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볼리스호펜 동네 언덕을 남쪽으로 넘어서자 안개에 젖은 취리히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첫 느낌에는 서정시인가 싶다가 좀 더 응시하자 서사적인 자연풍광으로 다가왔다. 어서 호숫가로 내려가 산책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몸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마음처럼 호수까지 내달릴 수 없는 국면에 처했다. 나와 호수 사이를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갈등했다. 선과 악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길을 좀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지하통로나 횡단보도로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좌우를 잘 살펴서 차도 없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순발력 있게 뛰어서 무단횡단을 할 것인가.

그런데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안전한 지하통로나 횡단보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간도,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었다. 무단횡단을 하는 수밖에. 그렇게 무단횡단을 하려고 좌우를 분주히 살피며 멀리서 달려오는 자동차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안한 나의 눈빛과 마주친 듯한 자동차는 점점 속도를 줄이더니 내 앞에 멈춰선다. 그리고 먼저 건너 가라며 손짓을 한다. 횡단보도가 있는 곳도 아니고 신호등이 켜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차가 멈춰서다니.

한국에서는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상황이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차가 우선이다. 차에 올라타 운전을 하는 순간 사람도 차갑고 딱딱한 자동차로 변한다. 도로횡단자의 급한 사정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취리히에서는 차보다 늘 사람이 우선이다. 이번 한 번뿐이 아니다. 이후에도 길을 건너려고 보도 끝으로 다가서면 어김없이 달리던 차들이 멈추고, 먼저 건너가라는 따뜻한 수신호나 눈빛을 보낸다.   

사람이 먼저인 안전한 도시, 취리히

-
▲ 취리히시민들의 시민의식, 공동체 질서는 교육의 힘일 것. 스위스 교육자 페스탈로찌 동상. -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취리히에서는 이렇게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얻는다. 법과 제도가 사람을 보살피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국가와 정부가 국민과 시민을 항상 지켜주고 있다는 신뢰감이 생긴다.

결국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 대접을 받고 있다는 자존감을 획득한다. 무엇보다 시민과 시민들이 타인으로서 서로를 인정해주고 배려해주는 시민의식이 도처에 충만하다. 공동체의 질서는 허점과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민생의 사소한 현장에서 그와 같은 사례를 수시로 체험하고 목격했다.

그렇게 반호프 거리를 걷는 취리히 시민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왜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지 그 이유를 알아챘다. 서로가 서로를 믿는 신뢰사회, 서로가 서로에게 한 약속을 잘 지키는 규범사회, 서로 상호호혜적으로 협동하고 연대하는 네트워크사회. 그렇게 신뢰, 규범, 네트워크 같은 사회적자본이 충분히 축적된 선진 국가와 사회에서 안전하고 안정되게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레닌, 아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 제임스 조이스 등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선각자, 혁명가들이 왜 취리히라는 도시의 난민이기를 자초했는지 이해된다.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인 사회' 같은 새 세상을 열기 위해 왜 그토록 혁명을 학습하고 준비했는지 깊이 공감이 갔다. 왜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혁명을 꿈꾸는지, 혁명을 노래하는지, 혁명의 가시밭길을 달게 즐기는지 새삼 깨달았다.

레닌이 러시아혁명을 준비한 도시, 취리히

-
▲ 레닌이 살던 건물 1층 기념품가게에 전시된 레닌의 흉상 -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취리히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 조사를 하더라도 늘 최상위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조사자들은 정치적 안정성, 범죄율, 경제 여건, 의료 수준, 대기 오염 정도, 교육환경, 교통 시스템, 주택 수준 등에 두루 살펴본다. 어떤 지표를 들이대도 취리히에서 살아가는 시민들과 이주민들의 삶의 질은 높게 나타난다. 취리히에서 3박4일을 살아보니 그 조사결과에 믿음이 갔다.

그리고 내게 취리히는 또 다른 중요한 지표이자 척도의 도시로 다가온다. '세계에서 혁명을 준비하기 가장 좋은 도시'. 1917년 4월, 취리히에 망명해 난민으로 머물던 레닌은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으로 향했다. 노동자와 군인들에 의해 촉발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국제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도 취리히대학을 다녔다. 그 혁명의 산실에서 혁명을 공부하고 염원하고 구체적으로 획책했을 것이다. 물리학자이면서 사회주의자 아인슈타인도 취리히 연방공대 출신이다. 1916년 취리히의 볼테르 카바레에서는 젊은 예술가와 반전주의자들이 다다이즘(Dadaism)이라는 반문명, 반전통적 예술운동을 선언했다.

