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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가 들어선 골목길은 지금의 도시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잘 정비되어 있다.
▲ 폼페이 골목길 상가가 들어선 골목길은 지금의 도시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잘 정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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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화산폭발이 내가 사는 도시를 덮친다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2000년 전에 지도에서 사라진 의문의 도시 폼페이.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 연안에 있던 폼페이는 고대 로마 시대 귀족들의 휴양지이자 무역으로 활발했던 아름답고 화려했던 항구 도시이다. 그러나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발생한 화산재에 묻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몇 세기 동안 잠들어 있던 폼페이는 1700년대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는 5분의 4 정도가 복원된 상태이다.

오늘은 화산 폭발로 지구 상에서 사라진 도시 폼페이로 여행을 떠난다. 고대 로마의 생활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잠들어 버린 도시 폼페이 유적에 대해 아들은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폼페이로 떠나기 전날 밤, 현지인에게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베수비오 화산이냐고 물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을 정도였으니까.

역사에 관심이 많은 아들이었지만 이 정도로 적극적일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이지만, 아들은 조용하고 먼저 나서지 않는 편이라 낯선 사람에게 무언가를 묻는 경우가 드물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누나가 많이 가 봤으니 그냥 따라다니겠다고 하여 딸과의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아들은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를 찾아 앞장서서 나가거나 체크인을 하는 등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외국인에게 먼저 질문을 하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이라 딸과 나는 매우 놀랐다. 여행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마력이 있는 듯하다.

부호나 대상인의 저택에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 집 내부의 벽화 부호나 대상인의 저택에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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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신의 집에는 알렉산더대왕의 이수스 전투신이 정교하고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다.
▲ 바닥의 모자이크 목신의 집에는 알렉산더대왕의 이수스 전투신이 정교하고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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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라도 빨리 폼페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점심으로 먹을 음료수와 빵을 챙겨 소렌토역으로 향했다. 소렌토에서 폼페이까지는 사유 철도(사철)로 한 번에 갈 수 있다. 사철 안은 사람으로 가득하다. 소렌토에서 볼 수 없었던 한국인 관광객도 눈에 많이 띈다. 가이드와 함께 하는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이다.

나폴리와 인근 도시는 치안이 불안하다고 알려져있기에 대부분의 한국 관광객들은 폼페이-아말피 해변-소렌토 순으로 투어를 하는 당일치기 남부투어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침 일찍 폼페이로 향하는 한국 단체 관광객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고작 며칠 한국어를 듣지 못했을 뿐인데도 반갑다.

왼쪽은 차도로 마차의 통행량을 짐작할 수 있는 수레바퀴 자국을 볼 수 있다. 오른쪽은 요즘의 횡단보도처럼 보행자가 건너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 아본단차 거리의 차도와 인도 왼쪽은 차도로 마차의 통행량을 짐작할 수 있는 수레바퀴 자국을 볼 수 있다. 오른쪽은 요즘의 횡단보도처럼 보행자가 건너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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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로 30여 분을 달려 폼페이 스카비역에 도착했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사서 유적지 입구로 들어선다. 주요 도로인 아본단차 거리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2000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무너진 벽들이 보인다.

폐허가 되었다길래 바닥에 흔적만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도시는 생각보다 훨씬 발전된 모습이었는데 도로는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있으며 밤에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하얀 빛의 야광석이 박혀 있었다. 교통량도 상당했는지 마차가 다니면서 생긴 바퀴자국도 남아 있다.

2000년 전에 세탁소가 있다니

왼쪽은 빵을 굽는 화덕이고 오른쪽은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조리대이다.
▲ 화덕과 조리대 왼쪽은 빵을 굽는 화덕이고 오른쪽은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조리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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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탈의실이며 오른쪽은 탕 내부의 모습이다.
▲ 폼페이 목욕탕 왼쪽은 탈의실이며 오른쪽은 탕 내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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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엔 수도시설이 많이 보인다. 무려 2000년 전에 거리마다 집집마다 상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니 그 기술이 놀라울 따름이다. 도시 안에는 세탁소, 빵집, 목욕탕 등 다양한 시설들이 있다. 목욕탕의 천장은 물방울이 사람에게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치형으로 되어 있었으며 물이 흐를 수 있게 홈이 파여 있는 등 아름다움과 과학이 집적되어 있다.

귀족의 집으로 추정되는 건물에는 화려한 색조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고 바닥은 아주 작은 돌로 만든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어서 로마의 문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목욕탕 뒤로 가니 유곽촌이 나온다. 작은 방 안에는 석조 침대가 놓여 있는데 침대의 크기로 보니 그 당시 사람들은 키가 작았나 싶다. 방 벽에는 남녀가 다양한 체위로 성관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아이들과 함께 보는 것이 좀 민망하기도 하다. 근처 건물의 벽에는 남근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사창가의 방향을 알려 준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남근상이 부와 행운의 상징이었기에 상인들이나 부자들이 벽에 새기고 부와 행운을 빌었다는 것이다.

