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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대전시민아카데미'는 20~30년씩 한 자리에서 묵묵히 일해 온 이 땅의 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연속 인터뷰한다. 땀 흘려 일해서 직장과 가정, 나아가 우리나라 경제를 지켜온 그들이 진정한 숨은 영웅들이다. [편집자말]
24년간 한국조폐공사에서 일해 온 최영복씨.
 24년간 한국조폐공사에서 일해 온 최영복씨.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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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년 동안 한국조폐공사에서 일해 온 최영복(54)씨는 돈을 보면 남다른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냥 다 제품으로 보이죠. 회사에서도 그렇게 보도록 늘 교육을 하고 우리들 스스로도 그렇게 보려고 해요. 안 그러면 사고납니다. 가끔 (회사) 밖에서 돈을 보면 '인쇄는 잘 됐나?' 하고 보게 됩니다."

지난 17일 인터뷰를 위해 <오마이뉴스>와 만난 최씨는 "저 같은 사람에게 뭐 들을 말이 있다고..." 하면서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20~30년씩 한 자리에서 묵묵히 노동으로서 이 땅을 지켜온 노동자들을 만나기로 마음 먹고 시작한 인터뷰. 그는 인터뷰 내내 "뭐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라면서 자신을 찾아 온 기자를 어색해 했다.

최씨는 1992년 친척의 소개로 알게 된 한국조폐공사 옥천조폐창에 입사했다. 당시 나이 30대 초반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택시기사를 해 오다가 조폐공사 내 운전직으로 입사하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일을 했죠. 처음엔 통근버스 운전도 하다가 어떤 때는 현금수송차량 운전도 했어요. 또 지게차 운전도 하고, 공장 내에서 쓰는 전동차도 운전하고... 뭐 그렇죠."

"돈 보면 '인쇄는 잘 됐나' 살펴보게 돼요"

'회사에서 일하는 게 힘들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에 최씨는 "힘들지는 않았어요, 남들도 다 하는 건데... 이 땅의 가장들은 다 힘들어도 참고 일하는 것 아니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힘들었다고 하면 그때가 제일 힘들었죠, 아내가 참 많이 울기도 했으니까..."라면서 아픈 기억을 쏟아냈다.

최씨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초기 일어났던 '한국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 당시 옥천조폐창의 노조쟁의지도부장을 맡았다가 '해고' 됐었다.

'한국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이란
IMF사태로 공기업 구조조정에 나선 정부는 1998년 한국조폐공사 충북옥천조폐창을 경북경산조폐창으로 통폐합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이에 노조는 강력 반발했고, 파업으로 맞섰다.

그런데 회사는 파업시작 1시간만에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3일 후 노조가 직장복귀 의사를 밝혔지만 직장폐쇄는 20일간이나 지속됐다. 이후 직장폐쇄를 철회했던 회사는 다시 조폐창 통폐합을 추진했고, 노조는 파업으로 맞서면서 5회 이상의 파업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결국 공권력이 투입되어 노조원들은 강제 해산되고 경찰에 연행됐다. 일부 노조간부들은 구속되기도 했다. 옥천조폐창은 결국 통폐합되고 말았고, 정부의 구조조정은 이를 계기로 탄력을 받았다.

그런데 파업이 끝나고 1년 후인 1999년 6월, 파업 당시 대검찰청 공안부장이었던 진형구가 대전고검 검사장으로 발령된 뒤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신 후 '조폐공사의 파업을 검찰에서 유도했다'는 발언을 하여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검찰은 내사를 통해 진형구 단독범행으로 결론을 내렸으나 여론은 더욱 거세져 결국 특검까지 가동됐다. 그러나 '파업유도는 무죄'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현재까지도 이 사건은 '의혹투성이'인 채로 남아있다.
해고된 그는 옥천조폐창 앞에서 천막을 치고 6개월 동안 농성을 해야 했다. 다행히 다시 복직이 되었지만 출근은 폐쇄된 옥천조폐창이 아닌, 경산조폐창으로 해야 했다. 집에서 2시간 거리를 처음에는 출퇴근했고, 후에는 주말부부를 해야 했다. 2년을 그렇게 일한 후 부여조폐창으로 발령이 났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죠. 아내가 노조 하지 말라고 말리기도 많이 했고, 울기도 참 많이 울었어요. 그때 막 집으로 정보과 형사가 들이닥치기도 하고 그랬으니까 얼마나 놀랐겠어요."

"애들도 어릴 때인데 집에도 못 들어가고 그러니까 저도 참 괴로웠습니다.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럴 수는 없잖아요.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인데, 어떻게 해서든지 복직을 해야 했고, 또 우리 동료들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이를 악물었었죠."

24년간 한국조폐공사에서 일해 온 최영복씨.
 24년간 한국조폐공사에서 일해 온 최영복씨.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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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는 휴직 중이다. 정년을 앞두고 1년을 휴직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앞당겨서 사용하고 있다. 10년 전 위암수술을 했었고, 2년 전에는 뇌경색으로 수술을 받았다. 건강이 안 좋아서 쉬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문제가 있는 노동현장을 누비고 있다.

인터뷰가 있던 이날도 한남대 청소노동자 파업 투쟁 현장을 찾아갔다. 또 한국타이어 노동자 정승기씨의 농성현장도 찾아가고, 최근 우리 지역의 최대 파업현장이었던 한국카모플라스트 투쟁현장에도 항상 같이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나 집회, 캠페인에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현재도 그의 전화기에는 '잊지 않겠습니다'의 상징인 노란리본이 달려있다.

