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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당신이 늦게까지 근무하는 딸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는 걸 봤어요. 내가 "직장 생활에 매였으니 그러려니 해야지, 뭐"라고 했던 것 기억나죠? 근데 그게 우리나라 회사만의 특이체질이요, 돌연변이임을 알게 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소. 아들이 외국계 회사에 취직을 하고 나서 며칠도 안 돼서 깨달았으니 말이오. 아들은 취직하자마자 정시에 '칼 퇴근'을 했지 않소.

"까라면 까!"

이 무시무시한 말이 어디서 유래됐는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오. 이 사나운 말을 외국인에게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지 않으면 대단한 강심장의 소유자일 거요. 박정희로 시작해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면서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한 세력은 '군바리'(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군인 분들을 비하하는 의미는 절대 아님)였소. 그들의 세상에서 만들어진 언어가 "까라면, 까"이고요.

'까라면, 까!'... 깠는데 안 된다?

책 <한국에서 살아남기> 표지
 책 <한국에서 살아남기> 표지
ⓒ 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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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용서하오. 그때 직장생활이 다 그런 건 줄만 알았던 내 잘못을. 이처럼 우리네 문화와 외국의 문화가 직장에서부터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은 정치 군인이 조성한 사회의 "까라면, 까"식의 의식이 여기저기 배어있기 때문이오.

한국만 가지고 있는, 뒤집으면 자랑일 수도 있지만 결코 자랑거리가 아닌 '한국, 한국인'에 대해 한국사람 스스로 까발린 책이 있소.

이영노의 책 <한국에서 살아남기>(산눈 펴냄>가 어쩌면 그리도 우리의 문화적 특이함을 쏙쏙 잘 뽑아 늘어놓는지,

'상쾌, 통쾌, 명쾌' 그 자체라오. 저자는 "'까라면, 까.' 한국 근대의 금언이다. 이게 될까, 안 될까 판단하지 말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이다"라며, "한국인들은 마음만 단단히 먹고 의지만 충만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라고 일갈하오.

아마도, 새마을운동이며, '꿈은 이루어진다'며 운동장에서 펼쳤던 4강의 신화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드오. 우리는 그래서 군기가 빠지면 안 되고, 각종 운동선수도 모두 '태극전사'가 되어야 하오. '하면 된다' '칠전팔기' 등의 신화는 한동안 한국인의 자긍심이었던 게 사실이오. 그러나 저자는 한숨지으며 이리 말하오.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당연한 진리를 잃어버린 한국인은 그래서 불행하다. 안 되는 것도 다 되는 것으로 배웠기 때문에 언제나 안 되는 건 자신의 능력 부족, 의지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안 되는 게 안 됐을 뿐인데 한국인은 훨씬 크게 낙담하고 자신을 비하한다. 불행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본문 167~168쪽)

여보! 왜 퇴근을 늦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딸 대답이 가관이었지 않소. "('까라'는 명령을 내리는) 과장님이 자리에 앉아 있는데 어떻게 먼저 퇴근을 해요?"라고. 자신은 이미 자신이 맡은 일을 다 마쳤는데도 아직 일을 못 끝낸(능력이 못 미쳐서 일수도,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일수도 있다) 상사 때문에 퇴근을 못한다는 뜻이오. '까라면, 까라'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효율적 사고와 비판정신이 실종된 것이오.

"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왜'냐고 묻지 마라. 명령을 내린 장군님, 회장님, 선생님, 박사님, 판사님, 교수님, 형님…. 하여간 높은 분들이 상당히 불쾌해 하신다. 자꾸 따지고 들면 얼차려를 받으며 '정신 개조'를 당할지도 모른다."(본문 170쪽)

하하하! 이 기가 막힌 비아냥거림이 한국, 한국인의 모습이라는 게 웃픈(우습고 슬픈) 일이오. '하면 된다'고 외치던 한국인들이 이젠 점점 그래도 안 된다는 걸 알아버려서 불행해졌소. OECD 자살률 1위는 1등 좋아하는 한국인의 경쟁심 때문이라고 하면 위안이 되겠소? 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제대 날짜가 없는 군대에 입대했다고 생각하라"는 저자의 말은 저주에 가깝소.

