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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육아의 고수로 인정해 아이를 키워달라고 부탁하는 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노"였다.
 엄마를 육아의 고수로 인정해 아이를 키워달라고 부탁하는 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노"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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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잠시 눈을 붙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늙어 있었고
넌 항상 어린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되었고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너에게 해줄 말이 없지만

네가 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 내 가슴 속을 뒤져 할 말을 찾지...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

슬픈 배경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엄마는 딸의 결혼식장에서 감동의 박수를 하고 있다. 기특하다. 뿌듯하다. 더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오늘 이후 매일매일 행복하게 잘 살아라. 또르르 한 방울의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잔잔한 감동과 애잔한 슬픔이 마음을 적실 사이도 없이 이어지는 다음 장면. 마치 철인 삼 종경기의 한 종목을 마무리하고 다른 종목으로 달려가는 선수들처럼 엄마는 분만실에서부터 자녀를 바통을 터치하듯 이어 안는다.

그리고 시작되는 자식의 자식농사. 목욕을 시키고,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유치원에 데려가고, 소풍을 따라가고, 녹색할머니도 해야 한다. 급식 도우미도 해야 하고, 못하는 공차기에, 어눌한 만들기, 어색한 영어까지 요즘 할머니들은 해야 할 것이 참 많기도 하다.

휴우~ 한숨이 흐른다. 이 시대의 엄마들은 왜 이렇게 할 일이 많은 것인지.

"엄마, 혹시 아빠랑 같이 세종시로 내려오실 생각 없어요? 우리 동네가 집값도 싸고 공기도 좋은데 이사 오세요."

갑자기 이사를 권하는 아들... 속내가 보인다

"결혼 두 달 된 아들이 갑자기 이사를 권한다. 자기 집 근처로 이사 와서 부모와 자식 간 알콩달콩(?) 살아보자는 이야기인 듯 들린다."
 "결혼 두 달 된 아들이 갑자기 이사를 권한다. 자기 집 근처로 이사 와서 부모와 자식 간 알콩달콩(?) 살아보자는 이야기인 듯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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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두 달 된 아들이 갑자기 이사를 권한다. 자기 집 근처로 이사 와서 부모와 자식 간 알콩달콩(?) 살아보자는 이야기인 듯 들린다. 하지만 경험상 이때 엄마는 긴장을 놓치면 안된다. 불쑥 내민 한마디가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 사무실도 여기 있고 엄마 사회생활도 있는데 세종시엔 뭐하러 가. 나도 그랬지만 요즘 며느리들 시댁과 가까이 사는 것 좋아하지 않아. 며느리뿐만 아니라 시부모도 사생활이 있으니 멀찍이 떨어져 살면서 가끔 만나는 게 좋지 않니?"

"그치, 그건 좋은데. 아기가 생기면 누가 도와줘야 할 것 같아서. 장모님은 일하시니까 어렵고 엄마는 아기를 좋아해서 주석이(조카)도 키워주고 장애아들이나 다문화 아기들도 봐 주잖아. 남의 아기도 봐주는데 손주는 당연히 봐주셔야지."

아니나 다를까. 아들 녀석이 속내를 드러낸다. 맞벌이 부부인지라 아이를 낳으면 산후조리며 육아며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고민하고 의논했던 모양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벌써 약을 쳐놓겠다는 심산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엄마를 육아의 고수로 인정해 아이를 키워달라고 부탁하는 건 고마운 일이다. 또 당연히 내 자식이 낳은 손주니 귀하고 사랑스러워 매일매일 보고 싶을 것도 안다. 하지만 일단 나의 대답은 "노"였다.

"이사는 말도 안 돼. 우리도 우리 생활이 있는데. 그리고 세종에 좋은 육아도우미들이 많이 있을 거야. 물론 친할머니나 외할머니가 키우는 것이 안심되고 좋겠지만, 육아도우미분들도 잘 키워주시더라. 육아 휴직제도 있고 힘들 땐 조금씩 다른 분들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잘 키울 수 있어. 너희가 여행을 간다거나 특별한 일이 있다면 그땐 데려다 봐 줄 수 있지만 엄마가 전담해서 육아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이제 결혼 두 달된 아들이라 몇 년 후 있을 육아와 출산에 대해 크게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주변에서 남보다는 외할머니나 친할머니가 키워주는 것이 좋다는 말들을 많이 들었기에 그때를 대비해 미리 포석을 깔아 놓는 것이다.

문제는 주책없는(?) 남편이다. 이 남자는 앞뒤 계산 없이 손주 이야기에 흥분해서 아들, 며느리 앞에서 공수표를 남발한다.

