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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사유

여행, 언제나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뜁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 자체가 멀고 오랜 한 편의 여행 같아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행을 통한 체험과 느낌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척 진하게 남아있게 됩니다. 특히 성장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생각만으로 가슴이 뛰는 여행. 그 길 위에서 뜻하지 않은 많은 것들과 마주하게 되기도 하고, 또 뜻하지 않은 사유들이 바람과 함께 떠올라 자신을 더 성장하게 하기도 합니다.

오래 전 어느 낯선 길을 걷다가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고속도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 조금은 더 힘들고, 또 늦더라도 어쩌면 작은 길 위에서 자연과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을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얼마나 빨리 가느냐보다도, 무엇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요. 지금도 그때 그 생각들을 소중히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행과 함께 접하게 되는 몸과 마음의 경험은 그 현장감과 실재감으로 인해 대상에 대한 감동과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여 인문적 상상력을 키워주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학교의 아이들과 함께 가능한 문학 여행을 자주 가려고 노력합니다. 이번 기회에 아이들과 함께 했던 남도의 좋은 여행길을 소개할까 합니다.

섬진강을 따라

내가 사는 집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낙동강으로 흘러 남쪽 바다에까지 이르는 꽤 큰 강이지요. 낮은 물가에는 왜가리와 두루미가 천연스레 서 있고 제법 물고기가 튀어 물무늬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사시사철, 아침과 저녁, 맑을 때와 비올 때 그 모습이 달라지는 아름다운 강입니다.

강 그대로의 강
▲ 밀양강 강 그대로의 강
ⓒ 박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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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에게는 강이 그저 흘러 바다로 가는 물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생존'이 되기도 하고, '세월'이 되기도 하고, '인생'이 되기도 하고, '역사'가 되기도 합니다.

이곳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강을 마주해야 길이 열립니다. 바로 천혜의 물길 섬진강입니다. 강의 이쪽은 경상도이고 저쪽은 전라도입니다. 남도 오백 리 세 개의 도와 열두 개 군을 지나며 이 땅의 아픈 역사를 아우르고 흐르는 섬진강.

강은 늘 경계이면서도 분리가 아니라 이음이며 소통이어서 아름답습니다. 섬진강의 물줄기도 다르지 않습니다. 섬진강에 이르면 이 강과 함께 인생을 흘러온 한 사람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섬진강에서 살며 그 강과의 교감으로 삶을 보고 깨닫고, 그것을 시로, 가르침으로 펼치다가 이제 노년에 접어든 강 같은 시인 김용택.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섬진강 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 /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 고갯짓을 바라보며 /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김용택, 〈섬진강1〉(『섬진강』, 창비, 1985.) 중에서

김용택 시인은 전북 임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스물한 살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교직기간 동안 고향인 임실 덕치초등학교와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임실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 등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삶 곁에서 언제나 섬진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섬진강이 '나를 키운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나이 50일 때의 자전적 고백에서도 그는 "내 문학은 그 강가 거기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고, 거기 그 강에 있을 것이다. 섬진강은 나의 전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강과 함께 흘러 온 삶과 시

김용택의 시는 참 아름답습니다. 그의 시에는 인간 본연의 서정성이 강 밑 물길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가 아름다운 참 이유는 그렇게 흐르는 서정성 위에 강과 함께 진솔하게 살아가고 있는 농투성이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시편들마다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용택의 시는 섬진강에서 씌어져 그 강을 닮아 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서정이 흐르고, 동시에 섬진강이 휘감은 마을들의 사람살이의 감동과 슬픔이, 그리고 약자들의 아픔에 대한 분노와 비판이 결코 가볍지 않은 물결의 힘과 그 강의 깊이로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리산을 돌아 흐르는 섬진강
▲ 섬진강 지리산을 돌아 흐르는 섬진강
ⓒ 박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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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시인을 특별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창동의 영화 〈시(詩)〉(2010.)에서였습니다. 거기서 시인은 문화센터에서 시를 가르치는 강사 역할을 맡았는데, 짧지만 결코 작지 않았던 그의 역할이 얼마나 자연스럽던지…. 김용택 시인은 이창동 감독이 생각하는 주제의식 속의 '시'를 상징해 줄 가장 적절한 시인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섬진강이 아니었다면 김용택 시인과 그의 작품들, 그리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 속으로 스미는 인간적 감동과 정서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강은 사람이고 사람의 마음입니다. 김용택은 시 〈지구의 일〉에서 말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이 지구의 일을 방해하면 안 돼"라고. 원래의 자연 그대로 가만 두지 않는 인간들의 나쁜 일에 대한 진실한 경고인 것입니다.

지난 정부는 소위 '4대강 살리기'라는 미명하에 강과 생태계만 죽게 한 게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까지 죽게 한 것입니다. 거대한 보가 강물을 막아서고, 수변 개발로 들쑤셔진 강에서 더 이상 어떤 시인이 본디 사람의 마음과 삶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 곳 섬진강이 '전국 4대강'에 들지 못하고 '5대강'에 든 것이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럽고, 대견하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아름다운 꽃과 사람과 인문의 길

섬진강에 닿으면 지리산의 예사롭지 않은 기운과 그 깊은 골짜기마다에 묻혀 있는 역사와 마주하게 되기도 하고, 여러 문인들의 삶과 작품 속 이야기들이 바람에 실려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이 강을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낮은 마을들이 있습니다.

지리산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광양으로 이어지는 섬진강의 강변길은 전국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길입니다. 그 강 길을 따라 계절마다 벚꽃, 매화, 철쭉, 개나리 등의 아름다운 꽃들의 축제 속에 빠져들 수 있어 좋습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토지》의 배경지로 유명한 하동 악양 들판에서는 멀리서 함께 바라보기만 해도 두 사람의 관계가 참 좋아진다고 전해지는 '부부 소나무'의 정겹고 푸르른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참판댁', '평사리 문학관', '이병주 문학관', '화개장터' 등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문학 여행을 할 때 섬진강이 보이기 시작하면 미리 학생용 자료집에 준비해 둔 시 〈섬진강〉을 낭송해 보게 합니다. 섬진강에서 낭송하고, 감상하는 시 〈섬진강〉. 현장에서의 시 낭송은 아이들의 어색하면서도 맑은 목소리와 그 시의 의미, 그리고 곁에서 흐르고 있는 강의 이미지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곳에 함께 있는 모두에게 참 좋은 감성 체험이 됩니다. 하긴 아이들이 여행 중에 버스 안에서 마이크 잡고 노래는 불러봤어도 언제 마이크 잡고 시 낭송을 해 보았겠는지요.

강과 함께 가다가 버스에서 내려 의연하게 흐르는 강물 바로 앞에 모두 같이 서 봅니다. 그리고는 맨발로 모래밭을 밟아 보기도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숲 사이를 같이 머리카락 흩날리며 멀리까지 걸어보기도 합니다.

학생들이 강가의 갈대숲을 걷고 있다
▲ 섬진강 학생들이 강가의 갈대숲을 걷고 있다
ⓒ 박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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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여행, #섬진강, #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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