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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드로잉'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그린 자화상.
▲ 최대한 가리기 '데일리 드로잉'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그린 자화상.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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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은 엄청난 참사를 겪었다. 이는 국가 차원의 참사이기도 했지만, 나처럼 사소한 개인에게도 일상이 무너지는 참극이었다. 그냥 걷다가도 무릎이 꺾였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솟았다. 어떨 때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 하루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내 마음의 답답함을, 울분을, 참담함을, A4 크기의 드로잉북에 담았다. 집중해서 드로잉을 하다 보면 온종일 답답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고작 드로잉으로 풀어질 마음이었다면, 세월호를 참극이라 부르지도 않았겠지. 다만 집중해서 드로잉을 하는 순간만큼은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세월호 참사 1주일 후 그린 노란리본 나무
▲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세월호 참사 1주일 후 그린 노란리본 나무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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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이들이 생존해 돌아올 가능성이 없겠구나... 절망했을 때 그렸던, 아이들이 들고 가는 종이배 그림.
▲ 함께 이제는 아이들이 생존해 돌아올 가능성이 없겠구나... 절망했을 때 그렸던, 아이들이 들고 가는 종이배 그림.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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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그림은 지난해 4월 15일 이후 많은 이가 SNS 프로필과 현수막, 책자에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진, 꽤 유명한(?) 드로잉이다. 이 드로잉 역시 '매일' 나를 다독이고 마음을 다잡기 위한 과정에서 그린 드로잉이다. 이 두 드로잉 덕에 지금까지 사는 동안 들어본 인사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감사의 인사를 들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들에게서.

그러나 정작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하루 하루 참담함에 무너지려 할 때마다 드로잉은 내게 다시 일어설 힘을 줬고, 내 드로잉에 위로를 얻었다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외려 내가 위로를 받았다.

데일리 '드로잉'이 아니라 '데일리' 드로잉

'작정하고' 관찰하고 '작정하고' 그린 드로잉
▲ 가까이서 자세히 '작정하고' 관찰하고 '작정하고' 그린 드로잉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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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절망의 시절을 견디게 해준 데일리 드로잉을 처음 시작한 것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봄, 한 지인이 페이스북에 아무 설명도 없이 의자 그림을 올렸다. 나는 물었다.

"이게 뭐예요?"
"매일 한 장씩 아무 거나 그려서 이렇게 올리는 거예요."
"아무 거나?"
"네, 아무 거나 매일 한 장씩."

왠지 재미있어 보였고, 곧장 빈 노트를 펼쳐 그림을 그렸다. 휴대 전화로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2010년 5월 20일의 일이었다. 그렇게 '마법사의 데일리 드로잉'의 역사는 시작됐고, 호기심으로 시작한 드로잉을 지금까지 5년 남짓 이어오고 있다.

데일리 드로잉은 그림 그리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다. 잘 그리고 싶다면 미술학원에 가는 게, 전문가에게 레슨을 받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데일리 드로잉은 일종의 그림일기다. 하루의 일상을 글이 아닌 드로잉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일 수도 있고, 인물일 수도, 혹은 동물이나 사물일 수도 있다. 구태여 구구절절 설명글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그날의 드로잉 대상으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기록의 시작이다.

데일리 드로잉에서 중요한 것은 '드로잉'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하루, 그 하루를 드로잉으로 기록하는 것에 필요한 것은 '매일'이다.

관계의 시작, 관찰

비시각장애인들은 누구나 세상을 '본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은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들이 훨씬 많다. 보지 않고 기존의 경험에 기대어 그러려니 짐작하고 단정 짓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드로잉을 하려면 일단 대상을 '관찰'해야 한다. 삼차원적인 대상을 드로잉북에 이차원적인 선과 면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스치듯 지나치며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꽤 오랫동안 '뜯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관찰하다 보면, 기존에 익숙하게 알고 지내던 대상도 새롭고 낯설게 여겨진다. 있는지도 모르고 무심히 지나쳤던 대상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나태주 시인이 '들꽃'이라는 시에서 노래하지 않았던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데일리 드로잉이 그렇다.

