렸다. 원래 제목은 '높은 장트 베른하르트 고개 위의 보나파르트'이다.

이 그림에서 나폴레옹은 백마를 타고 망토를 걸친 모습으로 알프스산맥을 가리킨다. 나폴레옹이 이상적인 군인의 모습으로 과장되게 그려졌다. 말 사이로는 대포를 끌고 가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왼쪽 아래 바위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가장 위에 보나파르트(BONAPARTE)가 가장 선명하고, 그 아래 한니발(ANNIBAL)이 흐릿하다. 가장 아래 칼 대제(KAROLUS MAGNUS IMP)의 이름 역시 선명하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제목도 세 가지고, 그림도 5종이나 된다. 이들은 1800년에서 1802년 사이, 다비드가 다른 화가의 도움을 받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그림의 배경, 나폴레옹, 말의 색조가 조금씩 다르게 그려졌다. 이곳 벨베데레의 나폴레옹은 밝음과 어둠의 중간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의 크기는 232×275㎝다. 이들 5종의 그림 중 두 점은 프랑스에, 두 점은 오스트리아에, 한 점은 독일에 있다.

그 외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화가들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지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그림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산과 바다 등 자연풍경을 몽환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1822/23년에 그린 '엘베 산악지역의 바위 풍경'이 있다.

우리가 벨베데레 궁전에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이 궁전의 주인이었던 오이겐 왕자(Prinz Eugen: 1663-1736)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명장으로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718년 오스만군과의 전쟁을 통해 유럽의 동남쪽 발칸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다음 정치가, 외교관, 예술애호가로 활동했다.

그 때문에 1718년 슈펜(Jacob van Schuppen)이 그린 오이겐 왕자의 그림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1718년이면 예술사적으로 바로크 시대다. 바로크 화가로 우리는 렘브란트, 루벤스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지명도는 이들에 비해 떨어지지만 슈펜, 마이텐스(Martin van Meytens), 트로거(Paul Troger) 같은 사람들이 유명하다. 이들 화가는 초상화, 성화 등을 많이 그렸다.

세기전환기의 오스트리아 현대 예술운동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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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보고 우리는 대리석홀로 가 창문을 통해 정원과 하궁 그리고 비인 시내를 조망한다. 하궁은 상궁과 달리 붉은색 지붕이다. 그리고 왼쪽으로 빈의 상징 슈테판 성당이 보인다. 이제 우리는 벨베데레 미술관의 하이라이트 1900년 전후의 오스트리아 현대미술을 보기 위해 서쪽 전시실로 간다. 이곳에 있는 청년양식(Jugendstil)과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로 분류되는 그림들을 보기 위해서다. 청년양식이란 예술적인 혁신과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분리파는 기존의 보수주의, 역사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분리주의 운동이다.

이들은 크게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그 운동의 선봉에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있다. 이곳에 있는 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908년에 완성된 키스다. 이 그림은 키스를 통해 남녀간의 사랑을 찬양하는 것 같다. 이들 연인은 꽃으로 가득한 정원에서 남녀간에 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자세로 사랑을 즐기고 있다.

사랑하는 남녀는 황금 의상을 통해 하나로 합쳐져 있다. 수동적인 여인의 표정과는 달리 손은 은근하게 남자의 목과 손을 감싸고 있다. 이 그림은 에로틱하다기보다는 숭고하다. 그런 점에서 낭만주의가 추구하는 무한성과 동경이 느껴진다. 헛되다고 생각하는 삶과 일시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랑을 영원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사랑의 숭고성과 영원성, 그것이 키스의 주제다.

두 번째로 주목할 그림이 1901년 그린 유디트(Judith)다. 유디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 유대 땅을 파멸로부터 구한 과부다. 그녀는 앗시리아 군이 유대를 침입하자 적진에 투항해 적장과 연회를 즐기다 그 목을 베어온다. 그림에서는 대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가 등장한다. 그러나 클림트의 유디트는 절반의 드러냄을 통해 끔찍한 장면을 몽롱한 장면으로 바꾸고 있다.

클림트의 유디트
 클림트의 유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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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을 절반만 드러내준다. 그래서 죽었다기보다는 잠자는 듯한 모습이다. 유디트도 얇은 옷으로 몸의 절반을 가리고 있다. 이를 통해 숭고한 여인과 몸을 준 여인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다 드러난 얼굴 표정에서는 오히려 성적인 나른함이 표현되어 있다. 삶과 죽음을 묘사한 절박한 그림치고는 표정이 너무 몽롱하고 몽환적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내용과는 상당히 다르다. 클림트는 여기서도 역사주의(Historismus)를 비틀어 낯설게 하고 있다.

빈 분리파는 클림트,  칼 몰(Carl Moll: 1861-1945), 모저(Koloman Moser), 호프만(Joseph Hoffmann) 등에 의해 1897년 4월 창립되었다. 그들은 기존의 빈 예술동맹으로부터 탈퇴한다는 명분으로 분리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리고 1898년 제1회 분리파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05년 클림트, 모저, 호프만, 바그너(Otto Wagner) 등이 분리파를 탈퇴하면서 각자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클림트보다 말러를 좋아한 여인 이야기

알마 말러
 알마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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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전후 예술세계에서 우리는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1964)라는 여인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는 미술, 음악, 문학과 같은 인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인으로 당대 화가, 음악가, 작가들과 교류했기 때문이다.

알마 말러의 결혼 전 이름은 알마 쉰들러다. 그녀는 빈의 풍경화가로 빈 예술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에밀 야콥 쉰들러(Emil Jakob Schidler: 1842-1892)의 딸로 1879년 태어났다.

아버지의 피를 받아 그림에 재주가 있었고, 경제적으로 유복해지자 음악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3세 때인 1892년 아버지가 죽으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더구나 어머니가 1897년 아버지의 제자인 칼 몰과 재혼하자, 알마는 큰 충격을 받는다. 알마는 예술 특히 음악에 몰두하면서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이때부터 알마는 위기를 맞이하면 예술을 매개로 남성편력을 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상대가 구스타프 클림트였고, 두 번째 상대가 젊은 음악선생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다. 클림트는 1897년 칼 몰과 빈 분리파를 결성하면서 몰의 집에 드나들었고, 이때 알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알마는 클림트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마의 세 번째 상대가 세기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다.

그들은 1901년 빈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2년 알마가 구스타프와 결혼함으로써 예술을 통한 그녀의 남성편력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구스타프와 결혼한 후에도 알마는 미술과 건축에 대한 관심이 많아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그로피우스는 유망한 건축가로, 1919년 바이마르에서 건축학교인 바우하우스(Bauhaus)를 세웠다.

오스카 코코쉬카가 그린 칼 몰: 벨베데레 미술관
 오스카 코코쉬카가 그린 칼 몰: 벨베데레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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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남편 구스타프 말러가 죽었고, 그녀는 이듬해 4월 화가인 오스카 코코쉬카와 동거를 시작한다. 코코쉬카는 정열적인 남자였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3년간 뜨겁게 진행되다가 코코쉬카의 입대(入隊)로 끝나고 만다. 알마는 1915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정식 결혼한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의 관계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11월 알마가 유태인 출신의 표현주의 시인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을 만나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베르펠과 평생을 함께 산다.


태그:#벨베데레 궁전, #오스트리아 미술관 벨베데레, #다비드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빈 분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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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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