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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를 출입하는 정치팀 이경태 기자가 기사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한 청와대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박근혜 대통령이 간만에 한숨 돌렸을 것 같습니다. 22일 발표된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의 6월 3주 차 정례조사 결과,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이후 2주 연속 이어졌던 지지율 하락세가 일단 멈췄기 때문입니다.

지난 15일부터 19일까지 전국 성인남녀 2500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에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전주 대비 0.3%p 상승한 34.9%를 기록했습니다(전화면접·자동응답 병행,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2.0%p, 관련기사 : 박 대통령 지지율 하락 멈춤... 박원순 차기 1위 유지).

'리얼미터'는 "1일 1회 이상 진행됐던 박 대통령의 메르스 행보"를 하락세 중단 원인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맞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현장 행보에 주력했습니다. 지난 5일 국립중앙의료원부터 시작해 총 8곳의 메르스 관련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초기 방역 실패·뒤늦은 병원공개 등으로 악화된 국민여론을 달래고 정부의 메르스 대응 의지를 천명하기 위한 민심행보였습니다. 지난 21일 가뭄 피해 현장 방문까지 포함하면 박 대통령은 지난 17일 간 총 9곳의 현장을 찾았습니다.

이날 발표된 '리얼미터' 정례조사 결과만 보자면, 이 같은 행보는 '득'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수치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박 대통령이) 매우 잘못하고 있다"는 강한 부정평가 응답은 전주 대비 2.4%p 늘어났습니다. 반면, "(박 대통령이) 매우 잘하고 있다"는 강한 긍정평가 응답은 전주 대비 2.1%p 줄었습니다. 결국 잘 익은 과일인 줄 알았는데 속을 열어보니 벌레 먹은 과일과 같은 겁니다. '리얼미터'도 "정부의 메르스 대책에 대한 불신의 강도가 여전하다"고 진단했습니다.

대통령이 부지런히 현장을 다녔는데도 결과물이 '벌레 먹은 과일'인 이유는 뭘까요. 역설적이게도 그 답은 박 대통령의 민심행보 때문입니다.

[설정] 기계실에서 나온 방호복 간호사에 '광고 외압' 논란까지

박근혜 대통령은 5일 메르스 환자 격리와 치료의 최일선 현장인 국가지정 격리병상을 방문, 메르스 대응 현장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 메르스 대응 현장 방문 박근혜 대통령은 5일 메르스 환자 격리와 치료의 최일선 현장인 국가지정 격리병상을 방문, 메르스 대응 현장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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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이 처음 찾은 국립중앙의료원 상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메르스 확진환자 발생 17일 만에 처음 진행된 박 대통령의 현장 행보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부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민간 전문가들과 함께 확산 방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국민들께서 믿음을 가져주시기 바란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방호복을 입은 간호사들을 격려하는 장면이 문제였습니다. 간호사들이 격리병실이 아니라 기계실에서 나와 대통령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다분히 '방호복 입은 의료진'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 했다는 '설정 논란'이 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지난 14일 방문한 서울대병원 메르스 치료 격리병동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대통령은 당시 격리병실에서 메르스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를 전화로 격려하고 병원을 돌아봤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동선 곳곳에 '살려야 한다'고 적힌 A4 용지가 붙어있습니다.

다시 '설정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박 대통령의 현장 행보에 '살려야 한다'는 비장함을 덧붙이기 위한 연출 아니냐는 지적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살려야 한다'는 문구를 앞에 두고 격리병실의 간호사와 전화통화하는 장면은 각종 패러디물로 재탄생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에 대한 청와대의 과잉 반응이 '외압 논란'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이 같은 '설정 논란'을 다룬 <국민일보>에 청와대 홍보수석이 직접 항의 전화를 넣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라고 19일 전국 일간지를 대상으로 집행된 정부의 메르스 대응 광고에서 <국민일보>만 쏙 빠졌기 때문입니다(관련 기사 : 청와대 압력 논란 낳은 박 대통령 주변 'A4 용지').

결과적으로 현장행보에 나선 박 대통령의 진정성을 훼손시키는 '혹'만 더 달게 된 셈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14일 서울대병원 메르스 치료 격리병동을 방문, 의료진과 통화하고 있다
▲ 격리병실 의료진과 통화하는 박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14일 서울대병원 메르스 치료 격리병동을 방문, 의료진과 통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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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판] 본질 흐려버린 '대통령 띄우기'에 '물대포' 논란까지

물론, 청와대는 억울해합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살려야 한다' 논란과 관련,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의료진들이 직접 만든 문구고, 환자들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그들의) 각오를 피력한 것인데 단순히 대통령과 함께 카메라에 잡혔다는 이유만으로 논란이 이는 이유를 모르겠다"라며 "(설정 논란은) 의료진들의 뜻을 정치적으로 곡해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외압 논란'에 대해서는 "광고 집행이야 문화체육관광부 등에서 하는 것"이라며 청와대의 '오더'가 아닐 것이라고 강변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기사가 되냐'는) 김성우 홍보수석의 말은 개인적으로 이해가 됐다"라고도 밝혔습니다.

