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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엄마 대신 아빠와 함께
▲ 아빠가 있는 아침 풍경 바쁜 엄마 대신 아빠와 함께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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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 분야인 남편 회사의 1년 마감은 4월이다. 매월 마감을 치던 예전 회사에 비하면 1년에 한 번이라 일도 아닌 듯하지만, 한 해 사업 마감을 하고, 다음 연도 사업 계획안을 짜야 했던 지난 4월 남편은 정말 바빴다. 야근은 물론 기본 주말 근무도 많았다. 4월만 지나면 한가해질 거라던 남편은 5월이 되자 세 번의 워크숍 일정을 알려줬다. 1박 2일이 두 번, 2박 3일이 한 번.

미리 알려줘 알고는 있었지만, 4월 달력을 넘기고 연휴에도 잡힌 남편의 주말 출근과 워크숍 일정을 보니 짜증이 났다. 밖으로는 나름 내조 잘하는 아내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집에서는 잔소리 마누라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처지인지라 짜증과 투정이 터지고 말았다. 처음 얼마간은 (내가 듣기엔 '영혼 없는') "미안해"라는 말로 답하던 남편은 내 잔소리가 3절까지 이어지자 참았던 화를 쏟아 냈다.

동갑내기 부부의 부부 싸움

결국 5월도 되기 전에 남편의 워크숍 일정을 두고 부부 싸움을 하고 말았다. 결혼 7년 차에 접어들면서 예전처럼 싸움이 잦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 가끔 화를 내고 울고 짜고 하는 동갑내기 부부다. 서로가 바쁘고 힘들어 상대를 배려할 틈이 없을 때 꼭 부부 싸움이 터진다.

"내가 친구들이랑 술 먹고 논다고 집에 안 오는 거 아니잖아. 회사 일인데 어떻게 해!"
"당신이 하나 모르는 게 있는데, 당신이 야근을 한다는 건 나도 집에서 야근을 한다는 거고, 당신이 워크숍에 가서 밤새 회의를 한다는 건 나도 그렇다는 거야."

각자 억울한 사정을 성토했고, 몇 번의 고성이 오간 다음에야 서로의 말을 들었다. 남편은 '나도 야근, 나도 밤새 회의"라는 말을 그제야 진지하게 들어줬다. "그래도 내가 돈 벌잖아"라는 말이 따라 나오길래,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그게 왜 당신 혼자 버는 돈이야? 당신이 버는 돈의 절반은 내가 집에서 살림하고 애들 키우면서 같이 버는 거야."

남편은 별말 없이 수긍을 했지만, 사실 전업 주부로서 아직 남편의 월급의 반은 내 노동의 대가라는 생각이 떳떳하지는 않다. 남편 옷, 애들 옷은 사도 내 옷은 늘 머뭇거려지는 이유와 비슷한 마음이다. 산뜻하게 마무리된 부부 싸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했던 부부 싸움으로 그동안 참아왔던 속내를 알게 됐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돌멩이와 물
▲ 워크샵 간 남편이 보낸 풍경 아이들이 좋아하는 돌멩이와 물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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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에서 회의만 하는 건 절대 아닌 것 같다.
▲ 워크숍 간 남편이 보낸 풍경 워크숍에서 회의만 하는 건 절대 아닌 것 같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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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이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헤아리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속 깊은 부부가 될까? 그러나 2년 연애, 7년 결혼으로 9년 정도 한 남자와 같이 살아보니 먼저 결혼한 친구의 표현처럼 뒤꿈치가 낡아 헐거워진 운동화 같은 부부는 된 듯하다. 비록 미리 부부 싸움을 했지만, 워크숍 갈 때마다 살뜰히 짐 가방을 싸주고 매일 큰 아이 등하원에 쓰는 자가용까지 기분 좋게 내어줬다.  

남편 없는 밥상

그렇게 남편도, 차도 집을 떠났다. 남편이 없는 집에서 난 남편 몫까지 일을 하고 차가 없는 집에서 나와 아이들은 좀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 "아빠 두 밤 자고 올게"라는 인사를 하고 아빠가 집을 나서자 아이들은 "아빠 몇 밤 자야 오냐"고 가끔 물었다.

