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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난민 문제를 다루는 뉴스를 제외하면, 독일 베를린에서 연일 뉴스를 장식한 것은 주택난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난 기사(세입자들의 도시, 베를린의 반란)에서 소개한 베를린 세입자 주민투표 단체(이하, 세입자 단체)의 주민투표를 향한 대장정이 시작된 이후 이를 둘러싼 많은 일이 있었다.

베를린시 사회민주당(SPD) 간부회의에서는 베를린시의 새로운 주거 정책 계획안을 담고 있는 "십계명(die zehn Gebote)"이라는 제목의 10가지 주거 관련 정책에 대한 내부 토의도 있었다. 내용은 근본적으로의 세입자 단체의 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 정부의 제안은 세입자 단체의 것보다 더 진보적이기도 하였다.

세입자 단체, 정부와의 타협안 만들어내다

세입자 단체가 베를린 공대 멘자 앞에서 서명 운동을 하고 있다.
 세입자 단체가 베를린 공대 멘자 앞에서 서명 운동을 하고 있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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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세입자 단체가 수집한 4만8531명의 서명이 베를린 시 정부에 제출되었다. 그중 4만214명의 유효 서명이 확인되었고, 이는 주민투표 역사의 신기록으로 남았다. 그만큼 베를린에서 주택 문제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사안이란 것을 여실히 보여줬고, 동시에 시 정부의 주택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었다.

또한, 무효표의 대부분이 독일 국적만 없을 뿐이지, 베를린에서 오랜 세월 일하고, 월세를 내고, 세금을 내온 사람들의 표였다는 것도 이슈로 떠올랐다. 이는 세입자의 권리를 넘어서, 누가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권리의 문제로 다시금 조명받기도 하였다.

그 외의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정부가 주민투표 일정을 의도적으로 늦추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베를린 세입자 주민투표는 시의회 투표와 동시에 치르기 위한 일정으로 계획이 되어있다. 이는 세입자 단체의 입장에서는 지난 템펠호프 공원 개발을 둘러싼 주민 투표 때, 유럽 의회 투표와 함께 진행되어 더 많은 시민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었던 좋은 선례를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원하던 개발을 추진하지 못한 안 좋은 사례였다. 이번 주민투표가 시의회 투표와 함께 이루어질 경우, 현재 주택 문제를 원활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집권당인 사회민주당(SPD)과 연정 파트너인 기독민주당(CDU)의 의석 확보에 유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의도적으로 투표 기일을 늦추거나 주민투표 자체를 무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시의회가 세입자 단체의 법률안 검토하면서 법률적 문제점이 지적되었고, 세입자 단체는 이에 맞춰 수정안을 제출하기도 하였지만, 수정안 중 일부는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하였다. 주민투표법에 따라, 내용 자체가 아예 바뀌지 않는 선에서 부족한 점을 보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세입자 단체의 수정은 반려되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시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사회주택을 사들이는 의무에 관한 부분이었다. 주택을 사들이는 가격 기준이 없어 시장 가격 이상으로 사들이게 될 수도 있다는 지적에 따라, '시장가격 이하'라는 보충 안을 제출했지만 반려되었다.

일련의 문제점들은 법률안이 제출된 6월 이후 차례로 불거져 나온 사실이다. 6월부터 12월까지 제출된 법률안에 대한 시 의회의 검토가 진행되기 때문인데, 이 기간 동안 법률 검토와 동시에 시 의회와 세입자 단체는 주민투표에 대한 대화를 공식적으로 나누게 된다.

그런데 지난 8월 18일 놀랍게도 주민투표가 없어도 될 만한 정부와 세입자 단체 간의 타협안이 발표되었다. 정부도 세입자 단체도 모두 만족한다는 의사를 표현한 타협안이었다. 물론 세입자 단체 소속 활동가들 중 몇몇은 여전히 타협안에 대해 의심하거나 걱정하고 있기도 하다.