이만하면 취리히는 단연 '혁명을 배우고 준비하기에, 세계에서 첫 번째로 좋은 도시'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아그네스가 이끄는 대로 반호프 거리를 지나 지난날 이런저런 세계 각국의 혁명가들이 난민으로 은신했을 법한 후미진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그런 질감이 더 강해졌다. 마침내 레닌이 살던 집 앞에 서서 레닌이 1년 남짓 머물렀다는 동판을 확인하자 그런 생각은 확신으로 발전했다. '혁명 발전소' 취리히.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이자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지도자. 취리히의 어느 골목에서, 1916년 2월부터 1917년 4월까지 세들어 살던 집앞에서 나는 레닌을 만났다. 지난날 가슴에 비수처럼 품었으나 발설하지 못했던 혁명의 꿈을 잠시 꺼내 애타게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레닌의 그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1917년 2월, 전쟁과 민생고와 추위에 지친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와 군인들이 니콜라이 2세 황제를 몰아냈다. 그때 레닌은 취리히의 망명 난민 신세였다. 레닌은 지체없이 페트로그라드로 향했다. 독일 정부가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1917년 4월 페트로그라드에 입성했다.

하지만 그해 7월, 레닌이 이끄는 소수파인 볼셰비키의 무력시위는 좌절된다. 레닌은 다시 핀란드로 도피한다. 이 무렵 쓴 '국가와 혁명'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인 소비에트 공화국, 계급과 국가가 소멸된 공산주의 사회 등 레닌이 취리히에서부터 품고 가다듬었던 혁명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1917년 11월 다시 러시아로 잠입한 레닌은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한다. 모든 국가권력이 소비에트로 넘어왔음을 선포한다. 레닌은 새로운 정부인 인민위원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된다. 1919년 3월, 레닌은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한다. 이로써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한다.

"소박하고 서민적이었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넓은 이마에는 힘이 넘쳐흘렀고, 그 작은 몸속에는 결코 꺼지지 않는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다"라고 역사는 레닌을 기록한다. 레닌이 살던 건물 1층 기념품가게의 레닌흉상의 표정을 보니 크게 틀리지 않는 인물평으로 보인다. 마르크스가 주창한 사회주의 혁명을 레닌주의로 마침내 승화시켜 완성했다는 후한 평가도 받고 있다. 물론 역사적, 정치적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사회주의자 아인슈타인의 모교, 취리히대학교

-
▲ 레닌이 러시아 혁명을 준비하며 세들어 살든 집 -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레닌의 혁명사와 개인적인 혁명의 꿈을 뒤에 남겨두고 리마트(Limmat) 강을 건넜다. 취리히 동북부 구도심 니더도르프(Neiderdorf) 거리로 향했다. 또 다른 혁명가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아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가 공부한 취리히 대학교(Universität Zürich)가 그 거리 초입에 있다.

취리히대학은 1833년 개교,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2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스위스 최대, 최고의 명문대학이다. 리마트강 북동쪽 언덕 위를 온통 차지하고 있는 도시 속의 작은 도시다. 특히 취리히 대학에 갈 때는 산악열차 폴리반을 타고 가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 열차는 운행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걸어가지 못할 거리도 아니었다. 취리히 대학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취리히 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중 'ETH 취리히'라고 불리는 연방공과대학의 명성이 드높다. 1855년 스위스 정부에서 설립한 공업기술전문학교(Eidgenössische Polytechnische Schule)가 전신이다. 높은 이름값은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덕분이다. 그는 이 대학 수학과를 졸업한 뒤 이 대학에서 처음으로 교수 일을 시작했다.

취리히대학이 배출한 2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대표할 만한 아인슈타인은 스위스가 조국이 아니다. 1870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수학말고는 학업성적이 신통치 않은 평범한 학생으로 취리히에서 난민같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대학 졸업장도 없는 상태에서 상대성이론 등 혁명적인 과학저작 논문을 계속 발표하다 결국 노벨상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인생이 달라졌다. 이후 취리히대학에서 박사학위도 받고 교수자리도 얻는다.

