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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과 23일, 한 추모 문화제가 부산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일본인 아오야기 준이치 부부가 참석했다. 이번에 그가 출간한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행복한책읽기 펴냄)의 한글판 출판 기념회도 추모 문화제와 함께 열렸다. 준이치는 <피폭자 차별을 넘어 살아간다>(삼일서방, 2014)는 일본어 서적을 통해 반핵 인권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준이치는 2003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서인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를 일본어로 번역, <나는 한국을 바꾼다>(조일신문사, 2003)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기도 했던 엠네스티 활동가다(관련 기사 : 노무현 대통령의 저서를 일본어로 번역 출판한 아오야기 준이치 선생). 또 한 사람, 지난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NPT(핵확산방지조약)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미, 유엔에서 최초로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제기한 김봉대씨도 참석했다.

이들이 추모한 이는 다름 아닌 반핵 인권 운동에 목숨을 바친 원폭 피해자 2세 고 김형률씨였다. 준이치는 그의 유고집을 펴낸 이이고, 김봉대씨는 그의 아버지다.

원폭 피해자 2세, 김형률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표지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표지
ⓒ 행복한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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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률, 독자 중에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김형률은 1970년 부산에서 태어나 2005년 '선천성 면역 글로불린 결핍증'이라는 희귀병으로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왜 그가 떠난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추모하는 것일까

그는 원폭 피해자다. 그것도 직접 피해자가 아니고 간접 피해자, 즉 원폭 피해자 2세다. 김형률은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된 원폭 1세 피해자였던 어머니 이곡지의 몸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났다.

이곡지는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이곳에서 3km 떨어진 후나이리카와구치쵸에서 피폭됐다. 김형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온갖 원폭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은 원폭 피해자 2세다. 그가 앓았던 병인 '선천성 면역 글로불린 결핍증'은 원폭으로 인해 유전적으로 체내의 면역력을 높여주는 면역 글로불린이 결핍돼 세균에 쉽게 노출되고, 이 때문에 기관지 폐색이나 폐렴으로 목숨까지 위협받는 병이다.

고 김형률은 자신이 원폭 피해자 2세라는 걸 알고 2002년 3월, 국내 최초로 자신이 원폭 후유증을 지닌 원폭 피해자 2세임을 공개 표명했다. 당시는 그런 사실을 알리는 게 쉽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이를 두고 '용기 있는 커밍아웃'이라고들 한다.

그는 '한국 원폭 2세 환우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지내며 한국 원폭 피해자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각고의 노력으로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원폭 피해자 실태 조사를 이끌어냈다. 끊임 없이 '한국 원자 폭탄 피해자와 원자 폭탄 2세 환우의 진상 규명 및 인권과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온 힘을 기울였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원폭 피해자 2세 환우들의 인권을 위해 애쓰던 중 지병이 악화돼 2005년 5월 29일 35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관심은 원폭 피해자를 위한 보상 차원을 넘어 '인권'문제까지 이른다. 그는 2003년 12월 14일 쓴 '한국 원폭 2세 환우들의 인권 회복을 위하여'란 글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지난 58년 동안 일본 정부로부터 '인권 유린'에 가까운 차별정책으로 인간된 삶을 누리지 못한 채 한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한국 원폭 피해자들은 원폭후유증이라는 미증유의 질병을 앓고 있지만 한국 어디에서도 원폭 후유증을 전문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 시스템 부재 속에서 열악한 건강 상태는 정상적인 생계 활동을 가로막아 가족 전체의 빈곤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병고와 빈곤의 악순환'에 시달리며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66~67쪽

김형률, 원폭 피해자 2세 인권 운동에 매진

그의 원폭 피해 2세 환우들의 인권 회복과 생존권 보장을 위한 지난한 투쟁과 투병의 삶은 지금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죽었지만 살아 있다. 김형률은 이 땅에 원폭 2세 환우들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의 문제와 인권을 처음으로 공론화한 인물이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있을 때 그 '관심'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원폭 피해자 2세들의 건강과 삶의 질을 위해 뛰었던 김형률의 노력으로 국가인권위원회는 원폭 피해자와 원폭 피해 2세에 대한 건강 실태 조사를 권고하기에 이른다. 건강 실태 조사에 원폭 피해의 1세뿐 아니라 2세도 포함한 일은 김형률의 끊임 없는 노력의 결과다.

"한국 정부는 지난 59년 동안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는 환국 원폭 피해자들을 방치했다"며, 2004년 6월 '건강검진사업과 생존권 보장을 위한 요망서'를 정부에 보냈다. 그는 요망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 정부는 헌법에 명시한 인권보장 책임을 외면함으로써 한국 원폭 피해자 1세들은 물론 한국 원폭 2세 환우들의 헌법적 기본적인 행복추구권(10조)과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권리와 건강권(34조)을 침해해 왔습니다. 이는 한국 정부가 1990년에 가입하여 국내법과 동일한 법 효력을 갖고 있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의 이행의무(2조), 사회보장(9조), 건강권(12조) 조항을 위반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129~130쪽

이처럼 김형률의 원폭 피해 2세 인권 운동은 국내법과 국제법을 망라해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정부는 물론 일반인까지 핵 위험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됐다. 핵 전쟁 반대는 물론, 핵 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이라는 허울 속에 숨은 핵의 반인륜적인 패악을 드러내고 핵 전쟁 준비를 중단할 것을 외쳤다.

그의 노력은 마침내 TV와 신문, 잡지 등에서 원폭피해 2세의 삶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장경수 PD를 만나 "한국 원폭 2세 환우를 '방사능과 유전'으로만 본다면 해답이 없다"며 "'인권 회복'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인간의 권리에 원폭 피해자가 외면 당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나에게 있어 일상은 전쟁입니다"라는 그의 표현은 그가 겪은 삶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는 '한국 원자 폭탄 피해자와 원자 폭탄 2세 환우의 진상 규명 및 인권과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가 간 지 10년이 지나 추모식을 하는 지금도 그가 제안한 특별법은 제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갔지만 지금까지도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고 있다.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는 유고집이라는 한계 때문에 김형률의 진면목을 다 그러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숭고한 뜻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오야기 준이치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미약하지만 나도 이 글로라도 이 일에 동참한다는 자부심을 가져본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김형률 지음 / 아오야기 준이치 엮음 / 행복한책읽기 펴냄 / 2015. 5 / 295쪽 / 1만5000 원)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길일 것 같아 그 길을 걸으려고요.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나는 反核人權 에 목숨을 걸었다 - 반핵인권운동에 목숨을 바친 원폭2세 故 김형률 유고집

김형률 지음, 아오야기 준이치 엮음, 행복한책읽기(2015)


태그:#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김형률, #아오야기 준이치, #원폭피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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