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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황유미 추모문화제 등 명환씨는 반올림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명환씨가 찍은 사진은 <또하나의 약속> 영화에 들어갔습니다.
▲ 고 황유미 8주기 및 반도체 전자산업 산재사망 노동자 합동추모주간 고 황유미 추모문화제 등 명환씨는 반올림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명환씨가 찍은 사진은 <또하나의 약속> 영화에 들어갔습니다.
ⓒ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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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에서 만난 명환이는 몸이 많이 부어서인지 제가 기억하는 이상으로 커 보였습니다. 생각해보니 병원 침상에 누워 있는 그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십여 년 전, 신장 이식을 받았을 때 문병을 갔던 기억이 있으니까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6년 아주대 동아리 샘터 야학에서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이 돼야 했을 16살 명환이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어서 투석을 받아야 하는 아이, 가늘게 마르고 키도 작아 약해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저는 대학에 갓 입학해서 야학 생활을 시작한 신입 교사였고, 명환이는 야학의 신입생이었습니다.

우울해야 당연했던 아이, 하지만 달랐습니다

그때의 반 이름이 '작은새반'이었습니다. 워낙 작은 공간이었던 터라 5명 정도가 정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결석이 잦았던 반면, 명환이는 거의 결석을 하지 않아 어쩌다 저와 둘이서만 수업을 하게 되면 함께 저녁을 먹고 오는 것으로 수업을 대신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 차이가 있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저를 '형'이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어찌 보면 낮에 학교에 다니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살지도 않는 청소년 명환이에게 야학이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한 교사들에게도 수련회, 체육 대회, 예술제 등의 행사에 거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함께 해줬던 명환이의 존재가 큰 힘이 됐습니다.

제가 보기에 명환이는 분명 외롭고, 우울한 아이여야 했습니다. 틀림 없이 제가 명환의 입장이었다면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결코 단 한 번도 우울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항상 밝은 얼굴이었고 뭐든 해보려고 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질문을 많이 해서 저를 고민해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바늘 자국 가득한 앙상한 팔뚝을 내밀며 팔씨름을 하자고 덤볐을 때나, 농구 시합을 할 때나... 안 될 걸 뻔히 알 것 같은데 그는 무모하리만치 달려들었습니다. 쓸쓸한 마음 뭔가를 숨기려고 '오버'하는 거였다면 티가 났을 텐데, 원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인 양 매사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2년간의 야학 교사 생활을 마치고 저는 보통의 대학생이 거쳤을 과정들을 하나씩 지나 왔습니다. 입대, 제대, 복학, 학점 쌓기, 취업 준비, 졸업, 결혼, 자녀, 입사... 그리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들과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 않음에 안도하기도 하고, 때때로 무력감도 느끼며 지냈습니다. 그러는 사이 명환이를 두세 번 정도 스치듯이 만났고, 명환이는 예전과 같이 웃으며 "형" 하고 불렀습니다. 뭐 하고 살았는지 밥 한 끼, 커피 한 잔 같이 할 마음의 여유가 그때의 제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명환이를 본 건 지난해 10월이었습니다. 작은 체구를 더 작아 보이게 만드는 커다란 가방과 DSLR 카메라를 메고 있었습니다. "카메라 좋은데"하고 물었을 때, 그는 요즘 사진을 찍는다고 했습니다. 그때 좀 더 얘기를 나눴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명환이의 페이스북을 찾아 친구 요청을 했습니다. 페북 속에는 사진작가로서의 고민, 사회에 대한 외침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렌지'로 세상에 나선 명환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6년 아주대 동아리 샘터야학에서 였습니다. 저는 대학에 갓 입학해서 야학생활을 시작하는 신입교사였고, 명환이는 야학의 신입생이었습니다. 수련회, 체육대회, 예술제등의 행사에 거의 한번도 빠지지 않고 함께 해 줬던 명환이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6년 아주대 동아리 샘터야학에서 였습니다. 저는 대학에 갓 입학해서 야학생활을 시작하는 신입교사였고, 명환이는 야학의 신입생이었습니다. 수련회, 체육대회, 예술제등의 행사에 거의 한번도 빠지지 않고 함께 해 줬던 명환이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 은빛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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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또 하나의 약속>영화에서 봤던 사진이 명환이가 찍었던 사진이었고, 내가 세월호를 지켜보며 참담해 하던 그때, 그는 현장에서 셔터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작은새반이었던, 가늘고 약했던 명환이가 '오렌지'란 이름으로 세상 이곳저곳을 다니며 힘든 이에게 힘이 되는 활동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의 불의에 분노하고, 자신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고. 찌개를 잘 끓이고, 건담을 좋아하는 명환이가 심장 정지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습니다. 혈소판 수치가 낮아져 출혈이 멈추지 않아 하루 하루 근근이 버티고 있습니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남동생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병원비가 매일 올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만나서 그때 못했던 밥 한 끼, 커피 한 잔 같이 할 수 있도록 의식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페북의 친구 요청을 수락해줬으면 좋겠습니다. 35살, 이제 막 날기 시작한 그가 더 오랫동안 사진 찍는 활동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의 글쓴이는 샘터야학 전 교사였고, 현재는 회사원인 안대훈님입니다.

[오렌지 치료비 긴급 모금] 신장병으로 오랫동안 투석해오던 명환씨가 갑자기 심장 정지로 중환자실에 누워있습니다. 치료비가 많이 듭니다. 우리 마음을 모으는 일은 그를 외롭지 않게 함께 지키는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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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오렌지가 좋아, #샘터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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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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