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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말 연세대 송도 국제캠퍼스에서 해직된 청소 및 경비노동자들의 노숙농성장에서 배식하고 있는 밥통 회원들.
 지난 2월말 연세대 송도 국제캠퍼스에서 해직된 청소 및 경비노동자들의 노숙농성장에서 배식하고 있는 밥통 회원들.
ⓒ 백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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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완승씨는 요즘 일주일에 두 번꼴로 밤을 꼬박 새워 수십 명분의 반찬을 만든다. 지난 3월 3일에는 호박전과 표고버섯전, 왕새우 튀김을 1백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으로 만들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농성하고 있는 청소 용역 노동자들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백씨가 처음으로 노동자들을 위해 밥을 짓게 된 것은 지난해 6월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 1천여 명이 삼성역 삼성 본관 앞에서 장기 농성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 파업은 동료 노동자 고 염호석씨의 자살을 계기로 시작됐다.

농성장의 노란 밥차를 아시나요?

지방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 시멘트 바닥에서 노숙하며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청주에 사는 백은주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계기로 농성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처음에는 카레 덮밥에서 시작해 생선구이와 맑은국이 곁들여진 백반, 삼계탕과 냉차가 노동자들에게 제공됐다. 이때 여러 단체의 협조를 받아 삼성서비스지회 노동자들에게 노란 밥차를 끌고나와 17일간 식사를 대접했던 곳이 있었는데, 바로 협동조합 '밥통'이다.

고려대를 나온 백완승씨는 '밥통'이 고려대 민주동우회와 공동으로 삼성서비스지회 노동자들에게 한 끼 식사를 제공할 때 처음으로 밥 연대에 참여했다. 이후 백씨의 일상은 바뀌었다. 원래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긴 했으나, 삼성서비스지회에 대한 첫 번째 밥 연대 이후 백씨의 외부 활동 중 상당 부분은 '밥통' 활동으로 모였다. 백씨가 생각하는 밥 연대의 의미는 이렇다.

"헐벗고 굶주릴 줄 알았던 노동자들이 정성껏 차린 따뜻한 밥상을 매일 받아들 때 20층, 30층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자본가의 심장이 오그라들지 않겠습니까? 싸워 이기려면 잘 차린 한 끼 밥상이 필요합니다. 밥심이 필요합니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류승아씨는 동네 언니가 봉사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가 '밥통'과 인연을 맺게 됐다. 종일 식판에 밥과 반찬을 담고 난 뒤 류씨는 마을로 돌아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이웃에 알렸다. 냉장고에서 자고 있던 묵은지를 가져가는 일부터 시작해 직접 반찬을 만들고 급기야 재료를 사기 위해 벼룩 시장을 여는 데까지 이르렀다. 류씨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해요. 죽지 않고 살아서 싸워야 합니다. 밥은 생명입니다. 밥통 연대가 노동자들의 생명을 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쌍차, 삼성, 티브로드 등 1년간 83회 3만명에게 한 끼를 제공한 밥통회원들의 모습
▲ 밥통회원들 쌍차, 삼성, 티브로드 등 1년간 83회 3만명에게 한 끼를 제공한 밥통회원들의 모습
ⓒ 백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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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통'은 2013년 말 공장 노동자와 사회 활동가 몇 명이 모여 '노동자를 위한 좀 더 근본적인 연대가 뭘까'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졌다. 28명이 출자해 협동조합을 설립했으며, 2014년 초 시험 운영을 거쳐 그해 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밥통'의 노란 밥차를 본 사람들은 대개 여러 단체가 연대해 활동하는 것으로 안다. 노란 밥차가 등장하는 지역이 매우 넓기 때문이다. 쌍용차나 코오롱 등 서울 인근의 장기 농성장은 물론,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을 하는 밀양과 청도, 진도 팽목항과 구미 스타케미칼 농성장까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기 때문에 도무지 차 한 대가 전국을 누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 밥차를 운영하는 곳은 연대 사업체가 아니라 협동조합 '밥통' 한 곳이다. 밥차의 신출 귀몰한 출동이 가능한 것은 '밥통' 조합원과 후원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함께 밥통의 밥 연대에 특정 사업별로 결합하는 단체들이 있기 때문이다.

'밥통' 설립 후 현재까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모두 83회 밥차가 출동했다. '밥통'의 밥을 먹은 사람은 연 인원으로 무려 3만 명에 달한다. 5천 원 이상 후원 회원 240명이 보내오는 돈으로 인건비, 밥차 할부금, 임대료, 기름값 등의 고정 경비와 사업비를 모두 충당한다.

'밥통'은 자체 예산으로 소규모 사업장에 출동해 한 끼 식사를 제공하거나 노동절 등 대규모 집회장에서 어묵이나 계란 프라이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무료로 제공한다. 독자 사업 외에 연대 사업이나 수탁 사업도 한다. 노들장애인야학과 공동으로 빈곤철폐연대 문화제에서 300명분, 정의평화선교회의 수탁으로 광고탑 농성 중인 씨엔엠 투쟁 현장에서 200명분의 식사를 제공한 일 등이 그렇다.

위의 백완승씨나 류승아씨의 경우처럼 밥 연대는 마치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다. 한 번 하면 멈출 수가 없고 점점 그 강도가 높아진다. 반찬을 만들면서, 밥을 푸면서 더 없는 충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밥을 먹는 사람들은 어떨까.

"허기 뿐 아니라 희망까지 채워줍니다"

밥통회원들이 세월호 농성장에서 식사를 제공하고 있는 모습
 밥통회원들이 세월호 농성장에서 식사를 제공하고 있는 모습
ⓒ 백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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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통' 그냥 밥만 해주는 거 같은 이 트럭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차는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형용할 수 있는, 사랑, 평화, 희망, 믿음, 기쁨, 우정, 설렘 등 모든 아름다운 말들을 가득 싣고, 이 아름다운 말들이 필요한 곳에 전달해 주는, 혼란한 이 시대의 빛과 같은 존재입니다. 청도 삼평리에서 저는 이 트럭을 두 번이나 봤습니다." (빈기수, 청도345kV 송전탑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페이스북 글의 일부 인용)

"자본가들에게 뒤를 받쳐주는 돈이 있다면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겐 든든하게 배를 채워주는 밥통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밥통이 있어 행복과 새로운 희망이 생깁니다. 영원히 함께 했으면 합니다." (박호준, 희망연대노조 티브로드지부 부지부장)

"밥통은 내 동지의 허기를 채울 뿐 아니라 우리의 희망까지 채워줍니다." (박성주, 삼성서비스지회 부지회장)

협동조합 '밥통'을 설립하는 일부터 시작해 거의 모든 밥 연대에 참여한 정상천씨는 이렇게 말한다.

"'밥통'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노동자들이 더 이상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세상입니다. 제2, 제3의 밥통이 생겨나 노랗고 파랗고 빨간 밥차들이 전국을 누비길 기대합니다. 그런 뒤 어느 날, 더 이상 밥차가 필요없는 세상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밥통'은 오는 20일과 21일 고려대 교정에서 처음으로 후원 주점을 연다. '밥통' 회원들의 꿈은 후원 주점이 성공해 지금보다 더 많은 밥을 푸게 되는 것이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쌍차, #티브로드, #삼성, #노동자, #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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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에서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씨알정신을 선양하고 시민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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