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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밤이고, 밤엔 자는 거라고 엄중하게 꾸짖고 있다.
▲ 잠이 들랑말랑 가을 지금은 밤이고, 밤엔 자는 거라고 엄중하게 꾸짖고 있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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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긴 싫지만, 사람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이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경위는 이렇다. 피곤함에 찌든 하루를 보냈더라도 집에 들어가면 왠지 달콤한 일들이 사정없이 눈에 띈다.

우선, 퇴근 후 가을과의 산책은 나에게 더없는 '힐링'이다. 그리고 세상엔 밤에 먹어야 맛있는 게 참 많다. 붙잡은 책은 결말이 너무나 궁금하고, 스마트 월드엔 진귀한 일들이 쉼 없이 펼쳐진다. 내일 아침에 눈 뜰 일이 걱정되더라도 '힘들겠지' 정도의, 남의 집 감나무의 감이 '맛있겠지' 하듯 뇌까리고 두려움 없이 새벽을 맞아들인다. 다음날 어김없이 울리는 알람 소리에 밀려드는 후회와 자책은 나만 가져본 게 아니겠지.

올빼미족이 특히 조심해야 할 시간

하루를 어떤 식으로 살든 개인의 자유지만, 올빼미족이 특히 조심해야 할 시간이 있다. 일명, '구 남친 타임'(나는 이 표현을 DJ 김신영에게 배웠다)의 개망신. 자정을 넘어 새벽 2시로 접어들 때, 슬금슬금 찾아오는 옛사랑의 기억 말이다.

그땐 그랬지, 저 땐 저랬지, 내가 왜 그랬을까, 그는 왜 그랬을까 하는 우주적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망상을 곱씹다 보면 불현듯 사무치게 밀려드는 고독감! 더불어, 지금 즉시 누군가와 낭만적 애정의 허무함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어지는 기분! 불행하게도 그날 약간의 알코올이나 호르몬(마술)의 응원을 얻었다면 기억조차 희미한 '그분'에게 기어코 전화를 걸고야 만다. 코 잔뜩 먹은 소리로 "여ㅂ..."하다 말고 개 달리듯 종료 버튼을 눌러봐야 이미 일은 벌어졌다. 일기장에 참담한 반성문을 쓰든가 좀 더 울든가 해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다.

이 어리석기 그지없는 '삽질'을 묵묵히 관찰하고 있는 한 생명체가 있다. 이봄가을양은 해가 지면 자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데 밤을 즐기는 동거인 때문에 형광등 아래에서 잠을 설치기도 한다.

식사 중에 촬영하여 미안합니다.
▲ 길손님을 위한 밥상 앞에서 식사 중에 촬영하여 미안합니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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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야단법석을 떨다 문득 뒤돌아봤을 때, 나를 향해 고정된 가을이의 형형한 두 눈! 순간 계단 서른 개를 굴러떨어졌을 때보다 망신스럽다. 그 애의 입은 굳게 닫혀있지만 "ㅉ, 또냐?" 하는 비난을 내뱉는 것만 같다. 언니야 훌쩍이는 모습이 짠해서라도 위로해줄 법도 한데, 가을은 냉정하게 바라보고 단호하게 등을 돌린다. 덕분에 나도 곧바로 정신을 차릴 수밖에.

비단 망신스러움 말고도 새벽에 안 자면 안 되는 중대한 이유가 또 있다. 여러분은 어떤 사적인 고질병을 앓고 계시는지? 디스크? 저혈압? 내장 비만? 나는 두통이다. 머리가 아파져 오기 시작하면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끝. 뭐가 됐든 다 그만둬버리고 싶은 생각에 지배당한다.

병원에 가도 그저 나 같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고 MRI를 공들여 찍어봐야 뚜렷이 나타나는 게 없을 거라고 돌려보내더라. 하지만 잠이 부족하거나 축적된 식량이 부실하거나 호르몬이 널을 뛰는 시기엔 - 즉 최소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시린 이도 괴롭고 위경련도 괴롭고 발가락 골절도 괴롭지만, 사악한 두통만큼 괴롭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진통제도 들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고 '끝'을 염원하며 뒹굴고 있을 때, 나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생명체를 발견한다. 이봄가을. 이런 경우 이 애의 눈빛은 확연히 다르다. 근심을 담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눈망울. 마치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발치에 누워있던 애가 몸을 일으켜 내 가까이 다가와 짧고 통통한 앞발을 내밀면 나는 그제야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온다. 그리고 가을이는 절대로 이런 통증을 모르고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들면서 혹, 나의 그릇된 생각이 이 아이에게 전해졌으면 어쩌나 뜨끔하다.

애니멀 커뮤니케이터 '하이디'는 반려동물과 문제를 겪는 보호자에게 언제나 강조한다. 그들(동물들)에겐 당신이 만들어낸 상상이 전해지고 숨겨왔던 진심도 읽힌다고. 그러니 안 좋은 상황을 마음속에 그려내지 말 것이며, 사과하려거든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더라. 최근엔 국내에서도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들이 제법 활동하고 있다. 그들도 동물의 마음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며 사람의 뜻도 충분히 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데자뷔, 독심술, 예지몽, 텔레파시. 확언할 순 없지만 살면서 이런 경험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나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딸기맛 비타민을 선물로 주는 꿈을 꾸고, 다음날 그 사람으로부터 뜬금없이 딸기맛 비타민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그에게 꿈 얘기를 하자, 재수 없다며 침을 세 번 뱉더라(얼굴이 아니고 바닥에). 또, 친구에게서 온 전화에 다짜고짜 "난 짬뽕 먹었는데"라고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친구는 진짜로 뭘 먹었는지 물어볼 참이었다며 놀라워한 적도 있다.

이것들이야 그저 우연한 일치일 수 있지만, 가을이와의 일상을 보자. 산책 중, 길바닥에 붙어있는 더러운 어떤 것에 흥미를 보이는 가을에게 "무서운 세균이 있을지 몰라"라고 중얼거리기만 해도 가을은 바로 코의 방향을 튼다.

혹은 어느 가게 앞에서 "나 만두 좀 사게 기다려줘"라고 읊조려도 가을은 의심의 여지 없이 기다리는 자세를 취한다. 좀 팔불출인 해석일는지 모르지만, 가을이와 이렇게 이심전심 통하다 보니 나는 두 개의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 되었다는 자부심마저 생기려 한다. 대한민국의 언어와 '소심하되 속 깊은 어느 개'의 언어.

눈빛만 보아도 통하는 경험들...

길을 걷다가 외계인의 지구 침공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 캉캉치마를 입은 가을 길을 걷다가 외계인의 지구 침공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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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알고 눈빛만 보아도 통하는 경험들로 보아 인간을 포함한 동물 모두에겐 여섯 번째 감각이 있는지도 모른다. 개와 인간, 고양이와 햄스터, 소와 닭 사이에도 우정이 싹트지 않는가. 가끔은 사람보다 반려동물에게서 얻는 조용한 위로가 더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좀 더 정성스럽고 견고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녀석들의 기운에 힘입어 이른 아침 기꺼이 눈을 뜨고, 만성 무기력증을 내쫓고, 게으른 궁둥이를 들어 올리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본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며, 우리와 한평생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마음을 읽고 진심을 꿰뚫는 사랑스러운 생명체들을 위해서라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것. 미련은 버리고 좌절하지 말 것.

○ 편집ㅣ조영미 기자


태그:#가을이, #유기견입양기, #텔레파시, #힐링타임, #아침형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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