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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가사 中

2000년 8월 21일, 열아홉의 나이로 난생처음 취직한 내 첫 직장은 고작 4개월 근무라는 불명예스러운 근무기록을 남기고 끝이 났다.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어도 마지막을 그렇게 끝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당시 철없던 어린 시절의 나는 크리스마스 연휴에 집에 내려와 그 길로 아무런 연락도 없이 회사에 복귀하지 않았다.

졸업하기 전에 실습을 나간 학생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다시 학교로 복귀해서 수업을 듣던지 아니면 다른 곳에 다시 취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한해가 거의 마무리 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졸업식 때까지 학교를 나가지 않아도, 다른 곳에 취업을 하지 않아도, 졸업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나의 첫 백수 생활이 시작됐다.

붕어빵 장사하시던 어머니, 부끄러웠습니다

환갑이 다된 어머니는 더우나 추우나 하루종일 바깥에 서서 붕어빵 장사를 하셨다
▲ 붕어빵 환갑이 다된 어머니는 더우나 추우나 하루종일 바깥에 서서 붕어빵 장사를 하셨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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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 어머니는 집 앞 길가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시작해서 3년째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몇 달 전, 어머니와 나는 집안 사정으로 부산 생활을 접고 김해로 이사를 왔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셨다.

김해로 이사를 오던 당시 나는 기를 쓰고 이사하는 것을 반대했다. 태어나서부터 16년을 한동네에서 살아온 동네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반대를 해도 당시 중학생 꼬마였던 나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어린 시절 소중한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었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의 나에겐 그 시절 친구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지낸 친구들은 가까운 동네에 살았으므로, 각자 멀리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 우정을 쌓아 갔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당시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 집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가족들을 원망할 순 없지만, 나이를 한두 살씩 더 먹어 가면서 사무치는 외로움은 가끔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어머니는 무더운 여름날도, 추운 겨울날도 그 길가 모퉁이에 온종일 서서 장사를 하셨다. 겨울날엔 장사를 끝내고 집에 들어오셨을 때, 발가락이 꽁꽁 얼어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장사를 하시면서 가장 힘들어했을 때는 본인의 몸이 혹사 당할 때가 아니라 점포가 없이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해 나온 공무원들을 마주할 때였다.

그 당시에도 환갑이 다된 어머니에게 아들뻘인 공무원들이 막말을 내뱉으며 장사를 못 하게 하고 심지어는 붕어빵 틀을 빼서 가져가 버리곤 했다. 물론 길거리에서 허가 없이 장사를 하는 건 불법이 맞다. 하지만 그때 어머니가 그 붕어빵 장사마저 하지 못했다면 어머니와 나는 꼼짝없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늦둥이 막냇자식 하나 먹여 살리겠다고 그 고생을 하고 있는데도 열아홉 철 없던 시절의 나는 고생하는 어머니 장사 한 번 도와드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길거리에서 붕어빵을 파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했고,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에 다른 친구들처럼 용돈 받으며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억울했었다. 그리고 내 몸 조금 힘들고 마음 불편하다며 취업한 직장생활을 4개월 만에 접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고먹기만 했다.

'생활정보지'를 뒤져가며, 조그만 공장들을 전전긍긍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 - 사진반 친구가 흑백으로 직접 뽑아준 사진
▲ 삼총사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 - 사진반 친구가 흑백으로 직접 뽑아준 사진
ⓒ 강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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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그만두고 고등학교 졸업을 하기 전까지 집에서 놀고먹던 그 한 달 반 가량의 시간은 '그래도 아직 학생인데...' 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며, 집에서 놀고 있는 시간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 고등학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한 뒤에도 나는 계속 생활의 변화 없이 집에서 빈둥거렸다. 그런 나를 보던 어머니는 참았던 입을 열어, 놀지 말고 구직활동을 하라고 다그치셨다.

어머니의 잔소리에 못 이겨 직장을 구하기 위해 졸업생 신분임에도 고등학교 취업 담당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렇게 김해에 있는 중소기업 하나를 소개받았는데 또 지겨운 공장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기 싫어졌다. 학교 선생님이 그 회사 담당자와 잘 이야기를 해둔 뒤였지만 나는 그 회사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가지 않아 버렸다. 그렇게 나에게 신경 써준 선생님의 호의를 저버렸다.

그렇게 또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부터는 나 스스로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은 취업 나간 회사에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거나 대학에 진학해서 신입생으로서의 설렘을 즐기고 있는 지금, 나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구석에 처박혀서 온종일 TV만 보고 있다는 게 한심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한 나 자신에게 후회가 밀려 왔다.

학교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인 근태가 엉망인 나의 생활기록부를 가지고는 절대 좋은 기업에 취직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내일이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학교 담벼락을 넘나들던 내가, 겨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런 내 모습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 날부터 매일 집 앞에 나가 '생활정보지' 신문을 가지고 왔다. '구인'란을 뒤지며 취업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진 기술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내가 취직할 곳이라고는 역시 조그만 공장의 생산직밖에 없었다.

당시 김해 안동공단에는 LG전자 모터사업부가 있었는데 조그만 협력사들이 주변에 많았다. 그 조그만 공장들은 항상 인력난에 허덕였고 전화를 건 뒤 이력서를 들고 가기만 하면 사람들을 받아 주었다. 나도 그렇게 두 군데의 모터 생산공장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막상 일만 시작하면 왜 그렇게 그 시간이 지옥 같은지, 하루를 채 버티지 못하고 또 도망을 나와 버렸다.

어릴 적엔 스무 살 성인이 되면 세상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어릴 적 꿈꿔왔던 환상들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내 스무 살은 열악한 공장들을 전전긍긍하며 방황하는 '백수'일 뿐이었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태그:#스무살, #고졸, #공장, #어머니,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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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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