아직 말문이 트이지 않은 막내만이 내게 혼나거나 누나와 형을 이기지 못하면 서럽게 "아빠, 아빠"를 불러댄다. 저녁 먹고 자기 전 아빠와 신나게 몸으로 놀던 아이들은 잠자기 전 아빠의 빈 자리를 제일 많이 느낀다.

나 역시 남편의 빈자리가 크다. 저녁을 지어 세 아이 다 먹이고 나면 남편이 설거지를 해주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런데 남편이 없는 저녁은 나 혼자 저녁 밥상을 차리고 세 아이 샤워 시켜 이부자리를 펴 재우기까지 다 해야 한다. 둘이 하던 일을 혼자 몇 시간 동안 해내고 나면 선선한 밤인데도 땀이 날 정도다.

그러나 남편이 없는 식탁이라 조금 여유가 있기도 하다. 남편이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이면 신경 써서 한두 가지 새로운 반찬을 해 밥상을 차리게 된다. 그러나 남편이 없는 식탁은 대부분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품 요리로 간단하게 끝낸다. 설거지 그릇 하나라도 더 줄이고 싶은 게으른 주부는 아이들이 먹고 남으면 먹고 아님 마는 단출한 식탁을 차리고 치운다.

그러나 엄마의 퇴근은 아직, 오늘도 엄마는 야근
▲ 아이들이 잠들었다 그러나 엄마의 퇴근은 아직, 오늘도 엄마는 야근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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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없는 밤

남편이 없다는 생각에 더 바빠지는 마음은 최대한 서둘러 아이들을 이불 위에 눕히고 불을 끈다. 더 놀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훤히 보이지만 아빠 없는 저녁 엄마는 야근이다. "내일 아빠 오면 놀자, 아직 엄마 설거지도 못했어"라는 미안한 인사를 하고 문을 닫고 나온다. 아이들은 불 꺼진 방에서 노래를 부르다 웃긴 이야기를 하다 스르르 잠이 든다.

그런 아이들의 소리를 흐뭇하게 들으며 설거지를 하고 대충 집안 정리를 하고 하루만 지나도 수북하게 쌓이는 빨래를 돌리고 개고, 널다 보면 어느새 밤 10시. 수당도 없는 야근이 비로소 끝나고 퇴근이다. 엄마에서 나로 돌아온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 싶지만, 챙겨보던 드라마도 다 못 보고 안방에서 대자로 뻗어버리고 만다. 그래도 남편도 아이들도 없는 안방은 넓고 넓다.

남편 없는 아침

일찍 잔 아이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배고프다, 막내가 장난감을 뺏는다 어쩐다 야단이다. 더 이상 밤에 자다 깨 젖을 먹이지 않고, 몸부림을 치며 자는 아이들에게 발로 얻어맞지 않는데도 왜 아침은 늘 힘든 걸까. 겨우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까꿍이에게 씻어라, 유치원 늦겠다 잔소리를 랩처럼 해대며 아침상을 차린다. 하필이면 도서관에서 마을극단 모임 있는 날이다. 모임 끝나면 첫째 하원 하러 바로 가야 해서 산들이와 복댕이 간식과 점심 도시락까지 싸야 하는 날이다.

잔소리는 둘째, 셋째에게도 가동된다. 누나 따라 잠옷 벗고 세수해라, 이불도 개라 등등. 아침을 준비하는 사이사이 세 녀석 씻고 옷 갈아입는 걸 챙긴다. 아이들이 아침을 먹는 동안 첫째 머리를 묶는다. 10분만 일찍 일어났으면 이렇게 바쁘진 않았을 텐데. 매일 아침 후회를 하지만 쉽지가 않다. 전날 밤 자기 전에 아침거리를 미리 준비해놓고 아침엔 일찍 일어나 차분하게 아침을 먹으며 오늘 하루의 계획을 나누는 '아침이 있는 삶'에 대한 글을 읽고 다짐을 했건만. 언제가 되면 부지런한 엄마, 아내가 될 수 있을까?