골목골목의 건물들을 구경하고 나서 전시관으로 향했다. 전시관에는 폼페이 희생자의 화석이 있다. 코를 막고 앉은 채로 죽은 마부, 엎드려 죽은 사람 등의 모습을 보니 무섭고 공포스러웠을 화산 폭발 상황이 연상된다. 뱃속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웅크려 죽어간 임산부를 보자 죽어가는 순간에도 아이를 생각했던 모성애에 가슴이 짠하다.

마지막으로 원형 경기장에 갔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석조 원형경기장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콜로세움보다도 먼저 세워졌다고 한다. 2만 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으며 무대 중앙에서 목소리를 내면 경기장 전체에 들릴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로마 문화의 위력에 다시 한 번 감동을 받는다.

전시관에는 폼페이 희생자의 화석과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폼페이 희생자 화석과 유물들 전시관에는 폼페이 희생자의 화석과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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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석조 경기장으로 콜로세움보다 150년 전에 세워졌다.
▲ 원형 경기장 가장 오래된 석조 경기장으로 콜로세움보다 150년 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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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발전한 화려했던 도시가 화산 폭발로 하루 만에 폐허로 변해버리다니. 폐허가 주는 쓸쓸한 느낌에 날씨마저 우중충하여 비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햇빛도 없는 스산한 날씨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춥다.

그 많던 단체 관광객들은 가이드가 안내하는 주요 유적지만 훑고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빠져나간다. 우리는 인적이 드문 곳까지 구석구석을 다니며 다리가 아프도록 걸었다. 어느 정도 돌아보고 나니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베수비오 화산을 가자며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그런데 차가 없다. 1시 10분 차가 막차란다.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는 2시 40분 차가 있어서 나름 여유있게 왔건만 낭패다.

베수비오 화산을 찾아서

용암이 흐른 자리는 나무와 풀이 자라지 않는다.
▲ 베수비오 화산의 용암 용암이 흐른 자리는 나무와 풀이 자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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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왔는데 베수비오 화산을 못 보고 간다니 아쉬워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우리를 보고 택시기사들이 호객을 한다. 베수비오 화산을 보고 터미널에서 다시 내려주는 것까지 60유로란다. 적지 않은 돈이라 고민이 됐다. 과연 이 돈을 주고 갈 만한지 생각하는데 택시기사 한 명이 거리도 멀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화산 안에는 입장할 수 없지만 바로 앞까지 가 주겠다고 하여 흥정 끝에 50유로를 주고 가기로 했다.

택시 기사는 인상도 좋고 가이드처럼 화산에 대한 설명도 들려준다. 베수비오 화산은 활화산으로 70여 년 전인 1944년에 크게 폭발한 적이 있단다. 그 당시 용암이 흘러간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사진을 찍으라고 알려준다. 용암이 흘렀던 자국은 산꼭대기에서부터 물결처럼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용암이 지나간 곳은 회색빛이 되어 어떤 풀과 나무도 자라지 않는다.

기사는 아이를 지키려는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모자상 앞에서 차를 세우더니 우리를 찍어 주겠단다. 우리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니 재밌는 포즈를 취해주기까지 했다. 또 운전을 하면서는 자신은 이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으며 부인은 영국사람이고 부인과 연애를 하면서 영어를 익혔다고 술술 이야기를 한다. 우리 정도면 영어를 잘 하는 거라는 칭찬도 해 준다.

친절한 기사를 만나 베수비오 화산을 제대로 보고 가는가 싶었는데 처음 했던 말과는 달리 화산을 반도 올라가지 않고 내려온다. 흥정할 때는 3시간 정도 코스라고 했는데 겨우 30여 분쯤 올라가더니 바로 내려온다. 기사는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택시가 깊이 들어가면 위험하다. 버스도 끊긴다"라고 핑계를 댔다. 그렇게 기대하고 왔는데 분화구는커녕 언저리만 보고 가니 아쉬움이 컸다. 화산투어가 한 시간 반만에 끝나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게 여행이구나 생각하고 역으로 갔다.

아직도 해는 많이 남아 있다. "얘들아,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우리 항구까지 걸어가볼까?" "네, 가요." 의외로 아들 녀석의 반응이 선선하다.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이쯤에서 걸음을 돌리려는데 기찻길이 보인다. 기차가 자주 다니지 않는 길인 것 같아서 점핑샷을 찍자는 제안을 했다.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아들도 좋아한다. 셋이 다 같이 뛰어야 하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아 수도 없이 뛰었다. 정말 오랜만에 아이들과 해맑게 웃고 신나게 보낸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셋은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아들은 다음에 방문하면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구를 보고 말겠단다.


태그:#폼페이, #화산, #베수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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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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