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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나주목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금성관. 나주목사가 읍성 안을 돌아보면서 업무를 보던 공간이면서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들이 묵어가던 곳이었다.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망궐례를 행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옛 나주목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금성관. 나주목사가 읍성 안을 돌아보면서 업무를 보던 공간이면서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들이 묵어가던 곳이었다.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망궐례를 행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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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여름방학이 끝나간다. 학생들, 특히 초등학생들의 방학 과제물로 빠지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가족여행이나 견학을 주제로 한 보고서다. 이것에 대해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의외로 많다. 어디로 가고,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그래서 미루다가 개학을 앞두고 부산을 떨기 일쑤다. 방학을 하자 마자 미리 챙겨보면 좋으련만.

딸아이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전라도 나주로 간다. 가족여행이나 답사를 하고 보고서를 쓰기에 좋은 곳이다. 지난 7월 28일 찾아간 나주는 '천년고도', '목사고을'로 불린다. 나주목이 설치돼서 목사고을, 나주목이 1000년 가까이 유지돼서 천년고도로 불리고 있다.

나주목(羅州牧)은 고려 성종(983년) 때 설치된 전국 12목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전라도에는 전주와 나주, 승주에 목이 설치됐다. 나주목은 1896년 나주관찰부가 폐지될 때까지 1000년 가까이 이어졌다. 전라도 지명도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온 것이다. 나주의 역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지명이다.

1872년 당시 나주목의 지도. 당시 나주읍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나주목문화관에 전시돼 있다.
 1872년 당시 나주목의 지도. 당시 나주읍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나주목문화관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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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인형으로 만들어진 당시 나주목사의 행차 모습.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 행렬을 보는 것을 유일한 관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나주목문화관에서 만난다.
 밀랍인형으로 만들어진 당시 나주목사의 행차 모습.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 행렬을 보는 것을 유일한 관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나주목문화관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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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牧)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방행정 단위였다. 고려 때 중앙집권 정책의 하나로, 지방의 주요 거점 12곳에 목을 설치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나주목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광역 시·도가 될 것 같다. 당시 나주목에서는 무안, 담양, 곡성, 낙안, 남평 등 5개 군과 회진, 반남, 복룡, 창평, 장산, 진원, 화순 등 모두 11개 속현을 다스렸다.

12목이 설치된 뒤 35년 만인 고려 현종 때(1018년) 전국을 8목으로 개편하면서 승주목이 없어졌다. 하여, 나주는 전남지방의 유일한 중심 고을이 됐다. 이후 1895년 행정제도 개편으로 나주관찰부가 됐다가, 이듬해 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나누고 전남도청이 광주에 설치될 때까지 913년 동안 전라남도의 중심지였다. 역사가 아주 깊은 고을이다. 그 변천사를 나주목문화관에서 엿볼 수 있다.

네 명이 끄는 사인교에 올라앉아 행차하는 나주목사. 피상과 군기, 의장기, 관인, 병부, 교서, 유서에 이어 취타대, 기마군관, 나졸 뒤에 서 있다.
 네 명이 끄는 사인교에 올라앉아 행차하는 나주목사. 피상과 군기, 의장기, 관인, 병부, 교서, 유서에 이어 취타대, 기마군관, 나졸 뒤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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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문화관은 천년고도 목사고을을 설명해 주는 전시관이다. 나주목의 객사였던 금성관과 나주목사의 관사이면서 살림집이었던 목사내아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 큰 고을에 뒀던, 지방행정 단위인 목에 대해서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각종 조형물과 사진, 그래픽 등을 이용해 전시를 해놓았다. 8개 주제관으로 이뤄져 있다.

당시 목사의 부임 행차 모습이나 하루 일정까지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나주목과 목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나주목사의 행차 행렬은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그 옆에 설명까지 붙여 놓았다. 이것을 하나하나 대입시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마디로 대단한 위용을 갖춘, 장관이었다.