"우리가 파업할 때 참 많이 도와줬어요. 지역사회 시민단체나 노조에서도 많이 도와줬고, 전국적으로도 많이 우리를 격려해줬죠. 저 나름으로는 그 빚을 갚으려고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어요.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150원 짜리 동전이 있다? "조폐공사용 동전은 있는데..."

한국조폐공사는 외부인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안에서의 일하는 풍경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돈을 만드는 일, 어떤 마음으로 일할까?

"우리는 절대 돈을 돈으로 안 봐요. '제품'으로만 보지. 만약 그것을 돈으로 보면 사고납니다. 예전에 한 직원이 100만 원을 들고 나가서 다 써버려서 난리가 난 적도 있어요."

조폐공사 회사 내에서는 돈을 소지할 수 없다고 한다. 회사에 일하러 들어가기 전 사물함에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넣어놓고 들어가야 한다. 그럼 회사 내에서는 돈을 쓰지 못할까? 그것은 아니란다. 커피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을 때가 있는데, 그때는 외국주화로 미리 환전해서 사용한다. 커피 값은 100원으로 저렴하다. 외국주화 단위에 억지로 맞춘 것 같기도 하다는 게 최씨의 추측이기도 하다.

한때 시중에는 '우리나라에는 150원 짜리 주화가 있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었다. 조폐공사 내 커피자판기 커피 값이 150원인데, 직원들이 돈을 소지할 수 없으니 150원짜리 주화를 만들어서 회사내에서만 사용한다는 말이었다. 그럴 듯한 말이었는데 최씨에게 확인한 결과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조폐공사 내에서만 사용하는 주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150원 짜리는 아니었다.

현재 그는 돈을 만드는 종이인 '무지'가 공장으로 들어오면 이를 옮겨서 인쇄한 후 절단하는 일을 하고 있다. 5만 원권, 1만 원권, 5천 원권, 1천 원권, 수표, 여권용지 등을 자르고 인쇄한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 화폐와 중국화폐도 만들어 수출하기도 한다. 다만 동전은 만들지 않는다. 동전은 오로지 경산조폐창에서만 만든다고 한다.

최영복씨가 2009년 활판사랑회 직원들과 함께 보령 천북이에서 찍은 사진.
 최영복씨가 2009년 활판사랑회 직원들과 함께 보령 천북이에서 찍은 사진.
ⓒ 최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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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힘들게 일한 그가 가장 보람이 있을 때는 빳빳한 종이돈을 시중에서 만날 때다. 돈을 보면 '내가 만들었지' 하는 자부심이 들기도 한다. 어떤 때는 얼마인지 보다 '인쇄는 잘 됐나'가 더 궁금하기도 하고, 낙서된 지폐를 발견할 때는 속이 상한다고 한다.

"우리 노동자 서민들은 참 모두들 힘들게 사는데 재벌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참 쉽게 돈 벌고 쉽게 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 조금 힘들거나 노조가 마음에 안 든다고 회사를 폐업해 버리고, 그러면 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어떻게 살라고... 그러면서 자기들은 그냥 앉아서 수백 억 수백천 억씩 꿀꺽하고... 노동가요에도 있잖아요. '일하지 않은 자여 먹지도 마라'라고요."

한평생을 노동자로서 살아온 소감을 묻자 최씨는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 노동의 대가를 업신여기는 사회풍토가 아쉽다고 그는 말하면서 "세상이 한 번 뒤집어졌으면 좋겠어요, 노동자 서민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게 말예요"라고 그의 간절한 바람을 토해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대학교 2학년과 고등학교 3학년인 딸들이 자신과 같이 힘들게 살지 않았으면 하는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아직까지 속 한 번 안 썩인 딸들이에요. 정말 고맙죠. 제가 해고됐을 때, 그리고 경산으로 다닐 때 아내나 아이들이 많이 힘들었는데 그 힘든 시기를 잘 견뎌줘서 고맙고, 지금처럼 바르게 커줘서 고마워요. 이제 한 가지 바라는 것은 자기들 하고 싶은 일 찾아서 잘 살아주는 것 뿐이고,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일했으면 하죠."

24년간 한국조폐공사에서 일해 온 최영복씨가 세월호 리본을 보여주고 있다.
 24년간 한국조폐공사에서 일해 온 최영복씨가 세월호 리본을 보여주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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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동학사에서 찍은 최영복씨의 가족사진.
 2007년 4월 동학사에서 찍은 최영복씨의 가족사진.
ⓒ 최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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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쌍용양회에서 일하셨던 아버지는 퇴직 후 공사현장에서 일하다가 65세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연세에도 젊은 사람들과 축구를 하고 매우 건장하시던 분이 하루아침에 그의 곁을 떠났다.

"그때는 엄청 놀랐어요. 참 자상하신 분이셨는데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늘 '정직하게 살라',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아버지가 나이가 들수록 참 그리워요. 저도 아버지처럼 훌륭하고 자상한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그의 눈빛이 젖어있었다. 그리고 세월호 리본을 내밀며 "부모가 되어서 어찌 그 일을 잊겠어요"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젖어있었다. 부모로서, 가장으로서, 노동자로서 한평생을 바쳐온 그가 가장 자랑스러운 '이 땅의 아버지'라고 믿는다.


태그:#노동자, #한국조폐공사, #최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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