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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31살. 나의 첫 해외여행은 시작되었다. 국내 이곳저곳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해외여행에 대한 로망은 그렇게 크진 않았다. 어디로 갈까? 딱히 그때까지 나를 매혹하는 나라,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그러다가 2002년에 다큐멘터리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았다. 영화에서 도로까지 넘어오는 말라콘의 파도를 가르는 낡은 자동차의 질주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쿠바의 아바나가 첫 로망이 되었다. 쿠바로 향하는 걸음은 조금 확장되어 남미의 몇 나라를 더 둘러 보는 2달 반 정도의 여정으로 늘어났다.

서툴렀기에 '여행자' 같았던 시간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참 어수룩한 실수투성이 여행자였다. 해외여행이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당시만 해도 인터넷 정보라는 것이 요즘 같지 않았고, 구글맵 같은 것은 꿈도 못 꿨다. 인터넷에서 겨우 찾은 한 아저씨의 남미 여행기를 프린트하고,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영문 '론니 플래닛' 여행 책자 한 권에 의지하여 길을 나서는 것이 전부였다.

미리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예약하는 일 따윈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때그때 여행지에 도착해 안내 책자에 나오는 호스텔 중 가장 저렴한 곳 위주로 지도를 보고 찾아다녔다. 일일이 가격을 묻고, 방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먼 여행지에서 한 달 정도 함께 동행한 사람과의 의견 조율에도 서툴렀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일은 항상 어려웠으며 처음 경험하는 도미토리(공용침실) 숙소도 초기에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랬기에 우연히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계획은 수시로 변경됐지만, 그랬기에 완벽하지 않은 길 위의 모험이 가능했다는 생각도 든다.

멕시코를 거처 쿠바, 칠레 남쪽으로의 여행. 어설프고, 실수투성이에 조급하고 불안한 맘으로 여행을 이어가다가 도착한 칠레 북쪽 아타카마 사막의 오아시스 마을 '산 페드로'의 한 호스텔에서 짐을 풀었다. 호스텔 정원의 테이블에 앉아 여행노트를 꺼내 끄적끄적 메모하는데 문득 밀려왔던 한없는 '평화'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 여행노트에 이렇게 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구나. 더 바랄 게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10년 전 머릿속에 박힌, 남미의 두 장면

작년 어느 방송의 프로그램에서 40대 청춘들의 페루여행이 나왔을 때, 마추픽추를 보며 새삼 남미여행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잉카트레일을 따라 4일을 걸어 만났던 페루의 마추픽추. 보고 있으면서도 현실 같지 않았던 볼리비아의 소금사막 우유니. 소설이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뭔가 인류의 로망처럼 남아있는 칠레 파타고니아.

수많은 풍경이 지나치게 거대하게 다가왔던 여행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당시 남미여행 사진 중 몇 장을 고르라면 선택하는 두 장의 사진이 있다.

하나 - '말라콘의 가장', 쿠바, 아바나

쿠바 말라콘 해질녘, 저녁거리를 들고 귀가하는 젊은 가장.
▲ 쿠바의 가장 쿠바 말라콘 해질녘, 저녁거리를 들고 귀가하는 젊은 가장.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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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여행의 이유였던 쿠바. 쿠바를 생각하면 공항에 내려 밖에 나왔을 때 맡았던 묵직한 시가 냄새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 싶었던 말라콘. 아바나에 있는 동안 매일매일 말라콘에 나가 사람들 구경을 하는 것이 여행의 일상이었던 어느 날 저녁. 해 질 무렵까지 낚시를 하던 한 젊은 남자가 잡은 고기 하나를 메고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거리라고, 아들 한 명이 있다던 그는 고기 한 마리로 저녁을 해결했을까? 아바나에 있으며 식량과 물품의 부족을 실감했던 쿠바의 삶. 당시 누군가 여행자에게는 천국이요, 쿠바인에게는 지옥인 곳이 바로 쿠바라 했다.