한국엔 '종북인가, 종북 아닌가' 두 집단만 있을 뿐?

여보! 또 하나 우스운 건, 우리의 색깔이 검정색 아니면 하얀색이라는 거요. 물론 색이야 흐드러지게 많소. 허나 한국의 색깔 하면 검정 아니면 하양이오. 그렇듯 우리는 흑백논리에 몰입하는 놀이를 좋아하오. 저자는 이를 우리나라는 원래 반도였는데 섬나라로 만든 이북의 주석(主席) 때문이라고 해학적으로 말하오.

실제로 우리나라는 보수의 여당과 진보의 야당이 있는데, 그 반대자들은 '꼴통 보수'와 '좌익 빨갱이'라고 서로를 손가락질하오. 저자의 논리대로 하면, 김치찌개를 좋아하지 않으면 된장찌개를 좋아해야만 한다 하오. 다른 찌개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지요.

"그 많은 중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한국의 정치 집단은 딱 두 개로 나뉜다. 종북인가 아닌가, 두 가지 색깔밖에 없다. 화려한 색상의 60인치 UHD 텔레비전이 아무리 많이 팔려도 한국인의 눈에는 아직도 세상이 70년대의 흑백 TV처럼 보인다."(본문 109쪽)

허허! 여보, 이거 혀를 찰 노릇 아니오. 무상급식 문제가 불거지면서도 재정문제로 풀려는 사람은 없고, 종북이냐, 비종북이냐는 잣대를 들이밀기 일쑤요. 아이들 차별 말고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종북 좌파고, 잘 사는 아이들까지 무상급식은 안된다고 하면 종북 아닌 게 되오.

나와 다르면 '적'이 되는 사회

여보! 우리는 '우리 마누라', '우리 아이', '우리 엄마'라고 부르면서 연대감을 표현하오. 서양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한 일이오. 어찌 아내나 남편을 공유한단 말이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를 만들고, '우리'에 집착하는 이유는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요. 하지만 '우리'가 깨어지면 살벌해지지요.

일단 나와 다른 생각을 하면 금방 적이 되오. '우리'라는 단어는 순간에 사라지고 '너희'로 돌변하오. 우리에겐 '다른 생각'은 없소. 다만 '틀린 생각'만 있을 뿐이오.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 못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민족일지도 모르오.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민족이 OECD '2015년 더 나은 삶 지수' 중 '사회적 연계'가 꼴찌요. '우리'를 외치지만 '너희'의 삶을 사는 거지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들어야 하오. 절대 혼자 있으면 안 되오. 동창회에 들든지 어머니회에 들든지 하여튼 '우리' 속에 들어야 하오. 대한민국은 진 자를 용서하지 않소. 닥치고 이겨야 하오. 돈으로 성공이 평가되는 것도 우리만의 문화요.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는' 신세가 되고 마오.

여보! 책은 아홉 개의 칼럼을 통하여, 앞에서 말한 내용들 외에도 ▲ 동방예의지국이란 미명 하에 아랫사람의 도리가 강조되는 서열사회와 체면문화 ▲ 엄마보다 더 중요시되는 국가관 ▲ 세상이 모두 부러워하는(?) 1등만 알아주는 교육열 ▲ 치열하고 매몰찬 경쟁사회 ▲ 여성에 대한 차별 사회 등을 다루고 있소.

여보! 책을 읽었는데 내 공감도는 120%였소. 비아냥거리는 저자의 말들 속에 묻은 한국의 사소한 흠들은 그냥 지나가고 나면 분명히 치명타로 다가올 것들도 많소. 외국인이 보는 한국인보다 한국인이 보는 '한국, 한국인'은 더 날카로운 비수였소. 눈치! 그렇소. '알아서 기는' 사람만이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어,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은 뭔지 모르겠소.

덧붙이는 글 | <한국에서 살아남기>(이영노 지음 / 산눈 펴냄 / 2015. 8 / 198쪽 / 1만1000 원)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이 글에서 말하는 ‘여보’는 제 아내만이 아닙니다. ‘너’요 ‘나’요 ‘우리’입니다.



한국에서 살아남기

이영노 지음, 산눈(2015)


태그:#한국에서 살아남기, #이영노, #한국인의 의식,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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