우린 자가용보다 버스타고 유치원 가는게 더 신나!
▲ 로기가 올까, 타요가 올까? 우린 자가용보다 버스타고 유치원 가는게 더 신나!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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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없는 날은 버스로
▲ 작전명: 누나의 하원 차가 없는 날은 버스로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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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널을 뛰듯 아침을 열고 막내를 휴대용 유모차에 태우고 까꿍이와 산들이에게 '빨리 빨리'를 외치며 엘리베이터에 탄다. 그제야 거울을 보니 아침에 일어나 대충 묶은 머리 그대로다. 겨우 세수만 하고 손에 잡히는 옷을 입고 나온 모습이 누가 봐도 아줌마다. 그러나 이런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까꿍이 등원을 시켜주던 남편이 없어 오늘은 내가 등원을 시켜야 하는데, 이미 지각이다.

차가 없는 시간

셔틀버스가 없는 옆 동네 병설 유치원에 다니는 누나의 등원길에 따라나선 동생들은 지각이든 뭐든 아침부터 버스를 탄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벌써 9시가 넘었다며 조바심이 난 까꿍이는 애가 탄다.

서둘렀는데도 남편 없이 준비한 아침은 30분이나 지각이다. 까꿍이를 들여보내고 나서야 한숨 돌린다. 마을극단 모임까진 한 시간의 여유가 있다. 차가 있다면 다시 집에 갔다가 시간에 맞춰 도서관으로 갈 텐데, 이런 날은 동선을 줄이며 여유를 가진다. 15분 거리에 있는 마을의 작은 도서관으로 산책하듯 향한다.

마을극단 모임을 끝내고 아이들 점심을 먹인 후 다시 유치원으로 걸어간다. 뜨거운 차 안 공기를 억지로 식히려 에어컨을 틀어대고 카 시트에 아이들을 태우고 내리고 하는 수고 대신, 시간적 여유를 넉넉하게 두고 나선 걸음은 여유롭다.

낮잠 시간인 복댕이는 유모차에 앉아 달콤한 낮잠에 든다. 더워진 날씨에 10분 넘게 걷다 보면 땀이 나지만 바람이 시원하고 나무 그늘이 좋은 계절이라 나무 그늘을 찾아 걷는 길이 나름 운치 있기도 하다.

집으로 가는 길은 시원하지요
▲ '쭈쭈바'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은 시원하지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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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꿍이를 맞아 집으로 가는 길, 낮잠에 든 복댕이 때문에 버스 타기 힘든 사정이다. '쭈쭈바' 하나씩을 안기고 다시 길을 걷는다. 아이들에겐 30분이 넘는 길이지만 '쭈쭈바'와 함께 하는 길은 즐겁기만 하다. 자다 깬 복댕이도 '쭈쭈바'를 입에 물고 누나를 따라 형을 따라 여름길을 걷는다.

없어 봐야 안다

남편은 오늘, 5월의 마지막 워크숍을 떠났다. 그저께 워크숍에서 돌아왔는데 다시 떠났다.  남편이 없는 집의 불편함과 바쁨이 다시 반복되겠지만, 이제 그렇게 서운하지 않다. 남편이 없는 며칠은 바쁘지만 간소하기도 했다. 차가 없는 며칠은 번거롭지만 이동을 최소한으로 하며 조금 일찍 길을 나서 여유롭기도 했다.

산책도 하며 놀며 꽃구경도 하며
▲ 집으로 가는 길 산책도 하며 놀며 꽃구경도 하며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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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없는 틈에서야 남편이 있던 자리가 보였다. 지역을 위한 일만 하지 말고 집안일도 좀 해달라 잔소리였는데 남편은 자신의 몫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남편의 표현대로 '평균 이상'이다. 아빠와 함께 하는 등원길과 '놀아주는 아빠'가 아닌 '함께 신나게 노는 아빠'와 쌓아가는 유년의 추억은 아이들에게도 내게도 아주 큰 자리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내겐 무덤덤한 남편이지만, 별말 없이 분리수거와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씻겨주면서 내게 쉴 틈을 주는 남편이다.

그러고 보니 남편에게 이 말을 정식으로 한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남편보다 더 애교 없고 표현에 인색한 아내인 나였다. 더 늦기 전에,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해본다.

"여보, 고마워, 히."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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