최근 미국과 수교 정상화를 한 쿠바는 많이 변해있지 않을까 싶다. '변하기 전에 쿠바를 여행해야 한다', '진짜 쿠바는 이제 볼 수 없을 거다'라며 여행자들은 쿠바의 변화에 반갑지 않은 반응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여행자들의 이기적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부정적 변화의 우려가 있긴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숨통을 틀 필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쉽지는 않겠으나 지킬 것과 얻을 것이 잘 조화된 변화를 바랄 뿐이다.

둘 -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도시, 그 땅 아래의 삶. 볼리비아 포토시

해발 4000m, 하늘 아래 고단한 광부들의 삶.
▲ 포토시 해발 4000m, 하늘 아래 고단한 광부들의 삶.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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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볼리비아에선 우유니 소금사막만 보고 페루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볼리비아 사람들에게 반하여 수크레를 거처 포토시, 라파스까지 좀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기대하지 않고, 그때그때 맘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나에게 많은 울림을 준 나라였다.

특히 은 광산으로 유명했던 도시 포토시.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도시로 불리는, 해발 4000m가 넘는 고산 도시이기도 하다. 예전 스페인 식민지 당시 최고의 부를 누리던 도시였다. 그러나 그만큼 원주민과 노예들의 학살도 많았던 곳이며, 지금은 당시의 부를 찾아볼 수 없는 가난한 도시다. 광산은 많이 폐쇄되고 몇몇만 남아있다.

이곳에서 여행객들은 3시간 정도 광산 체험을 할 수 있는데, 들어갈 때 코카잎과 80도에 가까운 공업용 알코올을 사서 간다. 그것이 그곳 광부들의 점심 식사였다. 고산에 지하. 산소량이 급격히 부족한 공간에서 씹고 있던 코카잎을 바꿔 물고, 공업용 알코올을 마시며 버티는 삶. 그런 삶을 20년, 30년 이어간다고 했다.

스페인에선 뭔가 정말 큰 가치가 있을 때 "포토시 만큼의 가치"라는 말을 하곤 한다. 처음 그 표현을 들었을 때 내가 보았던 포토시가 생각나서 조금은 기분이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남미를 만나며...

칠레의 남쪽 마을 뿐따 아레나스의 한 광장에는 마젤란 동상이 있다. 그 발을 만지면 그곳에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내가 그곳에 갔을 때 그 광장은 공사 중이어서 막혀있었다.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리려는데 공원 앞 벤치에 앉아계시던 노부부가 무슨 일이냐 물으셨다(스페인어로 하셨는데 당시 스페인어를 전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물으신다고 생각했다).

동상 한 번, 내 발 한 번. 그렇게 가리키며 안타까움을 설명했더니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막아놓은 보호대 아래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그러고는, 두 분이 망을 봐주셨다.

사실 그때 마젤란의 발을 만지며 기념사진을 찍을 때, 다시 돌아올 거라는 기대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다시 돌아온 것은.

지금도 여전히 그 노부부는 공원 앞 벤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실까. 만약 그렇다면 이제는 스페인어로 그때 참 고마웠다고, 그래서 여기 다시 왔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텐데...

10년전 마젤란 동상의 발가락, 그래서 다시 돌아왔을까?
▲ 마젤란의 발 10년전 마젤란 동상의 발가락, 그래서 다시 돌아왔을까?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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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여행은 나에게 스페인어를 배우게 했고, 여행 후 5년 뒤 스페인으로 떠나 5년을 살아보는 시간을 선물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다시 남미로 걸음을 옮기게 했다. 마치 10년 전의 여행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야 비로소 어쩌면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은 다르게 보고, 만나게 될 이 여행. 또 어떤 10년의 새로운 여행을 만들어 줄지 무척 궁금해하며 나는 다시 남미 땅에 서 있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태그:#남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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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예술치료, 스페인 문화&언어, 글쓰기로 삶의 형태를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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