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느티나무 바로 옆에 정자를 세운 군청입니다. 이렇게 정자를 느티나무 옆에 바싹 붙이면서 느티나무 굵은 가지가 무척 많이 잘렸습니다. 이 정자가 서기 앞서만 해도 가지와 잎이 빽빽했거든요.
 느티나무 바로 옆에 정자를 세운 군청입니다. 이렇게 정자를 느티나무 옆에 바싹 붙이면서 느티나무 굵은 가지가 무척 많이 잘렸습니다. 이 정자가 서기 앞서만 해도 가지와 잎이 빽빽했거든요.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처음 고흥에 와서 자리를 잡을 무렵, 읍내에 이런 멋진 나무가 있어서 아주 반가웠습니다. 그무렵 아직 기어다니던 작은아이는 나무 둘레를 볼볼 기면서 놀고, 큰아이는 나무를 타며 놀았습니다.
 처음 고흥에 와서 자리를 잡을 무렵, 읍내에 이런 멋진 나무가 있어서 아주 반가웠습니다. 그무렵 아직 기어다니던 작은아이는 나무 둘레를 볼볼 기면서 놀고, 큰아이는 나무를 타며 놀았습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전남 고흥 읍내에는 머지 않아 구백 살이 될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아이를 새로 낳고, 다시 한 번 아이를 낳을 무렵에는 천 살이 되겠구나 싶은 느티나무입니다.

이 나무한테는 천연기념물 같은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우람한 느티나무 둘레에서 이런저런 공사를 벌일 적마다 굵고 커다란 줄기는 아프게 잘립니다. 가게를 가린다든지 큰 짐차가 지나갈 때 걸리적거린다고 여기지 싶습니다. 지난해부터 이 느티나무 바로 옆에 정자가 생기면서 대낮부터 느티나무를 둘러싸고 술판이 벌어지기 일쑤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아기 적부터 우람한 느티나무한테 찾아가서 나무를 안거나 타면서 놉니다. 읍내에 볼일이 있어 찾아갈 적에 으레 들러서 나무한테 인사합니다.

나무가 있는 풍경

나무가 있는 곳하고 나무가 없는 곳은 바람이 다릅니다. 나무가 있기에 한결 짙푸른 바람이 붑니다. 나무가 없기에 더욱 땡볕이 따가우면서 메마른 바람이 흐릅니다. 나무가 우거진 길에는 새와 풀벌레가 찾아들어 싱그러운 노래를 베풉니다. 나무가 없는 길에는 자동차가 일으키는 먼지 바람만 가득하고 시끄럽습니다.

정부희님이 쓴 <곤충들의 수다>라는 책을 읽으니, "겨울이 오기 전 초가지붕의 볏짚을 갈았습니다. 썩은 볏짚을 걷어낼 때마다 헌 지붕 속에 있던 엄지손가락만 한 굼벵이가 지붕 아래로 뚝뚝 떨어졌지요. 그러면 어른들은 그 굼벵이를 집어 들어 산 채로 입에 넣고 꿀꺽 삼키셨습니다. 볏짚만 먹고 자라 몸에 좋고 생고구마 맛이 난다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261쪽)" 몹시 놀랐다고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어린 날 굼벵이한테 놀란 어린 계집아이는 딱정벌레와 풀벌레를 귀엽게 돌보면서 살피는 학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요즈음도 더러 느티나무를 찾아가지만, 이제 술잔치 어르신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아갈 마음이 거의 안 듭니다.
 요즈음도 더러 느티나무를 찾아가지만, 이제 술잔치 어르신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아갈 마음이 거의 안 듭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가만히 보면, 이제 볏짚으로 지붕을 이는 시골집은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이제 시골에서는 볏짚이 굵고 길며 튼튼한 나락을 심지 않아요. 짜리몽땅한 볏짚만 나오는 나락을 심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슬레이트 지붕을 올리게 했고, 요즈막에는 슬레이트가 '석면'인 줄 알아차려서 군청에서 목돈을 들여 철거해 줍니다.

지난날 시골 사람 시골집은 언제나 정갈하면서 싱그러운 나무와 흙과 돌로 지었습니다. 지난날 시골집을 손질하거나 고치거나 뜯을 적에는, 이 집에서 나오는 나무와 흙과 돌을 얼마든지 되쓸 수 있었어요. 지붕을 잇던 낡거나 묵은 짚은 새로운 거름이 되어 새로운 흙으로 돌아갔어요.

이와 달리 오늘날 집은 시골이나 도시 모두 시멘트나 슬레이트나 쇠붙이나 스티로폼이나 플라스틱을 아주 많이 씁니다. 오늘날 집은 조금만 손질하거나 고치더라도 쓰레기가 나오고, 오늘날 집에서 나오는 시멘트나 석면은 되쓸 수 없는 끔찍한 말썽거리가 될 뿐입니다.

