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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길가에 해월 선생 피체 기념비와 원주시 호저면 고산마을 들머리 표지석이 늘어서 있다.
 한적한 길가에 해월 선생 피체 기념비와 원주시 호저면 고산마을 들머리 표지석이 늘어서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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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선생 피체지

나는 원주시민이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여태 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잘 모른다. 따사한 봄날 가까운 여주 남한강변 점동면 도리 마을에 사는 홍일선 농부시인이 바람도 쐴 겸 원주로 나들이 오겠다고 하여, 시외버스터미널로 마중을 갔더니 두 사람과 동행하였다. 한 분은 낯익은 후배 정용국 시인이고, 다른 한 분은 초면인데, 민청학련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전홍표씨였다.

터미널 곁 한 중국집에서 자장면으로 마음의 점을 찍자, 홍 시인은 해월 최시형 선생 피체지와 무위당 장일순 선생 무덤을 참배하고 싶다고 했다. 그분들은 으레 내가 승용차를 가진 줄 알았는지, 모두 버스로 왔기에 나는 그분들에게 여간 미안치 않았다. 나는 잽싸게 터미널택시정류장에 길게 늘어 선 한 택시기사에게 부탁하자 흔쾌히 두 곳을 잠시 둘러오는 조건으로 2만 5000원을 요구했다.

나는 그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와서 카메라를 챙긴 뒤 먼저 해월 최시형 선생 피체지로 갔다. 택시기사는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마을 어귀 한적한 들길 옆에 내려 주었다. 그곳에는 해월 선생 피체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선생님은 포덕(布德) 전 33년(단기 4160년, 서기 1827년) 3월 21일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출생하셨다. 성은 최(崔)요, 이름은 시형(時亨)이며, 호는 해월(海月)이다.

포덕 2년(1861년) 용담에서 동학에 입도한 후 2년만인 포덕 4년(1863년) 8월 14일 최수운(崔水雲) 선생님으로부터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으셨다. 포덕 39년(1898년) 4월 5일 원주군 호저면 송곡(송골) 원진여(元鎭汝) 집에서 경병(京兵)에게 체포되어 이해 6월 2일 좌도란정률(左道亂正律)로 한성감옥에서 교형(絞刑)을 받아 순도(殉道)하시니 향년 72세였다. 

사후 9년 뒤인 포덕 48년(1907년) 7월 정부 명의로 선생님은 무죄가 공포되었다. 선생님의 '최보따리'라는 별호는 작은 보따리를 가지신 행장으로 방방곡곡을 찾아 민중에게 겨레의 후천(後天) 5만년의 대도(大道)를 설(說)하시고, 그들과 함께 항상 일하시면서 동고동락하셨기에 민중들이 선생님을 부르던 애칭이다.


짧은 비문이지만 해월 선생의 생애를 집약한 명문이었다. 홍·정 시인과 전홍표씨는 당신 부모 기념비처럼 언저리를 깔끔하게 청소했다. 우리 모두 땅에 엎드려 큰 절을 두 번 드리고 다음 행선지로 달렸다.

기념비 앞에서 참배객 일동(왼쪽부터 정용국, 홍일선, 박도, 전홍표)
 기념비 앞에서 참배객 일동(왼쪽부터 정용국, 홍일선, 박도, 전홍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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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 선생 무덤

무위당 장일순 무덤은 평소 내가 자주 산책 다니던 구룡사 가는 길 옆 논 길 바위 위에 돌을 얹어두었다. 봉분도 상석도 없었다. 나는 한동안 그 무덤 앞에서 느꺼운 가슴을 달랬다. 가장 위대한 이는 풀 한 포기로 돌아감을 보고…. 아마도 고인이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이 돌마저도 탐탁치 않게 여겼으리라.

장일순 유시
 장일순 유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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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풀이었으면 좋겠네
차라리 밟아도 좋고
짓밟아도 소리 없이
그 속에
그 속에
어쩌면 그렇게


우리 일행은 가져간 막걸리로 잔을 올리고 두 번 큰절을 했다. 홍 시인은 남은 막걸리를 돌무덤에 한 바퀴 돌면서  헌주 한 뒤 무위당의 생애를 들려줬다. 우리 일행은 약속시간 때문에 곧장 택시를 타고 원주시 중앙시장에서 내렸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 기념관에 가고자….

논길 옆 무위상 장일순 선생 묘쇼
 논길 옆 무위상 장일순 선생 묘쇼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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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선생 연보

1928년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
1940년 원주초등학교 졸업.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세례명 요한으로 영세를 받음.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1회)에 입학.
1950년 6.25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
1954년 대성학원을 설립.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후 평화통일론으로 3년간 옥고를 치름.
1968년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함.
1971년 10월에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7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
1977년 이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생명운동으로 전환.
1983년 도농직거래조직인 <한살림>을 창립.
1993년『장일순의 노자이야기』펴냄.
1994년 위암으로 영면.

- 장일순 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인용


태그:#해월, #무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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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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