즉, '진영 논리' 탓에 박 대통령의 행보를 무조건 폄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설정 논란'은 청와대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 대통령의 14일 동대문 상가 방문입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당시 따로 배포한 서면 브리핑이 '대통령 띄우기' 논란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14일 메르스 영향으로 해외관광객 감소와 소비위축 등 어려움을 겪는 국내 최대 규모 패션산업집적지인 동대문 상점가를 방문해 시민과 인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14일 메르스 영향으로 해외관광객 감소와 소비위축 등 어려움을 겪는 국내 최대 규모 패션산업집적지인 동대문 상점가를 방문해 시민과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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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방문한 밀리오레에는 주말을 맞아 쇼핑에 나선 시민들이 대통령의 깜짝 방문에 놀라며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들었고, '진짜 박근혜 대통령 맞아? 대박!!', '대통령 파이팅, 힘내세요' 등을 외치며 몰려드는 탓에 근접 경호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경호에 애를 먹기도…" 등 박 대통령에 대한 '환호'로 채워진 브리핑에서 '메르스'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와 관련, 전병헌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은 18일 CBS라디오 <박재홍의 뉴스쇼>에서 "저 역시 대통령 모시고 행사도 많이 해봤습니다만 이 시국에서 얼빠진 청와대라고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혹평했습니다.

청와대는 '대통령 띄우기' 비판에 "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작성한 것"이라고 항변했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을 근접 취재해 기자들에게 배포된 내용에 시민들 반응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고 그를 궁금해 할 다른 기자들을 위해 따로 그런 반응만 모아 작성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현장 행보 목적이 메르스 사태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정부의 대응 의지를 돋보이기 위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 항변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서면 브리핑이 박 대통령의 동대문 상가 방문에 담긴 메시지를 '오염'시켰기 때문입니다. "시민들 반응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는 참모들의 판단이 대통령에게 '독'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1일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가뭄피해지역을 방문해 논에 물을 주고 있는 모습.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1일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가뭄피해지역을 방문해 논에 물을 주고 있는 모습.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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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관련 현장은 아니지만, 박 대통령의 지난 21일 가뭄 피해 현장도 참모들의 능력을 의심케 하는 경우입니다. 박 대통령이 소방 호스로 메마른 논에 물을 뿌리는 장면이 보도됐지만, 청와대의 '의도'와 달리 "물대포를 쏘는 대통령"이란 비아냥만 사게 됐습니다. 박 대통령이 직사로 물을 뿌리면서 모종을 상하게 했다는 지적입니다. 대통령이 농사일을 모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계획한 참모들은 그로 인한 부작용을 사전에 방비하는 게 맞습니다.

문정은 정의당 대변인은 22일 "어쩌면 전시행정조차 똑바로 못하는지 모르겠다"라며 "나라에 역병이 돌고 가뭄이 도는데 도움은 못 되고 논이나 망치고 오는 대통령을 보니 답답한 마음만 든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진정성] 사과 받아낸 대통령... 국민이 원하는 행보는?

박근혜 대통령이 17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질병관리본부 국립보건연구원 방문, 송재훈 삼성서울병원장이 자리에 앉으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17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질병관리본부 국립보건연구원 방문, 송재훈 삼성서울병원장이 자리에 앉으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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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박 대통령의 '태도'입니다. 박 대통령이 문제의 핵심을 알고 있다면 어떤 행보라도 국민들은 수긍할 겁니다.

국민은 정부의 메르스 초동 방역 실패에 대한 솔직한 사과부터 원합니다. 실제로 <서울신문>이 지난 18일부터 21일까지 일반 국민 109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57.9%가 메르스 확산의 가장 큰 책임자로 박 대통령을 꼽았습니다.

전화 설문조사를 한 의료전문가 20명 중 절반인 10명은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을 '가장 큰 책임자'로 꼽았지만, 문 장관 역시 박 대통령이 책임을 같이 져야 할 국무위원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아직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과를 받았습니다. '메르스 최대 진원지'가 된 삼성서울병원의 송재훈 원장은 지난 17일 충북 오송 국립보건연구원에서 박 대통령을 만나, "보건당국과 협조하고 최대한 노력을 다 해서 하루 빨리 끝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며 허리를 숙였습니다. "더 확실하게 방역이 되도록 해주시기 바란다"라는 박 대통령의 질책을 받은 후였습니다. 사실 정부가 져야 할 방역 실패의 책임을 민간 병원에게 묻는 대통령에게서 국민은 무엇을 봤을까요.

이명박 전 대통령도 현장 행보에 능했습니다. 2008년 12월 4월 새벽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을 찾아가 노점상 할머니에게 목도리를 벗어줬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이는 '쇼'라는 일각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강부자 내각', '부자감세' 등 반(反) 서민적 정책행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국민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치'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정성'이란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은 자신의 저서 <대통령의 글쓰기> 중 '이미지를 생각하라'에서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당시 오열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두고 이를 강조합니다.

"비록 당국의 반대로 (김 전 대통령이) 추도사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오열)은 어느 연설보다 위대한 웅변이었다. (중략) 진짜를 보여줘야 한다. 가짜는 금세 들통나게 돼 있다. 만들어 낸 가짜는 반드시 실패한다.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박근혜, #메르스, #가뭄, #물대포, #살려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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