아인슈타인의 일생은 한 마디로 정처없는 난민의 역사로 점철된다. 그는 1933년 반유대주의자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고국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다. 자발적으로 난민 신세가 된 것이다.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충분하므로 난민요건이 얼마든지 성립한 것이다. 독일정부는 그를 국가모반죄로 단죄하고 그의 저작물을 불태운다.

미국시민권을 획득하고 프린스턴대학의 교수직을 얻은 아인슈타인은 독일 내 유대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다. 독일 내 난민들이 히틀러의 박해에서 벗어나도록 비자발급 신원보증을 서는 일을 도맡았다.

아인슈타인은 사회주의자였다. 스스로 자신이 사회주의자라 말한 적은 없으나 생각과 행동이 사회주이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며,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레닌을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온 정열을 바치고 자신을 희생한 사람으로서 존경한다고 공공연히 평가한 적도 있다. 그래서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극우반공주의) 광풍 시절에 미국 CIA의 표적이 되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였지만 한편으로 '사람이 살아가기에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세계적인 사회 혁명가로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문화혁명을 준비하는 지역사회 학교, 로테 파브릭

-
▲ 아인슈타인 등 21명의 노벨상을 배출한 취리히 연방공대 -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취리히 호수가를 산책하다 예상치 않게 '붉은 벽돌집'을 발견했다. 일단 모양부터 눈에 띄었다. 문을 닫은 공장 건물을 재생해 '로테 파브릭(Rote Fabrik)'이라는 일종의 지역사회 문화예술 커뮤니티센터로 재활용한 사례다. 주로 취리히 지역의 청년들로 하여금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의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매개하고 촉진하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음악, 연극, 특별 프로그램, 영상, 미디어 관련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100회 이상 공연, 콘서트가 벌어진다. 심지어 정치적 현안들을 현대 문화의 맥락과 연결해 사회비평적 시각으로 치열하게 논의하는 토론과 비평의 장이 펼쳐지기도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생생하게 구현되는 살아있는 현장인 셈이다.

아그네스의 아들 '비호'도 로테 파브릭에서 록밴드 활동을 하고 있다. 치과의사지만 의사 일을 하지 않는다. 아그네스는 어려운 의대 공부를 마치고 치과의사가 되었으나 치과의사 노릇을 하지 않는 아들이 걱정스럽다. 하지만 비호는 걱정하지 않는다. 주변에 비호같이 먹고 사는 일에만 매달리고 싶지 않은 청년들이 적지 않고 치과의사 노릇을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되는 사회안전망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로테 파브릭에는 비호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지역청년들의 문화공간이자 놀이터이자 쉼터로서 기능하고 있다. 스위스에서 10% 정도의 정당지지율을 얻는 녹색당 당원들이 특히 많이 모이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상시 개방된다. 아이들과 동반해 가족단위로 참여하는 이들도 많아 탁아놀이방이 따로 있을 정도다.

최근 친일파를 단죄하는 줄거리의 한국영화를 보는 내내 스크린에 혁명가의 도시 취리히, 취리히의 혁명가들이 겹쳐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새삼 다시 들었다. 우리나라는 사실은 그동안 단 한 번도 해방, 독립된 적이 없는 것 아닐까. 70년 전의 그 광복이란 게 사실은 외세의 치밀하고 정교한 기획에 의한 위장된 광복은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조국은 단 한 순간도 온전한 주권국가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그게 어쩌면 역사적 사실이자 진실이 아닌가.

그러자, 혁명가의 학교, 망명난민의 도시 취리히가 몹시 그리워졌다. 그 '사람이 먼저'인 도시에서 30년 넘게 세계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그네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치과의사로서 돈 벌 궁리를 굳이 하지 않고 로테 파브릭에서 록음악을 연주하며 사는 '비호'의 일상이 더 엿보고 싶어졌다. 자연과학으로든, 문화예술로든, 이 세상을 사람이 더 살기좋은 곳으로, 사람에게 이로운 곳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취리히 연방공대와 로테 파브릭의 자유로운 청년혁명가들이 몹시 부러워졌다. 취리히로 망명하고 싶어졌다.

-
▲ 폐쇄 공장을 재생한 문화예술 창작 지역사회 플랫폼 ‘빨간 벽돌(Rote Fabrik)' -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취리히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