행렬도 어마어마하다. 목사에게 귀중한 문서와 장부가 들어있는 가죽상자(皮箱)를 맨 앞에 세우고, 군기와 의장기가 뒤를 따른다. 목사의 관인, 목사가 군대를 동원할 때 쓰는 병부(兵符), 왕에게서 받은 교서(敎書), 관원에게 내리는 유서(諭書)가 그 뒤를 잇는다. 이어 취타대, 기마군관, 나졸이 따른다. 그 다음에 목사가 탄 가마(四人轎)가 배치되고, 사인교 뒤로 목사를 보좌하는 각종 관원들이 따르고 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목사의 행차를 구경하는 것을 유일한 관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목사가 지나가는 앞에서는 서민은 물론 여염집 여인들까지도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야 했다. 목사의 잦은 교체는 많은 민폐를 끼쳤다. 신임 목사에게 그 지방의 산물을 예물로 올려야 한 데다 관아나 내아의 단장과 수리, 영접에 수많은 인원이 동원됐으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옛 나주읍성의 모습. 읍성의 둘레가 3679m, 면적이 97만4390㎡나 됐다. 동서남북 네 곳에 성문이 있었다. 나주목문화관에 만들어져 있다.
 옛 나주읍성의 모습. 읍성의 둘레가 3679m, 면적이 97만4390㎡나 됐다. 동서남북 네 곳에 성문이 있었다. 나주목문화관에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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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나주목의 상징인 금성관. 박석이 깔린 너른 마당 너머에 객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옛 나주목의 상징인 금성관. 박석이 깔린 너른 마당 너머에 객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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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주읍성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고려시대에 쌓았고 조선 세조(1457년) 때 확장했다. 임진왜란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거쳤다. 읍성의 둘레가 3679m, 면적이 97만4390㎡(29만5000평)으로 넓었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동점문, 서성문, 남고문, 북망문)가 있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 의하면, 나주읍성을 중심으로 1361가구 4662명이 살았다고 한다. 이 읍성의 금성관을 중심으로 하는 객사가 있었다. 나주목사가 정무를 봤던 동헌(정수루, 목사내아)도 있었다.

나주에는 당시의 유적이 일부 남아 있고 복원돼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금성관이다. 나주목의 객사였다. 목사가 읍성 안을 돌아보면서 업무를 보던 곳이다.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들이 묵어가던 곳이기도 했다.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행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금성관은 조선 성종 때인 1470년대 후반에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강점기 땐 나주군 청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많이 훼손된 것을 1976년에 해체해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해 놓았다. 출입문인 망화루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박석이 깔린 너른 마당이 펼쳐진다. 그 너머에 객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금성관 뒤편으로 수령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 한 쌍이 있다.

한쪽에는 옛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나주읍성의 수성군이 동학군과 싸워서,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해 세워둔 비석들이다. '금성토평비'라고 이름 붙여져 있다. 동학군과 관군의 전투는 나주읍성의 서쪽 성문인 서성문을 중심으로 치열했다.

금성관 한쪽에 세워져 있는 금성토평비.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나주읍성의 수성군이 동학군과 싸워서,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해 세워둔 비석들이다.
 금성관 한쪽에 세워져 있는 금성토평비.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나주읍성의 수성군이 동학군과 싸워서,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해 세워둔 비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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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나주목사의 관저이면서 살림집이었던 목사내아. 지은 지 200여 년 돼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마당 가운데에 호두나무가 서 있다.
 옛 나주목사의 관저이면서 살림집이었던 목사내아. 지은 지 200여 년 돼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마당 가운데에 호두나무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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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헌의 출입문인 정수루도 있다. 북을 매달고 있는 2층의 누각이다. 읍성의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려주던 북이 걸려 있다. 지척에 목사내아도 있다. 목사내아는 나주목사의 관저이면서 살림집이었다. 거문고 소리에 학이 춤을 추는 곳이라고 '금학헌(琴鶴軒)'이라고도 불린다. 지은 지 200여 년 돼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고택이다.