"그래, 엄마가 애는 잘 보잖니. 주석이 태어나자마자 우리 집에 와서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키워줬잖아. 니 이모는 산후조리도 엄마가 다 해줬어. 그때 이모가 주먹만 한 주석이를 데리고 우리 집에 왔는데... 너도 기억나지? 주석이 아기 때 정말 귀여웠잖아. 사실 아빠는 너희 낳을 때는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예쁜 것도 몰랐었다. 그런데 주석이는 다르더라. 참 예쁘더라구.

"그랬지. 아빠. 엄마가 주석이도 키워주고 이모 산후조리도 다 해주고. 엄마가 참 잘했잖아요. 엄마가 정말 애는 잘 키워. 설마 우리 애 키워달라면 그냥 맡기겠어? 엄마는 고기능인력이니까 거기에 맞게 넉넉하게 보수를 드려야지."

"야야... 제 손주 키우는 데 무슨 보수냐. 키우는 게 기쁨이고 보상이지. 아이 키우는 보상은 다섯 살 이전에 주는 기쁨으로 미리 받는 거라며."

저출산 문제, 더 나은 육아 정책 내놓길

"아이를 낳으라며 키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지 않는 사회. 언제까지 출산과 육아의 문제를 가족이 해결해야 할 책임으로 떠넘길 것인가."
 "아이를 낳으라며 키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지 않는 사회. 언제까지 출산과 육아의 문제를 가족이 해결해야 할 책임으로 떠넘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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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이 정말... 대화가 여기까지 나가면 남편을 옥상으로 불러야 한다. 더 하다가는 나 대신 아들과 육아 계약서에 서명이라도 해 줄 기세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그래? 누가 애를 봐준다고 그래. 당신 손주 생기면 세종시로 이사 갈 거야? 사무실도 옮기고? 그리고 당신이 우리 애들 키울 때나 주석이 키울 때 목욕이나 한번 시켜줬어, 똥 기저귀를 갈아줘 봤어? 잠 안 자는 애 안고 밤을 새워봤어. 당신이 할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 당신이 다 할 거야?"

아마도 남편은 손주를 키우는 게 뭔지, 아들네 근처로 이사 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드라마 속 행복한 가족처럼 아들 며느리와 자주 만나 식사도 하고 쇼핑도 하고 여행도 하며 즐거운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손주 키우는 일도 그렇게 동화처럼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안됐지만 남편의 행복한 상상은 여기까지. 남편도 막장드라마(?)나 잔혹 동화 같은 현실을 알 필요가 있다.

옥상면담을 진행했지만, 남편의 아름다운 환상은 그리 쉽게 깨지지 않을 듯하다. 그러다 보니 나만 냉정한 엄마가 된 듯 모양이 영 빠져버렸다.

얼마 전 동년배 친구들 모임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할머니의 육아를 권하는 사회에 대한 불만은 다들 가지고 있고 실제로 자식의 자식을 키운다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지는 않지만 대부분 친구가 '봐달라고 하면 봐줘야지 어쩌겠느냐'는 입장이다. 특히 딸을 가진 친구들은 딸의 아이를 키워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내 딸은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들딸 구별 없이 잘 키웠잖아. 지금 전문직에 있고 좋은 직장 다니는데 아이 키우기 위해 직장을 나와야 한다면 어쩌겠어. 그리고 내 딸이 직장 다니랴 아기 키우랴 고생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을 것 같아. 어차피 다른 분 도움 받을 거라면 내가 도와주고 딸이 주는 수고비로 노후준비하면 되지, 뭐."

"나도 우리 딸 결혼하기 전까지 열심히 여행 다니고 놀러 다니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려고해. 손주 생기면 애 봐주느라 밖에도 못 나가잖아. 친구들아 그때 모임에 안 나와도 흉보지 마라. 어쩌겠니. 난 내 딸이 제 자식 키우느라 회사 그만두고 재취업 안 돼서 집에서 전전긍긍 답답해하는 꼴은 못 볼 것 같아."

"암튼 이 놈의 사회가 할미들을 내버려 두지 않아. 애는 낳으라고 독촉하면서 키우는 건 나 몰라라 하니 우리 같은 어미들이 나설 수밖에 없지. 애 봐주다 딸하고 사이 안 좋아진 엄마들을 하도 많이 봐서 겁이 나지만 그래도 어쩌니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아이를 낳으라며 키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지 않는 사회. 그래서 자식들은 어쩔 수 없이 제 자식 키우기를 부모에게 맡기고 부모 역시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식의 자식농사에 나설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출산과 육아의 문제를 가족이 해결해야 할 책임으로 떠넘길 것인가.

대책 없이 낳으라고만 하는 정책 때문에, 이 땅의 부모와 예비부모는 물론 할머니들과 예비 할머니들까지 가슴을 졸이고 있다. 저출산을 마냥 걱정하지 말고 정부가 출산과 육아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내놓길 바란다. 그러면 대한민국 금수강산이 예쁜 아기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해질 것이다.

○ 편집ㅣ박순옥 기자



태그:#자식농사, #자식의 자식농사, #출산 육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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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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