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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반빈곤권리장전>(아래 '권리장전')은 2015년 6월 29일부터 7월 10일까지 약 2주간 서울, 경기 곳곳에서 벌어지는 도시빈민에 대한 탄압 양상에 대해 조사하고, 도시빈민의 권리목록을 작성하여 발표하고자 모인 소시기 실천단입니다.

<권리장전>에는 약 130명의 대학생들이 참가하여 가든파이브, 철거민(돈의문, 서소문, 염리동, 노점상(DDP, 삼양동, 수유시장, 미아삼거리), 임차상인(만복, 보용만두, 신신원 등), 쪽방 주민(동자동), 홈리스(서울역, 홈리스행동)들을 만나 개별 면접조사 및 간담회 등을 통해 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본 글은 조사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보고, 느끼고, 들은 바들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연속 르포 형태로 기고될 예정입니다. 각 지역에 대한 조사보고서 및 종합보고서는 빈곤사회연대 홈페이지 문서 자료실에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청계천 빛초롱축제
 청계천 빛초롱축제
ⓒ Pixabay-storypac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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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사람들 앞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청계천은 이제 서울시민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쉼터가 되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청계천을 걷다보면 마음에 여유가 돌아오는 듯하고, 도시의 열섬현상도 청계천으로 인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작년 겨울을 아름다운 빛들로 수놓았던 청계천 빛초롱 축제는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청계천이 원래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청계천은 1958년 복개되어 이후 고가도로가 세워진 도로로 바뀌었다. 이렇게 청계천이 콘크리트로 덮이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서울 도심으로 집중되는 교통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서울 중심부인 종로와 서울 동부인 마장동을 잇는 도로를 건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청계고가도로는 자동차 통행을 원활히 함으로써 교통 체증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청계고가도로를 통해 이동하면 10개의 교차점을 신호대기 없이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청계천 주변 도로는 동대문 시장과 청계천 상가를 잇는 하나의 동맥과도 같았다. 청계고가도로 밑의 공간은 상가를 찾은 손님들이 주차하는 주차장이 되었으며, 청계천 복개로는 청계천 곳곳에 물자를 신속하게 나르고 옮길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2000년대 초가 되면서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대도시의 녹지 조성에 대한 담론들이 팽창하면서 청계천 복원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공약으로 삼은 인물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였다.

청계천 복원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돌고는 있었지만 서울시장 후보들 중 누구도 감히 청계천 복원 사업을 공약으로 삼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큰 규모의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해야 할 뿐더러 청계천 주변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던 수많은 상인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 대책을 보장할 경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는 야심차게 청계천 복원을 자신의 핵심공약 중 하나로 삼았고 당선 이후 발 빠르게 복원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자신의 임기 5년 안에 청계천 복원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던 것으로 보인다. 당선된 직후부터 서울시장은 청계천 상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전담 대응팀을 꾸렸으며 1년 만인 2003년에는 특보와 청계천복원사업추진본부를 설치하여 공사를 강행했다. 그 결과 2005년에는 청계천 복원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모두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임기 내에 벌어진 일이었다.

청계천 복원 이면의 '눈물'

하지만 생활하천이 돌아오게 된 기쁨의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숨어있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청계천 주변 상인들에게 구두로만 보상을 약속했고, 따라서 이후에 상인들은 자신들이 약속 받았던 것과 전혀 다른 수준의 보상을 받더라도 법적으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다.

상인들이 단체를 조직하고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자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면담을 갖고 그 자리에서 상인들에게 3가지 보상책을 약속했다. ▲ 상인대책전담기구 운영 ▲ 잔류와 이주 구분 없는 상권 조성 대책 마련 ▲ 이주단지 건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상인대책전담기구는 1~2년 만에 다른 기구에 편입되어 사라졌고 잔류 상인들을 위한 상권 조성 대책은 전무했다. 결국 이들 보상책들 중 엉성하게나마 이행된 건 단 한 가지, 이주단지 건설뿐이었다.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
ⓒ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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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청계천 상인들을 위한 이주단지 건설 대책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그 대책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가든파이브'이다. 대한민국 최대의 복합문화쇼핑공간을 자처하는 가든파이브는 사실 갈 곳 없이 쫓겨나야 했던 청계천 상인들을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든파이브조차 상인들을 위한 제대로 된 이주대책은 되지 못했다. 본래 약속했던 것보다 높은 분양가, 텅텅 빈 공간, 유동인구 부족으로 인해서 가든파이브 주변 상권 자체가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인들에게 이주를 하라는 것은 그야말로 제 발로 무덤에 들어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당초 6천 명에 달하는 이주 대상자들 중에서도 이주를 포기하는 상인들이 속출했다. 결국 가든파이브로 최종적으로 이주한 것은 1000여 명의 상인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지나치게 낮은 매출과 반대로 지나치게 높은 임대료·분양가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가든파이브를 나와 거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다시 쫓겨난 상인들 중 운이 좋은 극히 일부만이 청계천 상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청계천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죽어가는 청계천 상가들이었다.

가든파이브를 뛰쳐나온 상인들

청계천 복원 사업이 진행된 이후 청계천 주변의 지가는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결국 그 주변 땅을 소유하고 있던 대기업들과 그 주변에 투자를 노리고 있었던 투기자본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청계천 주변 상권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도소매업과 각종 다양한 사무용품과 제조업들이 복잡하게 얽혀 나름의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청계천 상가가 카페와 고급 음식점들에게 점점 잠식당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청계천 상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쓸려나가지 못한 채 가까스로 남아있는 고립된 섬처럼 도시의 한 구석에서 숨을 몰아쉬게 되었다.

점점 높은 주상복합 아파트가 지어지고 상가 건물은 낡아서 조금씩 무너져가는 사이 상인들의 근심만 하루 이틀 늘어갔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가든파이브를 뛰쳐나온 상인들이 갈 곳은 이곳밖에 없었다. 수십 년에 걸쳐서 자신의 삶의 터전이 되어왔던 공간을 두고 다른 곳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빈민과 대학생, 도시에 뿌리내리고 살 권리를 그리다'를 구호로 삼아 활동에 나선 2015 반빈곤권리장전 실천단은 공공사업을 핑계로 자본의 논리 앞에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청계천 상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나섰다.

분명 모든 시민들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생활하천의 복원을 위해 이뤄진 청계천 공공사업이 어찌하여 이들 청계천 상인들에게 만큼은 꼴 보기도 싫은 눈물의 개천이 되었는지 가든파이브에서 청계천으로 돌아온 상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들어보았다.

덧붙이는 글 | '청계천과 가든파이브, 누구를 위한 공공사업인가?'는 면접조사를 통해 들어본 청계천 상인들의 목소리와 해결방안에 대한 고민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빈곤, #청계천, #가든파이브, #이주,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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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은 경쟁을 강요하고 격차를 심화시키는 사회에서 발생합니다. 빈곤사회연대는 가난한 이들의 입장에서 한시적 원조나 시혜가 아닌 인간답게 살 권리, 빈곤해지지 않을 권리를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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