건물이 마당의 호두나무를 중심으로 ㄷ자로 배치돼 있다.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을 준다. 호두나무에 열매도 많이 열려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군수들의 관사로 쓰이면서 변형됐던 것을 몇 년 전에 복원했다. 복원하면서 관광객들이 문화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숙박시설로 바꿨다. 여기서 하룻밤 묵으면 몇 백 년을 거슬러 나주목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목사 내아에 벼락 맞은 팽나무도 있다. 내아를 정면으로 봤을 때 오른편 담벼락에 서 있다. 덩치도 덩치지만 수령 500년이 넘었다. 나주목의 역사와 함께 내아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지켜봤을 팽나무다. 1980년대에 찾아온 태풍 때 벼락을 맞았다. 그때 파이고 갈라진 곳을 황토로 봉합하고 사슬로 묶어서 지탱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 상처를 딛고 지금도 늠름하게 서 있다.

벼락 맞은 이 나무가 예부터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지금도 팽나무를 안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 나무 아래에서 살짝 눈을 감고 나지막이 소망을 빌어보는 것도 별난 재미다. 목사내아에 소원 우체통도 만들어져 있다. 정수루의 북을 우체통으로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 소원지를 써넣는 것도 색다른 추억이 된다.

관광객들의 민박 체험시설로 탈바꿈한 목사내아. 고증을 거쳐 복원하면서 관광객들이 문화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바꿨다. 왼편에 소원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소원북이 걸려 있다.
 관광객들의 민박 체험시설로 탈바꿈한 목사내아. 고증을 거쳐 복원하면서 관광객들이 문화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바꿨다. 왼편에 소원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소원북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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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사내아에 있는 벼락 맞은 팽나무. 왼편은 목사내아 안에서, 오른편은 담장 밖에서 본 모습이다.
 나주목사내아에 있는 벼락 맞은 팽나무. 왼편은 목사내아 안에서, 오른편은 담장 밖에서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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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는 또 옛 읍성의 성문인 동점문과 서성문, 남고문이 복원돼 있다. 나주읍성의 제1관문이었던 동점문은 남산공원 아래쪽에 2층 누각의 반원형으로 복원됐다. 서성문은 나주향교 쪽에 네모난 1층 누각으로 서 있다. 남고문은 옛 나주경찰서 옆에 2층 누각의 반원형으로 복원돼 있다. 특히 남고문은 밤에 조명이 밝혀져 환상적이면서도 고풍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서성문 옆에 나주향교도 있다. 1398년(태조 7년)에 창건됐다. 앞쪽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공간이 있고, 뒤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공부를 가르치는 공간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대성전 앞 은행나무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복원된 나주읍성의 남고문. 2층 누각의 반원형으로 돼 있다. 밤에는 조명이 밝혀져 환상적이면서도 고풍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복원된 나주읍성의 남고문. 2층 누각의 반원형으로 돼 있다. 밤에는 조명이 밝혀져 환상적이면서도 고풍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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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읍성의 서성문 옆에 있는 나주향교.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로 이뤄져 있다.
 나주읍성의 서성문 옆에 있는 나주향교.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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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과 관련된 완사천도 나주시청 앞에 있다.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얘기가 서린 샘이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전, 태봉국 궁예의 장군으로 있을 때 얘기다. 이 일대에서 백제의 견훤과 싸우던 왕건이 이 샘을 지나다가 물 한 그릇을 청했다. 당시 샘에 있던 처녀가 물 한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서 건넸다는 곳이다. 벌컥 벌컥 마시다가 행여 체할까 염려해서였다.

그날의 인연으로 왕건이 나중에 이 처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녀가 장화왕후 오씨 부인이다. 완사천의 물이 사랑과 꿈을 이뤄준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것도 이런 연유다. 지금은 식수로 사용할 수 없다. 완사천에 왕건과 오씨 부인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의 숨결이 오롯이 스며있는 천년목사고을 나주다.

완사천에 세워져 있는 왕건과 오씨 처녀의 조형물. 물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서 건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완사천에 세워져 있는 왕건과 오씨 처녀의 조형물. 물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서 건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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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나주목사, #금성관, #금학헌, #나주읍성, #나주목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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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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