베를린의 사회적 주택 공급의 새로운 방향의 타협안 골자는 다음과 같다.

사회적 주택 공급 법률안 요약 내용

1. 사회주택 거주자의 칼트미테(난방비, 전기세, 관리비 등이 포함하지 않은 순수 집세를 의미)가 세후 소득의 30%를 넘는 경우, 시 정부가 나머지 소득을 부담한다.

2. 시영 주택회사의 신규 임대 주택에 한해 55%의 주택을 주택보조금(WBS)을 신청한 사람에게 임대하고, 그중 20%는 난민, 노숙자 등의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다.

3. 시영 주택회사를 공공의 법을 따르도록 하여, 사회주택의 무분별한 매매를 통한 사유화를 막는다.

4. 세입자 대표가 감독위원회에 참여하여 거주민의 권리를 높인다.

5. 신규 주택 공급을 위한 새로운 펀드를 조성하여, 주택 매입 및 기존 주택 수리 비용 그리고 신규 주택의 30%는 사회주택으로 공급하는 데 활용한다.

타협안의 골자는 누가 보더라도 세입자 단체의 법률안이 다수 반영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타협안에 대한 걱정과 불신도 있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월세뿐만 아니라 점점 높아지는 부대비용과 관리비에 대한 대책이 부재하다는 점, 9명으로 구성된 감독위원회에서 고작 1, 2명의 세입자 대표의 영향력이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 주민투표를 위해 서명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정말로 이 타협안에 동의하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 등이었다.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야

코티 남쪽 구역에 위치한 게체콘두에도 세입자 단체와 연대하기 위해 포스터가 붙여 놓았다.
 코티 남쪽 구역에 위치한 게체콘두에도 세입자 단체와 연대하기 위해 포스터가 붙여 놓았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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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총 1조 8천억 원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법안은 문제가 없다면, 늦어도 10월 초까지 시의회의 검토를 거치게 되고, 11월에 정식으로 발효되며, 내년 1월부터 시행되게 된다.

물론 세입자 단체의 운동은 시 정부와의 타협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타협안 혹은 주민투표라는 첫 단계가 끝나면 이들은 이번 정책에서의 교훈과 자료를 바탕으로 베를린 시민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새로운 세입자 관련 정책과 법안을 위한 새로운 단체를 조성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언제나 돈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한다. 오랫동안 가난한 도시로 알려진 베를린에서도 정치권에서 단골 메뉴처럼 등장한 말이다. 하지만 그 어떤 가난한 도시에서도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말로 부족한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철학 혹은 정책, 이를 받쳐줄 실현 능력 그리고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도시 베를린의 시민들은 하나, 둘 살기 좋은 도시를 위한 노력을 시작하고 있다.

지난 7월 15일에는 비짐 바칼 채소 가게를 위한 거리 행진 시위가 있었다. 세입자 연합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시 관련 단체들이 거주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행진에 함께 참여하며 함께 연대하였다.
 지난 7월 15일에는 비짐 바칼 채소 가게를 위한 거리 행진 시위가 있었다. 세입자 연합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시 관련 단체들이 거주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행진에 함께 참여하며 함께 연대하였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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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정치권이 하던 말과 현재 그들이 하는 말을 비교해보면, (세입자 단체의 운동은) 정치를 우리 쪽으로 이끄는데 큰 걸음을 내민 것이다."

세입자 단체의 대변인이자 설립자인 타헤리(Taheri)씨가 지난 8월 19일 수요일에 타협안에 관한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주거권, 세입자의 권리 그리고 나아가 시민들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한 베를린 시민들의 싸움은 단순히 몇 푼의 월세를 보조해 주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것은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 정치가 작동하는 목적과 방식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공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시민들의 공통 가치를 만들어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태그:#독일, #베를린, #세입자, #주거,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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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과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1. 유튜브: https://bit.ly/2Qbc3vT 2. 아카이빙 블로그: https://intro2berlin.tistory.com 3. 문의: intro2berlin@gm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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