드로잉으로 만나게 된 친구들

2015년 4월 한 달 동안 삼산도서관에서 진행한 데일리 드로잉 워크숍.
▲ 삼산도서관 데일리 드로잉 워크숍 2015년 4월 한 달 동안 삼산도서관에서 진행한 데일리 드로잉 워크숍.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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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평구 산곡동 작은도서관인 달팽이미디어도서관에서 지난 5월 11일부터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는 데일리 드로잉 워크숍.
▲ 달팽이미디어도서관 데일리 드로잉 워크숍 인천 부평구 산곡동 작은도서관인 달팽이미디어도서관에서 지난 5월 11일부터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는 데일리 드로잉 워크숍.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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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다. 미술학원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다. 내가 받은 미술 교육은 정규 교육 과정의 미술 수업 시간이 전부다.

그런 내가,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직업인 내가, 요즘 드로잉 강사로 사람들을 만난다. 5년 남짓한 데일리 드로잉의 경험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그들이 나를 불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강사로 나가게 되면 옛날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인 관계가 명확하기 마련인데, 데일리 드로잉은 다르다. 그저 나는 5년 먼저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했던 사람이다. 강사로서 내가 하는 일이라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5년 동안의 데일리 드로잉 경험을 수다로 풀어내는 것뿐이다. 그러고는 바로 같이 그리고, 나누고, 떠든다. 그게 전부다.

뭔가 날로 먹는 강의 같지만, 그럼에도 참여자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다. 그림 기술이 늘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림 잘 그리는 법을 알지 못한다. 당연히 그림 잘 그리는 법을 가르칠 수도 없다. 그럴 생각도 없다. 그저 수강생들이 '어릴 때는 스스럼없이 했는데 어쩌다가 잊어버린,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드로잉으로 놀던 기억을 소환할 뿐이다. 그저 같이 놀 뿐이다. 그저 같이 떠들 뿐이다.

그렇게 드로잉으로 노는 법, 드로잉으로 일상을 기록하는 법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갈 때마다 뿌듯하다. 그렇게 드로잉으로 만난 친구는 (술 친구나 공부 친구, 영화 친구와는 또 다른) 깊이 있는 사연을 가지게 된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수다가 쌓여

2012년 10월 14일까지 데일리 드로잉을 했던 드로잉북을 그린 드로잉.
▲ 버리기 No.7 - 기록 2012년 10월 14일까지 데일리 드로잉을 했던 드로잉북을 그린 드로잉.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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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도 아니고 나 같은 보통 사람의 일상은 어쩌면 무료하고 어쩌면 사소하다. 그러나 가끔 여유 있을 때 수십 권 쌓인 나의 드로잉북을 펼쳐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상도 매일 쌓아 놓으니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엔 액션 어드벤쳐가 있고 구질구질 삼류 통속극도 있고 신비로운 영적 세계도 있고 비루하지만 생물처럼 펄떡거리는 생기가 있다. '삶이 곧 예술'이라는 관용적 표현이 그저 헛말이 아님을 깨닫는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수다가 쌓이면, 그것은 서사가 되고 예술이 된다.

또한 데일리 드로잉은 나 자신을 변화시킨다. 드로잉으로 매일을 쌓는 것, 데일리 드로잉의 반복은 그냥 지루한 반복이 아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1년이 되고 3년이 되고 5년이 되면서, 그것은 나의 살갗이 되고 나의 숨이 된다. 습속이 된다. 일상이 된다.

이것은 전문가가 되기 위한 꾸준한 훈련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런 반복으로 전문가, 밥벌이를 가능케 하는 기술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데일리 드로잉의 반복은 삶을, 일상을 변화시킨다. 일상을 바꾸고 습속을 바꾸는 것, 이것은 어쩌면 혁명보다도 더 큰 변화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온라인에서는 별칭 '마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인천여성영화제 공식 블로그에도 함께 실었습니다.



태그:#데일리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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