시골길을 걸으면서 책을 보는 큰아이.
 시골길을 걸으면서 책을 보는 큰아이.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생명은 다 같은 것. 사람이나 벌레나 새나 개구리나 모두 살아 숨을 쉰다는 건 아름다운 것입니다." (114쪽)

같은 생각을 가슴속에 품으면서 산다면, 우리는 어떤 집을 지으면서 살까요? 앞으로 쓰레기가 될 말썽거리를 벽이나 지붕에 올리면서 살까요, 아니면 앞으로 새로운 흙이 될 숨결로 집을 감싸면서 살까요?

냇물이 맑게 흐르니 냇물을 길어다가 마시고, 냇물에서 빨래할 수 있습니다. 냇물이 맑게 흐르니 다슬기와 가재와 미꾸라지가 살고, 다슬기와 가재와 미꾸라지가 사는 냇물 둘레에서 개똥벌레가 깨어나서 춤을 춥니다. 그런데 맑은 냇물은 흙하고 자갈로 바닥을 이룬 곳에서 흐릅니다. 시멘트로 바닥을 댄 자리에서는 맑은 물이 흐를 수 없습니다.

흙하고 자갈은 물살에 쓸려 바다로도 흘러가면서 바다를 기름지게 가꾸기도 하지요. 이리하여, 숲이 튼튼하고 아름다울 적에 바다도 튼튼하고 아름다우면서 깨끗하기에, 바다에 온갖 물고기가 많이 삽니다. 숲이 무너지거나 온통 시멘트 투성이에 석면 투성이라면, 바다까지 망가지면서 온갖 물고기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아요.

오늘 나는 이곳에서 구백 살 가까운 나무와 이웃이 되어 지냅니다. 우리 아이들하고, 또 이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은 앞으로 천 살 가까운 나무와 이웃이 되어 지내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아이들이 다시 태어나고 거듭 태어날 무렵에는 천 살을 웃돌고 이천 살로 나아갈 나무하고 이웃이 되어 지내기를 꿈꿉니다.

어느덧 조용한 가을입니다

우리 집을 떠나려고 하는 새끼 제비. 씩씩하게 날아오르렴
 우리 집을 떠나려고 하는 새끼 제비. 씩씩하게 날아오르렴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아직 날갯짓이 익숙하지 않은 새끼 제비가 빨랫줄에 앉으니, 작은아이가 천천히 다가서면서 제비를 지켜본다.
 아직 날갯짓이 익숙하지 않은 새끼 제비가 빨랫줄에 앉으니, 작은아이가 천천히 다가서면서 제비를 지켜본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제비는 아무 곳으로나 돌아오지 않습니다. 먹이가 넉넉하고 숲과 들이 아름다우며 사람들이 따스한 마음으로 어우러지는 마을로 돌아옵니다. 아이들은 아무 곳에서나 놀지 않습니다. 맨발로 뛰놀 수 있고 자동차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마음껏 노래하며 웃을 수 있는 곳에서 놉니다.

구백 살 가까운 느티나무는 굳이 천연기념물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구백 살 가까운 느티나무 둘레에서 막걸리이든 소주이든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다만, 나무가 왜 우리 곁에 있을 때 삶이 아름다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무 한 그루만 천연기념물로 삼을 노릇이 아니라, 온 누리 골골샅샅 온갖 나무가 우거지면서 어디에서나 나무 그늘을 누리고 나무가 베푸는 짙푸른 바람을 마실 수 있어야 해요. 우람한 나무 둘레에서 어른들끼리 술판만 벌이지 말고, 우람한 나무 둘레에서 모든 아이가 까르르 웃고 떠들면서 맨발과 맨손으로 나무를 타며 놀 수 있어야지요.

아이들이 맨발로 놀지 못하는 곳이라면 어른들도 맨발로 일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 놓고 드러나워 하늘바라기를 하며 일손을 쉬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싱그러이 노래하지 못하거나 개구지게 뛰놀지 못하는 곳이라면 어른들도 오순도순 모여서 두레나 품앗이를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마음 가득 기쁜 사랑을 길어올리면서 노래잔치나 밥잔치나 마을잔치를 하지 못합니다.

도서관 한쪽에 커다란 상자를 놓으니, 두 아이가 커다란 상자에 들어가서 저마다 새로운 놀이를 찾아서 놉니다. 자동차 없는 길을 걸어가면서 만화책을 손에 쥡니다. 여름이 저물며 우리 집을 떠나는 제비를 마지막으로 지켜봅니다. 그저 신나게 논둑길을 달립니다. 어느덧 조용히 가을입니다.

우리 도서관에서 상자놀이를 하는 두 아이.
 우리 도서관에서 상자놀이를 하는 두 아이.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여름은 조용히 물러서고 가을로 접어들려고 한다. 시골순이와 시골돌이는 언제나 저만치 멀리 앞장서서 논둑길을 걷는다.
 여름은 조용히 물러서고 가을로 접어들려고 한다. 시골순이와 시골돌이는 언제나 저만치 멀리 앞장서서 논둑길을 걷는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라도닷컴> 2015년 9월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구백 살 나무, #시골도서관 풀내음, #시골도서관, #느티나무, #고흥 이야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